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꿈에서 항암제를 건넨 스님

관음보살이 지키는 아이

by 해안 강민주

-반야심경 독송 영험담 다섯번 번째 이야기-


‘반야심경’ 독송 중 갑자기 책을 펼치면 문자가 흐릿하게 보였고, 읽어도 읽은 것 같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 그때 꿈에서 반야심경을 읽지 못하게 내 눈을 가리는 여자아이 귀신을 보았다.

눈을 뜨자마자, 나는 꿈속에서 본 귀신에 대해 어머니와 구미 이모에게 조심스럽게 전했다. 내 말에 둘은 잠시 말을 잃은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긴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귀신, 우리가 쫓아내자”


당시 외가는 말 그대로 ‘난리통’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온 집안을 휘감고 있는 듯한 기운이 감돌았고, 모두가 알게 모르게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친정집은 어머니가 암 투병 후 극적으로 살아 돌아온 직후였다. 죽음의 문턱에서 기적처럼 발걸음을 돌린 어머니를 보며 가족들은 잠시 안도했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않았다. 병마가 물러간 자리를 불안이 대신 채웠다. 몸을 겨우 추스른 어머니는 그 이후로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를 드렸다. 부처님께, 하나님께, 때로는 이름 모를 하늘의 존재에게도 두 손을 모았다. 어머니의 기도는 점점 더 간절해졌다.

그 와중에, 집 안에선 설명되지 않는 일들이 잇따라 벌어졌다. 멀쩡히 벽에 걸려 있던 시계가 갑자기 ‘뚝’ 소리를 내며 떨어져 산산이 깨졌다. 몇 년째 한 번도 움직인 적 없던 액자가 마치 누가 밀어낸 듯 툭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날씨 때문도, 우연이라 하기엔 이상한 일들이 이어졌고, 집 안엔 언제부터인지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감돌았다.


그건 단순한 불길함이 아니었다. 무언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그것’이 집 안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것만 같았다. 모든 일이 일어나기 직전의 정적. 마치 고요한 호수 밑에서 커다란 식인 물고기가 꿈틀대는 듯한, 불길하고도 무시무시한 예감이 일상을 잠식했다.


어머니는 불길한 기운을 느낄 때마다 두 손을 모았다. “부처님이든, 하느님이든, 누가 되었든…” 그녀는 낮게 속삭이듯 기도했다. “제발, 우리를 지켜주십시오.”


구미 이모는 어릴 적부터 교회에 다녔다. 언젠가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에 의하면 이모에게는 외할머니의 집 한 켠에 놓인 불상과 향 냄새, 그리고 불경을 외우는 외할머니의 낮고 느릿한 목소리가 공포였다고 했다. 이모는 그 모든 것을 싫어했다. 아주 많이. 그래서 아주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녔다고 했다. 그로 인해 외할머니와 갈등이 심했다고 했다.


어느 날, 중학생이던 나에게 이모가 성경책 한 권을 내밀었다. 두툼하고 단단한 표지, 무게감 있는 책이었다. 이모가 말했다.

“성경은 베스트셀러야. 종교를 떠나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읽어봐야 해.”


그 말이 어쩐지 멋지게 들렸다. 마치 어떤 깊은 비밀의 문을 여는 열쇠처럼 느껴졌달까. 나는 별다른 망설임 없이 그 책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구약의 창세기부터 신약의 요한계시록까지, 천천히, 한 장씩 넘기며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렀다. 이모에게 연이은 불행이 닥쳐왔다. 누군가는 “신병이래.”라고 수군거렸고, 또 누군가는 “미친 거 아냐?”라고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동아 어미(구미 이모)가 신을 미워해서 신이 자신을 미워한 동아 어미를 일부러 택한 거래.”


이모는 삶이 무너질 듯 흔들릴 때마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이모는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러던 어느 날 이모는 기도 중에 갑자기 눈을 뜨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래가 보여… .”


이 말을 들은 어머니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결국 함께 무속인을 찾아갔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이모가 기도 중 본 광경이 무속인의 입에서 하나하나 정확히 되짚어졌다. 단순한 우연이라 하기엔 너무 정밀하고 생생한 일치였다. 그 일이 한 번이 아니었다. 이모가 기도 중 본 장면들, 그것들이 무속인의 말과 거듭 겹쳤다. 기이한 일의 반복은 우리 모두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믿고 싶지 않은 것을 믿게 되는 순간들이었다.


나는 그 모든 혼란 속에서 침묵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당시 신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참회문과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있었는데 내가 꿈에서 본 사건을 이틀 혹은 사흘 뒤, 이모가 기도 중 보았다며 그 장면을 그대로 말해주었다. 꿈에 보이는 일들은 안 좋은 일이 대부분이어서 나는 더 두렵고 불안했다.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 기도하는 이모의 얼굴은, 처음엔 어딘가 평온했다. 두 손을 모은 채 조용히 눈을 감고 앉아 있는 그녀는 마치 일상의 모든 무게를 내려놓은 듯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그녀의 표정은 서서히 변해갔다. 그 잔잔하던 얼굴 위로 알 수 없는 그늘이 드리웠고, 그늘은 점차 깊은 어둠으로 번져나갔다. 그것은 마치 닿을 수 없는 어떤 세계, 이승과 저승의 경계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녀의 영혼을 스쳐가는 듯한 기묘한 변화였다.


눈꺼풀 아래로 미세한 떨림이 일었다. 숨조차 삼켜야 할 것 같은 침묵 속에서,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얼굴엔 공허한 듯한, 그러나 그 안에 무언가를 꼭 눌러 담고 있는 듯한 진지함이 어려 있었다. 시간은 마치 얼어붙은 듯 멈춰 있었고, 그 고요함을 가르고 이모가 갑자기 눈을 떴다.

그녀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아니, 내 눈을 넘어, 내 속 깊은 어딘가를 꿰뚫어 보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마치 내 안에 숨겨진 무언가를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 안의 아이가 말하네…”

처음엔 그렇게, 내 안의 무언가가 하는 말이라며 이모는 중얼거리듯 여러 말을 이어갔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내 뒤를 응시하며 말했다.


“너는 관음보살이 지키는구나.”

그리고, 마치 누군가 눈앞에 서 있는 듯한 시선으로 허공을 향해 말했다.

“지금, 여기… 관음보살이 와 있다.”


그 말과 함께, 이모의 목소리가 변했다. 평소에 들었던 그녀의 기도와는 전혀 다른 낯선 운율, 마치 누군가를 애타게 설득하는 듯한 절절한 말투였다. 그 음성은 구슬프고도 간절했다.

“관음보살… 관음보살… 이 아이에게 들인 어미의 피눈물 나는 정성을 아십니까? 당신이 그것을 갚을 수 없다면, 이 아이를 탐해서는 아니 됩니다. 이 아이에게서 떠나세요… 관음보살… 관음보살…”


나는 숨을 멈춘 채 그 말을 들었다. 평소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으로 끝맺을 그녀의 기도가, 오늘은 관음보살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관음보살이라는 이름으로 끝나고 있었다. 낯익으면서도 낯선 기도. 나의 두 손은 저도 모르게 땀으로 젖어 있었고, 가슴은 이유 없는 불안으로 요동쳤다.


기도가 끝난 뒤, 이모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리고 나직이,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이번 생에는 하느님 법 공부했는데… 전생에는 불법을 공부했구나.”


그녀는 다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관음보살이 옆에서 지키는 아이야. 오늘 밤 안으로, 귀신은 떠날 거야.”


그리고 그 밤, 꿈속에서, 하늘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거칠고 험악한 욕설. 그 목소리는 단순한 분노가 아니었다. 비통하고 고통에 찬, 혼의 절규처럼 날카롭게 내 마음을 파고들었다. 나는 그 소리에 깜짝 놀랐고, 온몸이 떨렸다.


이어지는 꿈속. 나는 고즈넉한 산사의 돌담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늦은 해가 절벽 너머로 스며드는 시간, 은은한 풍경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왔다. 걸음걸음, 마음이 고요해졌다. 그러다 문득, 한 스님이 내 앞에 나타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한쪽 다리를 절룩였고, 법복 자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스님은 조용히 내게 다가와 작은 약병을 건넸다.

“항암제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병을 열어 약을 마셨다. 그 순간, 혀끝을 짓누르는 쓴맛이 온몸에 퍼졌다. 몸속 깊은 곳까지 쓰디쓴 기운이 흐르며, 온몸이 진저리치는 듯한 감각으로 물들었다.


다음날 이모가 하늘에서 들려온 거친 욕설에 대한 꿈을 해석해 주었다.

“그 여자아이는 술집에 있다가 네 남편을 따라서 너희 집에 온 거야. 그 아이는 네가 천도해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네가 천도 안 해주고 쫓아내서 화가 나서 너한테 욕하고 떠난 거고.”


그 후, 내 눈은 멀쩡해졌다. 눈앞이 선명하게 보였고, 그동안의 어두운 흐림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날 이후, 이상하리만큼 내 안에 드리워졌던 그늘은 사라졌다. 무겁던 공기는 가벼워졌고, 나는 오랜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숨을 쉬는 것이 새롭게 느껴졌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신에게서 벗어났다.

이 일이 있기 전까지 구미 이모는 나에게 “너는 종교적 잡종이라 삶이 고단한 거야.”라는 말을 하곤 했다. 그러나 이 일이 있고 나서 이모는 더 이상 스님인 큰 이모와 대립하지 않았고 돌아가신 외할머니에 대해서도 원망을 내려놓았다. 그 후, 서서히 종교가 다름으로 인해 집안에서 다투는 일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금산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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