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암과 항암치료
-반야심경 독송 영험담 여섯 번째 이야기-
‘반야심경’ 독송 중 갑자기 책을 펼치면 문자가 흐릿하게 보였고, 읽어도 읽은 것 같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 꿈에서 반야심경을 읽지 못하게 내 눈을 가리는 여자아이 귀신을 보았다. 어머니와 이모가 힘을 합해 이 귀신을 쫓아 내기로 했다.
그날 있었던 일이다. 교회에 다니는 구미 이모가 제사상의 가운데에 앉아 기도를 했다. 이모는 기도 중 내 뒤를 응시하며 말했다.
“지금, 여기… 관음보살이 와 있다.”
그 말과 함께, 이모의 목소리가 변했다. 평소에 들었던 그녀의 기도와는 전혀 다른 낯선 운율, 마치 누군가를 애타게 설득하는 듯한 절절한 말투였다. 그 음성은 구슬프고도 간절했다.
“관음보살… 관음보살… 이 아이에게 들인 어미의 피눈물 나는 정성을 아십니까? 당신이 그것을 갚을 수 없다면, 이 아이를 탐해서는 아니 됩니다. 이 아이에게서 떠나세요… 관음보살… 관음보살…”
평소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으로 끝맺을 그녀의 기도가, 오늘은 관음보살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관음보살이라는 이름으로 끝났다. 기도가 끝난 뒤, 이모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리고 나직이,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이번 생에는 하느님 법 공부했는데… 전생에는 불법을 공부했구나.”
그녀는 다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관음보살이 옆에서 지키는 아이야. 오늘 밤 안으로, 귀신은 떠날 거야.”
그리고 그 밤, 꿈속에서, 나는 고즈넉한 산사의 돌담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한 스님이 내 앞에 나타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한쪽 다리를 절룩였고, 법복 자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스님은 조용히 내게 다가와 작은 약병을 건넸다.
“항암제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받아 그 자리에서 병을 열어 약을 마셨다. 그 순간, 혀끝을 짓누르는 쓴맛이 온몸에 퍼졌다. 몸속 깊은 곳까지 쓰디쓴 기운이 흐르며, 내 꿈은 진저리 치는 듯한 감각으로 물들었다. 그 후 눈을 가리던 귀신이 떠나 눈도 좋아졌고 나를 괴롭히던 신도 얼마 후 떠났다.
오랫동안 스님이, 내게 항암제를 건넨 이유가 궁금했다. 2010년 꿈을 꾸었을 때부터 시작된 궁금증은 2017년에야 풀렸다.
2017년,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내기 시작하던 어느 날, 잊고 지냈던 또 다른 꿈 하나가 불쑥 떠올랐다. 그건 더 오래된 기억 속에 묻혀 있던 장면이었다. 꿈속에서 나는 선녀들을 보았는데 그들 중 한 명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평생 정신암에 시달릴 거예요.”
정신암. 그 말을 꿈에서 처음 들었을 땐, 그 단어가 현실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말이 내 깊은 곳을 꿰뚫고 들어왔다. 그 순간, 마치 이름 모를 저주에 걸린 듯한 기분이었다. 앞으로 살아가게 될 인생이 어딘가 어둡고 아픈 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선녀가 말한 ‘정신암’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 안에서 실체를 가진 고통의 덩어리로 자라났다. 병든 정신은 끊임없이 나를 공격하며 “나는 살아갈 가치가 없어”라고 속삭였다. 나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병든 마음을 안고 살아가던 내게, 스님이 항암제를 건넨 것이다. 당시 나는 반야심경을 독송했고, 기도 중 관음보살이 오셨다는 이모의 말을 들었다. 그래서 나를 살리려 했던 존재가 관세음보살이라고 믿는다.
관세음보살의 자비와 전생부터 시작된 지독한 업연 속에서도 살아남고자 했던 내 의지가 맞닿았을 때, 나는 스님으로부터 항암제를 받았다. 나는 그것을 들이켰고, 반야심경을 되뇌며 죽음의 어둠 속에서 빠져나왔다.
내게 약을 건넸던 스님의 절룩이는 다리를 나는 또렷이 기억한다. 나 역시 왼쪽 다리에 큰 수술 자국이 있다. 옛날처럼 의술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였다면, 종아리뼈가 세 동강이나 난 내 다리는 영구적인 장애를 남겼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나는 스님처럼 절룩이며 살아갔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문득, 그 스님에게서 나를 본다. 스님도 나에게서 자신을 보았기 때문에 나를 연민해서 약을 건넸으리라.
스님에게 항암제를 받아서 먹은 것을 시작으로 나도 모르게 ‘정신암’을 극복하기 위한 항암치료에 들어갔다. 그 여정이 소설이나 영화처럼 신비롭고 은혜로웠던 것만은 아니다. 암 수술과 항암치료의 고통을 직접 겪었거나 지켜본 이들이라면 알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지독하고 잔인한 싸움인지.
2008년, 대림성모병원에서 어머니가 항암치료를 받을 때였다. 그녀의 고통은 그 어떤 말로도 온전히 옮길 수 없을 만큼 컸다. 삶과 죽음의 경계 어딘가, 그 아슬아슬한 끈 위에서 어머니는 말 그대로 ‘버티고’ 있었다.
같은 병실에 있던 이웃 환자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고, 그 빈자리엔 말할 수 없는 침묵만이 남았다. 어머니는 항암제의 영향으로 면역 수치가 바닥을 치면 온몸에 퍼지는 칼날 같은 통증을 견디지 못해 구토를 시작했고, 나중에는 쓸개즙까지 쏟아냈다. 그러다 결국, 참을 수 없다는 듯 의사의 손을 붙잡고 “차라리 죽여주세요”라고 울부짖었다.
나는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인간은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의 한계를 넘었을 때 차라리 죽음을 원한다는 것을, 어머니의 눈을 통해 나는 똑똑히 보았다. 그 경험은 내게 깊은 각인을 남겼다.
언젠가부터 나는 마음의 병을 앓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을 ‘정신암’이라고 부른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마음이 썩어 들어가는 병. 스스로를 갉아먹으며 “나는 살아갈 가치가 없어”라고 속삭이는 고통의 목소리. 그 소리는 어느 날부터 점점 또렷해졌고, 나는 남들이 보기에 살아 있었으나 죽어가는 감각 속에 잠겨 있었다.
꿈속 스님이 건넨 약, 관세음보살의 자비 같은 이야기는 어쩌면 아름답고 신비롭게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실제 삶에서 정신암의 치유는 너무도 현실적인, 깊고 어두운 고통의 터널이었다. 그 안에서 나는 수없이 주저앉았고, 차라리 죽는 것이 더 쉬울지도 모르겠다는 유혹에 매일같이 시달렸다.
살아 있는 모든 순간이 지옥 같았다. 어제보다 오늘이 낫기는커녕, 내 마음은 점점 더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고통을 감내하며 하루하루를 견디는 싸움이었고, 나 자신과 끝없이 마주하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글을 쓴다. 내가 겪은 이 낯선 병의 실체를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이 고통이 단순한 미신도, 망상도 아니라는 것을. 분명한 현실이며, 누군가에겐 지금 이 순간에도 삶을 포기하게 만들 수 있는 두려움이라는 것을.
하루라도 글을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이 기록이 어쩌면 나처럼 어둠 속을 헤매는 누군가에게 작은 불빛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완벽한 치유를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단 한순간이라도 괜찮다. 그저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두려움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길가에 핀 작은 꽃 한 송이를 바라볼 수 있다면. 세상이 전하는 따뜻한 온기를 단 한 순이라고 느낄 수 있다면, 그 하나만으로도, 나는 충분하다.
나는 내게 항암제를 건넸던 꿈속의 스님을 떠올렸다. 그는 내게 “항암제다”라는 말 이외에 다른 말은 전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가 모든 걸 알고 있었음을. 내가 그 약을 먹고 어떤 고통을 겪을지, 그 고통이 얼마나 깊을지, 심지어는 내가 그 고통에 무너져 삶을 놓아버릴 수도 있다는 것까지도.
그럼에도 그는 나에게 약을 건넸다. 그것은 단순한 약이 아니라 기회였다. 나다움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기회, 내가 나로서 끝까지 버틸 수 있도록 하는 마지막 끈이었다.
만약 스님이 내게 그 약을 건네지 않았다면, 나는 정신암에 완전히 잠식되어, 나를 잃어버린 채 죽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약을 받았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치유의 길을 걸었다. 그 길은 지옥 같았지만, 나는 끝내 나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나는 이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 세상을 사랑하며, 감사함 속에 살아간다. 이번 생, 나의 간절한 소원은 ‘죽는 날, 원망하는 인연은 모두 놓고 고맙고 은혜로웠던 인연만 품고 가게 해주세요.’이다. 그만큼,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준 이들이 많았다. 그들을 향한 감사는 뼛속 깊이 스며 있다.
그래서 또 글을 쓴다. 만약 단 한 사람이라도 이 글을 읽고 “살아야겠다” 다짐한다면, 나의 글쓰기는 더할 나위 없이 성공한 것이다.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죽음을 걱정하며 마치 미친 사람처럼 글을 써 내려가는 나를 발견했을 때, 나는 다시 한번 이 세상을 신뢰하게 되었다.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사람이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어쩌면 오늘 버스에서 마주친, 말없이 내 옆에 앉았다가 내릴 때 작은 미소만 남기고 사라진 아주머니일 수도 있고, 슈퍼마켓에서 내 앞에 줄 서 있다가 무심코 바코드를 찍던 그 손님일 수도 있다.
평범해 보이는, 그래서 우리 눈에 쉽게 들어오지 않는 그런 사람들. 그들이 사실은, 나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무너지지 않기를, 내가 외롭지 않기를, 내가 어둠 속에서라도 희망을 놓지 않기를.
그 기도는 목소리가 없어서 들리지 않지만, 마음으로는 분명히 전해지고 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단지 같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내가 글을 쓰며 그렇게 기도하므로 나는 다른 이들도 그러하리라고 믿는다.
그래서 세상에 말한다.
“오늘 당신 옆을 스쳐 지나간 누군가는, 당신이 살아남기를, 당신이 행복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기도를 진심으로 올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혹시 오늘, 무심코 흘겨봤던 그 사람이 사실은 당신을 위해 매일 기도하는 천사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잠시라도 생각해 주세요. 그러니 부디, 이웃을 사랑하기를, 우리 모두는 서로가 서로의 기도가 되어, 삶이라는 긴 고해를 함께 건너가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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