천도재를 지내 달라고 요구하는 시댁 조상들
외할머니의 천도재가 모두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마음속으로 젊은 여스님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 그날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일반인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볼 수 있다는 젊은 여스님은 나를 처음 보자마자 인사를 나누며 말했다.
“보살님에게 연꽃이 보입니다. 세 개의 연꽃이.”
나는 그 말의 뜻을 알지 못했지만, 불교의 상징인 연꽃에 대한 언급은 내 마음속에 큰 울림이 주었다.
천도재가 끝난 후, 함께 음식을 먹고 있을 때, 여스님은 다시 내게 말을 걸었다.
“보살님, 아주 크고 무시무시한 업구렁이가 보살님을 휘감고 있어요”.
업구렁이, 그것은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깊은 고통이나 미련을 뜻하는 것 같았다.
“업구렁이에게 한번 잡히면 못 벗어나는데, 보살님은 스스로의 힘으로 반쯤 구렁이에게서 벗어났네요. 그리고 구렁이도 보살님을 놔준다고 합니다.”
이어진 스님의 말을 듣고 업구렁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마지막으로 절을 나서며, 여스님은 나에게 또 다른 말을 남겼다.
“친정 쪽만 천도재 지내준다고, 시댁 조상들이 화내고 있어요. 자신들도 천도재 지내 달라고 하네요.”
스님의 말을 들은 나는 잠시 멍하니 서서 마음속에 차갑게 스며드는 그 말의 의미를 생각했다. 친정은 내게 늘 따뜻하고 정겨운 곳이었다. 특히 외할머니는 언제나 자손을 위하는 분이었다. 살아 있을 때도, 돌아가신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신통력에 대한 이야기는 어려서부터 전설처럼 들어왔다. 돌아가신 후에도 남편이 가는 점집마다 외할머니가 나타났다. 나는 용인에서 외할머니가 무속인을 몸을 차지하고 말하는 것을 본 적도 있었다. 그런 외할머니가 좋은 곳으로 가기를 바라는 것은 후손으로서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시댁은 달랐다. 그들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아니, 그들의 존재는 그저 멀고 낯선 그림자 같았다. 그들이 나에게 해 준 것이 무엇이냐고 묻고 싶었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 그 고통의 근원 대부분이 바로 그들의 후손인 남편에게서 비롯된 것인데, 그 남편의 조상들이 나에게 천도재를 지내 달라고 한다!!!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내 안에서는 얼굴도 본 적이 없는 시댁 조상들에 대한 분노가 서서히 차올랐다. 내가 남편의 조상들을 위해 천도재를 지내주는 일이, 내게 얼마나 억지스러운 일인지 그들은 정말 모른단 말인가?
남편과 시댁 때문에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감정을, 그리고 삶의 평화를 잃었는지. 그들은 나를 괴롭혔고, 나는 여전히 그 괴로움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내 마음속에서 터져 나오는 부조리함에, 나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나는 분노 속에서 남편과 그동안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떠올리기 시작했다.
시댁에서 선물로 받은 27평 신혼 아파트는 꿈만 같았다. 융자가 있었고 남편과 공동명의였지만 생애 최초의 내 집이었다.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깔끔하게 발라진 흰색 벽지가 눈에 들어왔다. 창문 너머로는 먼 산이 보였고, 거실에는 따듯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우리 집이야. 여기서 우리만의 신혼이 시작되는 거야.”
남편의 말을 들으며 나는 아파트 구석구석을 돌아보았다. 대전에서 준비해서 인천으로 올려 보낸 혼수들이 자리를 잘 잡고 있었다. 부엌에는 최신형 가전제품들이, 침실은 커다란 침대가 따뜻하고 아늑하게 놓여 있었다. 거실에는 에어컨과 벽걸이 티브이, 그리고 오디오가 놓여 있었고, 작은 방에는 책상과 커다란 책장이 놓여 있었다. 신혼집을 방문할 손님을 위한 침실까지, 완벽한 신혼집이었다.
2002년 27살, 여름에 결혼했다. 2002년은 대한민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개최한 FIFA 월드컵이 열린 해였다.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은 이 대회에서 4강에 진출하며 국민들에게 큰 자긍심과 기쁨을 안겨주었다. 2002년은 세상도 나도 빨갛게 달아오른 축제였다.
신혼 초에 나는 대전에서 일하고 주말에만 인천에 올라갔다. 대전에서의 바쁜 일상은 나를 지치게 했고, 주말마다 가는 인천 신혼집에서 남편과 보내는 시간은 달콤했다. 대전에서의 일을 접고 인천으로 완전히 이사하기로 결정했다.
2003년 1월, 그렇게 신혼집으로 완전히 들어온 첫날, 나는 들뜬 마음으로 짐을 풀고, 이곳에서 남편과 함께할 날들을 그려보았다. 남편과 나의 둘만의 집에서, 아침마다 함께 커피를 마시며 서로의 일상을 나누고, 저녁엔 따뜻한 식사를 함께 할 생각에 마음이 설렜다.
하지만 내가 인천에 온 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시부모님께 전화가 왔다. 통화를 마친 남편은 나에게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내 동생이 앞으로 여기서 함께 살 거야. ”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남편과 보낼 신혼을 기대하고 인천에 왔는데, 신혼집에서 시동생까지 함께 살아야 하다니. 신혼의 따스한 기대와 설렘은 점차 묵직한 무게로 변해갔다. 나는 마음속에서 답답함을 느꼈다. 왜 넓은 아파트를 샀을까?라는 후회도 했다.
아직 어두운 새벽빛이 창문 너머로 스며들 때면 남편이 출근했다. 나는 남편 없이 시동생과 함께 아침을 먹기 위해 식탁에 앉았다. 시동생은 반듯하게 앉아 내가 차려주는 음식을 먹었다. “아침 잘 먹어요.” 나의 목소리는 평범했지만, 음식을 입에 넣기도 전에 시동생의 눈치를 보며 괜히 긴장하곤 했다.
결혼식을 하기 전에 남자 친구와 작은아버지 댁을 찾아 인사를 드렸다. 작은아버지는 남자 친구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긴장된 공기 속에서 작은아버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얘는 책 읽고 공부만 할 줄 알지, 살림은 전혀 못한다.”
작은아버지는 결혼을 축하한다는 말 대신 이 말을 먼저 했다. 남자 친구는 잠시 당황한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작은아버지는 마치 사자처럼 날카롭고, 예리한 눈빛으로 남자 친구를 바라보았다.
작은아버지는 거침없이 말했다.
“결혼하고 나서, 자네가 아내에게 기대하는 살림, 가사, 집안일… 이 모든 걸 얘가 잘 해낼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이 결혼 접어라. 얘는 공부만 할 줄 알지 그런 건 해본 적이 없어.”
작은아버지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강해졌다.
“나중에 그걸로 싸우고, 힘들어할 거라면 처음부터 결혼하지 않는 것이 나아.”
작은아버지는 잠시 숨을 고르고, 남자 친구의 반응을 조용히 살폈다. 나는 작은 아버지의 말과 행동에 당황했지만 그가 말한 것이 사실이었기에 조용히 수긍했다.
남자 친구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의 마음속에서 여러 생각들이 교차하는 듯했다.
“알겠습니다,” 그는 마침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우리는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살림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작은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 마디 덧붙였다.
“결혼이란 것은 사랑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한번 말하는데, 결혼 후, 살림 솜씨를 가지고 타박할 거면 처음부터 결혼하지 않는 것이 나아.”
작은아버지는 그렇게 남자 친구에게 결혼하며 겪을 수 있는 고통과 갈등을 미리 알렸다. 남자 친구는 그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애 시절, 남편은 내가 책을 좋아하고 공부하는 걸 좋아하는 것에 대해 아주 좋게 평가했다. 결혼해서도 계속 공부하기를 원한다면 지원해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책만 읽고 공부하는 것만 좋아하는 것이 결혼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나도 남편도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결혼 후 주말부부를 끝내고 함께 살면서 남편과 요리문제, 살림 문제로 다투는 일이 많아졌다. 그날도 어김없이 주방은 뜨겁고, 마음은 더욱더 차가워졌다. 결혼 후 늘 반복되는 일이었지만 매번 나는 요리하는 것에 관심도 재능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럼에도 나름의 최선을 다해 상을 차렸다.
“나는 집밥이 먹고 싶어. 다른 여자들은 다 잘하는데, 왜 너만 못하는 거야?”
남편의 말이 한순간에 내 심장을 찔렀다. 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그의 얼굴엔 짜증과 불만이 서려 있었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살림을 잘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려는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어느 순간, 남편은 나와 같이 식사를 했는데 남들에게 내가 밥을 안 준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집에서 먹는 밥이 집밥이지, 다른 게 집밥인가? 도대체 그가 말하는 집밥이란 뭘까?’
주방의 뜨거운 온도와, 그의 차가운 시선이 내 안에서 서서히 무겁게 내려앉는 나날이었다.
“다른 여자들은 다 잘하는데 왜 너만 못하는 건데?”
반복되는 남편의 질타가 내 머릿속에서 울렸다. 얼굴도 본 적이 없는 완벽하다는 다른 집 여자들에게 늘 비교당했고 나는 점차 스스로를 열등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무언가 막혀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느 순간, 싱크대 앞에만 서면 남편이 준 상처를 되새기며 마음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이렇게 나는 점차 싱크대에 트라우마가 생겨갔다.
시동생은 출근할 때 도시락을 들고 집의 현관을 나섰다. 아침은 내가 차려 주었지만, 도시락은 도련님이 직접 쌌다. ‘형수로서 도시락도 못 싸주는 내가 과연 제대로 된 사람인가?’ 그런 죄책감이 자꾸만 마음속을 갉아먹었다. 또 한편으로는 내가 도시락을 싼다면 그것대로 큰 부담감이 느껴질 거라는 걸 알기에 그 순간이 나에게는 어느 때보다 괴로웠다.
남편이 돌아오는 시간은 점차 늦어졌고, 그는 어느 순간, 항상 술 내음과 함께 어두운 새벽에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저녁도 시동생과 둘이서만 먹었다. 시동생은 말이 없고 조용한 사람이었다. 남편의 부재와 그로 인해 발생한 공허함이 점점 크게 와닿았다. 어색하고 맛없는 저녁 식사 후, 나는 내 방으로 들어갔고 시동생은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벽걸이 티브이와 소파, 에어컨까지 완벽하게 갖추어진 거실은 그저 황량하기만 했다.
나는 정말이지 이 상황에서 간절하게 벗어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