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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화. K 장남의 돈 개념

by 엄마쌤강민주

나는 마음속으로 외할머니 천도재에서 만난 젊은 여스님의 말을 되새기고 있었다.

“친정 쪽만 천도재 지내준다고, 시댁 조상들이 화내고 있어요. 자신들도 천도재 지내 달라고 하네요.”


나는 참회문을 펼쳐 들었다. 한 글자 한 글자에 집중하며, 내가 살아온 삶을 돌아보았다. 앞으로는 10선을 지키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며,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회한을 참아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과 시댁에 대해 내 안에 맺힌 감정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왜? 왜 시댁 조상들까지 내가 천도재를 지내야 하는 걸까?’


남편과의 관계에서 반복된 갈등, 그로 인해 내 마음에 깊이 새겨진 상처들. 그 상처들은 나에게 시댁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키워 갔다. 즉 나는 시댁 조상들에게 잘못한 것도 없고 그들을 사랑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남편의 조상들에게까지 내가 천도재를 지내야 한다는 것이 여전히 납득되지 않았다. 매일 지난날의 잘못을 눈물로 참회하는 시간을 보내면서도, 여전히 남편이 나에게 준 상처를 떠올리면 고통스러웠다.


하루는 남편이 출근하다가 눈이 마주친 시동생에게 불편한 점은 없는지 물었다. 시동생은 집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기공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시동생은 고개를 저으며, “괜찮아. 그냥 전철역까지 걸어가는 게 조금 귀찮을 뿐이야.”라고 답했다. 남편은 시동생이 매일 아침저녁으로 걸어 다니는 그 길을 택시 타고 다녔다. 남편은 시동생을 안쓰럽게 바라보더니 용돈을 건네고 나에게 시동생에게 잘해주라고 당부했다.



말일이 돌아왔다. 주말부부로 살 때는 인천 집에 들어가는 돈에 대해서 내가 신경 쓸 일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대전에서 인천으로 온 다음, 남편이 나에게 자신의 월급통장을 맡겼다. 집안의 전기세, 가스비, 전화비, 그리고 카드 값까지... 식구가 한 사람 늘면서 들어가는 돈도 늘었다. 주방에서 식탁에 앉아 계산기를 눌러가며 하나하나 세고 있자니, 내 손끝에서 쌓여가는 숫자들이 마치 무거운 짐처럼 내 어깨를 짓눌렀다.


그때, 거실에서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 주말엔 문경(시댁)에 가야 돼. 선물 챙기고, 할머니와 동생들 용돈도 넉넉하게 준비해. 그리고 부모님한테는 조금 더 챙겨 드려.”

그는 당연한 듯 말했지만, 그 말속엔 어떤 일말의 책임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시댁에 갈 때마다 괴로웠다. 시댁에 잘해야 한다고 세뇌받으며 살아온 세월은 남편이 하는 말에 따르는 것이 결혼한 며느리로서의 올바른 도리 같았다. 나의 눈길이 자연스레 남편의 월급통장으로 향했다. 2003년 그의 통장에 찍힌 월급은 시동생보다 딱 10만 원 더 많은 80만 원이었다.

“자기야, 그런데 자기 월급으로는 너무 부담스러워. 이번에는 조금 줄여서 가자.”

내가 그렇게 말하면, 그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냥 해드려. 내가 장남인데 그 정도는 해야지.”


결혼 전에 그와 함께 시댁에 갔을 때, 그가 집안에서 얼마나 사랑받는 존재인지 눈으로 보았다. 결혼하면 남편이 시댁에서 받는 그 사랑을 나도 함께 받는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나의 존재 가치는 그의 아들을 낳을 여자, 집안의 대소사를 책임지는 집사, 딱 그것이었다. 그리고 결혼 전에는 시부모님께 남편이 용돈을 받았는데 결혼 후에는 남편이 시부모님께 용돈을 드려야 한다고 했다. 남편이 말하는 선물과 용돈을 챙기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시댁에 가는 일은 늘 이렇게, 부담스럽고 헛헛한 마음으로 시작되었다.


남편의 월급통장을 처음 보았을 때, 거기에 찍힌 금액은 남편이 평소 나와 시댁에 말했던 월급의 딱 절반이었다. 내가 인천에 오기 전에 벌던 금액보다 무려 100만 원이 더 적었다. 남편의 월급에 대해 남편에게 물었다.

“왜, 왜 그랬어?”

묻지 않으려 참고 참았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왜 월급을 그렇게 속였어?”

나의 목소리는 낮고 떨렸다.


남편은 침대에 앉아, 내 눈을 보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냥… 부모님이 걱정하실까 봐… 자식 된 도리로 두 분이 걱정 안 하시게 그냥 그렇게 말했어… 그리고 원래 160만 원이 맞는데 신입은 1년 동안 월급의 절반을 회사의 주식을 사야 해서 들어오는 돈이 적은 거야”

남편은 전형적인 K 장남이었다.


나는 당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공과금과 아파트 이자에 대한 해결책을 남편에게 물었다.

“이번 달만 네가 해결해 줘. 다음 달부터는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남편은 나에게 큰소리쳤다. 그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고, 마치 그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확신에 차 있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신감을 보이며 나섰지만, 나는 이미 몇 번이나 그런 말을 듣고 그 기대가 배신당한 적이 있었다. 매번 ‘이번 달만’이었고, 매번 그 말은 그가 실천에 옮기지 못한 약속에 불과했다.

“매번 그랬잖아. 그때마다 자기는 ‘이번만’이라고 말했는데, 결국은 내가 다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잖아.”

남편은 나의 말을 듣고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다시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번엔 달라. 이번엔 내가 다 알아서 할 거니까. 믿어줘.”


얼마 후, 나는 남편의 짐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하나의 서류봉투를 발견했다. 아무 생각 없이 열어본 그 안에는 낯선 대출 계약서와 그 위에 적혀 있는 금액이 눈에 들어왔다. 500만 원. 나는 한동안 그 숫자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나는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다시 살폈다. 그리고 남편이 결혼 전, 나 몰래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하고 500만 원의 대출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게… 이게 뭐야?”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남편에게 물었다. 남편은 당황하는 대신, 나의 눈을 피하지 않고 고개를 쳐들었다. 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 얼굴엔 억지스러운 자신감이 떠올랐다.

“너랑 연애하느라 돈이 필요했어. 널 놓치기 싫었거든”


시간이 멈춘 듯했다.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가슴이 답답했다. 나는 서류를 내려놓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앉았다. 그동안 남편과 함께 쌓아온 삶의 신뢰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 때, 우편함에서 나온 한 장의 봉투가 나의 시선을 붙잡았다. 평범한 송장일 것이라 생각하고 무심코 집어든 그 봉투 속엔 예상치 못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학자금 대출 관련 안내문. 나는 그것을 보고 한동안 손에 들린 종이를 내려놓을 수 없었다.

“이게… 무슨 뜻이지?”

나는 소리 없이 중얼거리며 봉투를 찢었다. 종이를 펼쳐 눈을 떼지 못했다.

‘대출 상환 안내. 잔액 500만 원.’

그 숫자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그 안내문을 다시 살펴봤다. 남편의 이름과 대학 대출 정보, 그리고 상환해야 할 금액이 적혀 있었다.


내가 알기로 남편은 시부모님이 등록금을 내주셨다. 그가 호주로 유학을 떠났던 것도, 부모님으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았던 것이었다. 그런데 왜? 왜 이런 일이 발생한 걸까? 나의 마음속에 커다란 충격이 밀려왔다. 남편은 그동안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자기야, 이거… 이게 뭐야?”

나는 학자금 대출 안내문을 손에 쥐고 그를 바라보았다. 남편은 순간적으로 얼굴이 굳었다. 뭔가 숨겨진 비밀을 들킨 것처럼, 그의 눈빛이 어색하게 흔들렸다.

“그게… 그거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야. 유학에서 돌아오고 다시 학교에 복학했을 때 사람들과 어울리느라 돈이 필요해서 대출 좀 받았어.”

남편은 여전히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다 해결할 수 있어. 너는 전혀 걱정할 필요 없어. 내가 너 사랑하는 거 알지?”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동안 믿었던 남편, 그가 한동안 숨겨왔던 모든 것들이 나를 상처 입히고 있었다.


남편이 아직 퇴근하지 않은 어느 날, 나는 시동생을 거실로 불렀다. 나는 남편의 월급통장을 시동생 앞에 펼쳐 보였다. 그리고 그 통장에 찍힌 숫자들을 차분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도련님, 형이 지금 받는 월급으로는 모든 것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태예요.”

나는 시동생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형이 매달 벌어들이는 돈은 도련님 보다 겨우 10만 원 더 많고, 그마저도 대부분 빚을 갚는 데 쓰이고 있죠. 생활비가 아예 없어요”


시동생은 처음에는 믿기 힘든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평소 형의 큰소리와 자신감 있는 모습에선 전혀 상상할 수 없던 현실이 눈앞에 펼쳐지자, 그의 표정은 서서히 굳어졌다. 나는 한 마디 덧붙였다.

“형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이게 현실이에요. 도련님께 생활비를 따로 받지는 않겠지만 그 어떤 지원도 해 줄 수 없어요,”


시동생은 잠시 말없이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의 눈빛은 당황과 혼란이 섞여 있었다. 그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실망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 시동생은 아무 말도 없이 가볍게 인사를 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몇 달 후 그는 다른 지방으로 일자리를 구해서 집을 나갔다.



나는 이제 조금은 숨통이 트일 거라고 기대했지만 남편의 행동은 갈수록 더 이해하기 힘들었고 나를 상처 입히는 일도 더 빈번해졌다. 나의 영혼은 점점 병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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