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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화. 내 손금에 나와 있는 내 남편

내가 바뀌어야 세상도 바뀐다

by 엄마쌤강민주

남편에게 상처받을 때마다 첫날밤의 약속을 떠올렸다. 신혼 첫날, 은은한 분위기의 조명 속에서 나와 남편은 호텔 침대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아직 결혼식의 설렘이 가시지 않았지만, 우리의 대화는 예상보다 깊고 진지했다.

“우리, 약속 하나 하자. 진짜 이혼할 생각이 아니라면, 절대 이혼을 입에 담지 말자. 어려운 일이 생겨도, 힘든 일이 있어도, 그 말은 절대로 하지 말자.”

나는 남편이 하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러자, 우리 그 약속은 꼭 지키자.”


그렇게 우리는 손을 맞잡고 서로에게 진심을 담은 약속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어려운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경제적인 문제, 시댁 갈등, 불안한 미래에 대한 걱정. 그러나 그 어떤 힘든 순간에도, 나는 결코 이혼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고통스러운 순간마다 마음속으로 이혼이라는 단어가 스쳤다 하더라도, 나는 그날의 약속을 떠올리며 입 밖으로 이혼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자궁 외 임신으로 나팔관이 터져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왔을 때, ‘아이는 밖에서 낳아 올 테니 너는 돈이나 벌어’라고 한 남편의 말과 행동은 절대 용서가 되지 않았다. 나는 잘 나가는 부동산 사무실을 남편과 상의 없이 접었다. 그런데 갑자기 친정어머니가 암에 걸렸다. 남편이 어머니를 인천으로 모셔왔고 나는 어머니를 간호하느라 남편과 이혼할 시간이 없었다.


어머니는 인천에서 머물며 암 수술과 항암치료까지 끝내고 대전으로 돌아갔다. 나는 그 후 또 한 번의 유산을 겪었다. 이번엔 다태아 유산이었다. 아이가 내 자궁에서 심장까지 뛰었다가 유산되었기에 상처가 매우 컸다. 그러나 삶은 계속되었고 나는 미래를 위한 투자로 2008년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기 위한 학원에 등록했다.


학원에는 여러 사연을 품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중 한 분, 60대의 여사님이 있었는데 그녀는 늘 쾌활하고 에너지 넘치는 모습으로 나를 포함하여 사람들과 화통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하지만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의 비극적인 과거를 우리에게 고백했다.


그녀는 젊은 시절, 남편이 바람나서 집을 떠나버린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남편은 그녀와 두 아이를 버리고 다른 여자를 선택했다. 당시 그녀는 남편의 배신에 큰 충격을 받았지만, 남편 없이 아이들을 키워야 했기 때문에 남편의 외도로 인해 상처 입은 마음을 돌볼 시간이 없었다고 했다. 여자 혼자서 아이들을 키우고 살아남기 위해 기치료를 배웠고, 그 기술로 지금까지 수십 년을 먹고살았다.


그녀는 말했다.

“그때, 난 정말 힘들었어요. 남편이 떠나고, 두 아이를 어떻게 키울까 걱정이었죠. 그래서 기치료를 배우기로 결심했어요. 기치료는 제가 살아갈 방법이었고, 아이들을 키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어요.”

그녀는 미소 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 미소는 환해 보였지만 그 속에는 무수한 눈물과 고통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더욱 묵직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 이야기는 나를 비롯한 많은 수강생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얼마 전, 다 늙고 병든 남편이… 바람나서 나와 자식을 버리고 떠났던 그 남자가 나를 찾아왔어요. 처음엔 믿기지 않았죠.”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잠시 후 눈을 떴을 때 눈에는 단호한 의지가 담겨 있었고 그 눈으로 우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 사람은 이제 늙고 병들었어요. 나와 자식들을 버리고 선택했던 사랑하는 여자에게 버림받았어요. 그를 돌볼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었어요. 그때 나는 많은 생각을 했어요. ‘내가 이 사람을 돌봐야 할 이유가 있을까?’ 많은 고민 끝에 결국 나는 그 사람을 돌보기로 했어요.”

그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려고 여기 온 거예요. 병든 남편을 돌보려면 그 자격증이 필요할 것 같아서.”

그녀의 말에 나를 비롯한 모든 수강생들이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녀의 삶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소설처럼 복잡하고도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그 여사님이 요양보호사가 되기로 한 것은 지난날 자신에게 상처 주었던 남편을 받아들임으로써, 과거에 치유하지 못했던 고통과 아픔을 극복하고, 성숙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모범사례였다.


어느 날, 여사님이 내 손금을 봐주시겠다고 했다. 기치료와 함께 손금 보는 법도 배우셨다고 했다. 그녀의 손끝에서 흐르는 기운이 내 손금에 닿자, 그 차가운 느낌이 내 몸속 깊숙이 스며드는 듯했다.

“당신은 돈에 관심이 없지만 돈을 벌려고 하면 돈을 잘 벌 수 있어요.”


여사님의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신중했다. 그녀는 손끝으로 내 손금을 더듬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남편은..., 돈을 많이 버네요. 그런데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손으로 물을 받으면 물이 줄줄 빠져나가는 것처럼 돈이 다 빠져나가는 타입입니다. 남편 믿고 있다간 길거리에 나앉을 거예요.”


그 말에 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 않았던 이유, 그동안 남편은 수입이 많았지만 늘 더 큰돈에 목말라했고 더 큰돈을 벌려다가 기존에 벌어두었던 돈을 날리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나에게도 큰돈 벌기를 강요했다. 이런 남편에 대한 불만이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혼하면 어떻겠냐는 나의 물음에, 그녀는 다시 한번 말을 이었다.

“남편과 이혼하고 다른 남자 만나면 지금보다 잘 살 것 같죠?”

그녀의 눈빛은 나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

“하지만 당신 손금에 당신 남편은 이런 사람이라고 나와 있는데, 당신이 아무리 다른 남자를 만난다고 해도 당신 손금이 변하지는 않는 이상 당신의 남편이 되면 다 똑같아져요.”

그 말에 나는 절망감이 밀려왔다. 그동안 이혼하면 행복해질 거라는 기대가 있었는데, 여사님의 말은 내 마음을 짓누르는 무거운 돌덩이 같았다.


그녀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 침묵 속에서 내 마음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러다 그녀는 다시 한번 내 손을 살며시 잡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은 한번 들어온 돈을 놓치지 않고 잘 지키는 타입입니다. 절대로 남편에게 보증 서 주거나 사업자금 대주지 말고, 재산을 당신 명의로 하면 남편 때문에 길바닥에 나앉는 일 없이 잘 살 수 있어요. 꼭 재산을 당신 명의로 하세요”


그녀의 조언은 내 마음에 작은 희망의 불꽃을 지폈다. 나는 앞으로 남편에게 의지하지 않고 내 손으로 내 삶을 지키고, 내 미래를 만들어 가기로 결심했다. 이런 결심을 하자 굳이 남편과 이혼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리고 얼마 후 내 인생에서 너무나도 소중한 무럭이를 품에 안았다.



그동안 내가 삶의 고통을 호소할 때마다 사람들은 말했다.

“아이가 없어서 그래. 아이만 낳으면 다 잘될 거야.”

나는 인생의 모든 고통을 해결해 준다는 귀한 아들을 낳았다. 이제 정말 인생 꽃길이겠거니 생각했는데, 남편은 나를 땅으로 추락시켰다. 그것도 모자라 지하실도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지하 1층 밑에 지하 2층이 있고 지하 2층 밑에 지하 3층이 있고, 지하 3층 밑에는 지하 4층이.... 나는 추락할 때마다 온몸과 마음이 다쳐서 피범벅이 되었고 점차 나다움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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