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4-8화. 윤회 속에서는 천년도 한순간

by 엄마쌤강민주

어느 밤, 나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낯익은 번호를 단 버스 한 대가 천천히 내 앞에 멈춰 섰다. 어린 시절, 고향 마을을 누비던 친숙한 버스였다. 그리움과 반가움에 이끌려 나는 무심코 그 버스에 올랐다.


버스 안은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몇몇 사람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있었고, 창밖으로는 기억에 없는 풍경들이 스쳐 지나갔다. 고향의 정겨운 시골 풍경 대신, 오래된 철물점, 이름 모를 언덕, 낯선 건물들이 보였다. 점점 더 이질감이 짙어졌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불안이 마음 깊은 곳에서 피어올랐다.


그 순간, 백미러 너머로 버스 기사가 나를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얼굴, 냉정한 눈빛. 그는 말없이 나를 보며, 이 버스에 내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이 버스에서 누구도 내리지 않았고 사람들은 조용히 타기만 했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 낯선 곳, 길치인 나는 혼자만 낯선 곳에서 내려야 한다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그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불안에 떨며 자리에 앉아 있었다.


버스는 마침내 종점에 도착했다. 사람들은 하나둘 일어나 조용히 밖으로 내렸다. 나도 따라 일어서려는 순간, 문이 ‘퍽’ 소리를 내며 닫혔고, 버스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 버스 기사가 처음으로 말을 걸어왔다.

“당신을 구하기 위해, 천 년 동안 이 자리에서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만약 내가 마지막 정류장에서 내렸더라면, 천 년을 같은 자리에서 나를 구하기 위해 기다렸던 그가 아니었다면, 나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죽고 싶을 때마다 그의 천 년을 떠올렸다. 그리고 어떻게든 살아남기로 결심했다. 그의 천 년을 헛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가 암과 싸우던 2008년, 어머니는 이상한 이야기들을 종종 하셨다. 남들은 보지 못하는 것들이, 어머니 눈에는 보인다고 했다. 병실을 오가며 무리를 지어 뛰노는 소아암 아이들의 영혼, 이미 돌아가신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문 앞에 서서 들어오지 못한 채 안쓰러운 눈으로 어머니를 바라보는 저승사자까지.

어머니는 꿈 이야기도 자주 하셨다. 그러나 그 눈빛은, 그것을 결코 단순한 꿈으로 여기고 있지 않았다.

“어젯밤, 산길을 걷고 있었어. 안개가 자욱했지. 그때”

어머니는 말을 멈추고 잠시 눈을 감았다.

“머리 산발한 노파가 나타났어.”

“노파?” 내가 되묻자, 어머니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모습은 노파인데, 움직임이 달라. 휙휙, 재주를 넘으며 다가오더라고. 그런 날쌘 움직임을 가진 노인이 어딨어? 사람이 아니야… 분명, 백여우야.”


그 노파 혹은 백여우는 어머니에게 다가와 이빨을 드러내며 노려보았다고 했다. 눈빛엔 깊은 원한이 서려 있었고, 목소리는 날이 서 있었다. 바람을 가르며, 칼날처럼 어머니에게 꽂힌 그 한 마디.

“너에게 복수하기 위해, 천 년을 기다렸다.”


그날 이후로, 어머니는 밤마다 그 백여우와 싸워야 했다. 그것은 단지 꿈이라 하기엔 너무나 생생했고, 너무나 현실 같았다. 어머니는 절벽 끝에서 밀려 떨어질 뻔했고, 불꽃을 뿜는 여우의 눈빛을 피해 필사적으로 달아나야 했다. 싸움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매일 아침, 어머니는 나에게 꿈속 전투에 대해 들려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의 꿈에 한 사내가 나타났다. 검은 옷을 입고, 긴 검을 든 젊은 미남자였다. “그가 나타났어,” 어머니는 말했다. “그가 백여우와 싸우기 시작했어. 날 지키려고.”


그는 자신을 어머니의 ‘친구’라고 소개했다. 어머니가 물었다.

“나는 나이가 많고, 당신은 젊은데… 어떻게 우리가 친구인가요?”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는 알고 지냈습니다. 당신이 위험에 처해서 일단 제가 먼저 당신에게 온 거예요. 다른 친구들도 곧 당신을 만나러 올 거예요.”


그날부터 그는 매일 어머니의 꿈에 등장했다. 검을 휘둘러 백여우뿐 아니라 어머니를 향해 달려드는 정체불명의 존재들까지도 막아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어머니는 그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가 점점 지쳐가. 말도 잘 못 하고, 예전 같지 않아… 그래도 싸우고 있어. 아직…”

나는 가만히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항암제의 영향으로 면역력이 제로까지 떨어지면 극심한 통증에 시달렸고 쓸개즙까지 토해내는 일이 번번했다. 그러나 꿈속의 그 사내를 이야기할 때마다 어머니는 살아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 어머니는 흥분하여 큰 소리로 말했다.

“이겼어. 결국… 그와 내가 이겼어.”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어머니가 싸운 백여우는 병마였고, 죽음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칼을 든 그 남자는 어머니 안에 깃든, 살고자 하는 생의 의지였을 거라고.


그런데 며칠 후 어머니는 또 다른 꿈에 대해 이야기했다. “꿈에 친구들이 병문안을 왔어,” 어머니는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전부 젊은 남자들이었지. 낯선 얼굴들이었어. 몇 명은 병실 안으로 들어왔고 몇몇은 병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어. 그런데 그들이 나에게 자신들이 지난 생 나의 친구였다고 하더라. 다른 친구들도 더 있는데 일단 올 수 있는 친구들이 먼저 나를 보러 온 거래”


어머니의 목소리는 그날따라 깊은 울림을 지니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 친구들이 한 이야기라며 나에게 말해주었다.

“전생에 나는 남자였대. 아주 높은 사람의 아들이었대. 그런데 친구들과 어울려 나쁜 짓을 해서 지금 여기서 벌을 받는 중이라는 거야. 이번이 일곱 번째 태어난 거래. 이번 생을 마지막으로 내 벌이 끝난대.”

나는 잠시 숨을 고르며 어머니의 말을 곱씹었다. 어머니는 곧이어 또 하나의 이야기를 보탰다.

“친구들이 그러더라고. 이번에 내가 죽었으면 영국에 가서 다시 태어나야 한대. 벌써 어느 집에 태어날지 다 정해져 있대. 부잣집에서 태어나긴 하지만… 다시 태어나는 것보다, 지금 생에서 살아남아서 끝까지 수명을 채우면 더 이상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고, 원래 있던 세계로 가거나 조상신이 될 수 있다고 했어.”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어머니가 암 진단을 받기 한참 전, 무속인을 찾아갔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 어머니는 무겁지만 묘하게 단정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전생에 아주 높은 사람이었대. 그런데 너무 나쁜 짓을 많이 해서 이번 생엔 공부를 못하게 눈을 가렸대. 똑똑해지면 또 죄를 지을까 봐, 아예 하늘에서 그렇게 정해놨다는 거야.”

당시엔 그저 이상한 이야기라고 넘겼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어쩌면 그 모든 것이 하나의 흐름 속에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2025년 봄. 어머니는 요즘 들어 이상한 꿈을 꾼다고 했다. 꿈속에서 친구라며 찾아오는 이들이 있다고 했다. 벌써 세 번째 같은 이들이 어머니의 꿈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들의 이름이 “SOO, YOO, T00”라고 말해주었다.


“왜 왔냐고 물으니까 내가 친구라서 얼굴 보러 왔대. 그냥 평범한 작은 술상을 앞에 두고, 같이 앉아서 술을 마셨어. 그리고 평범한 일상이야기를 나누었지.”


나는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어머니의 말을 못 믿어서가 아니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못 믿을 그 이야기가 지금까지 있었던 일련의 일들과 연속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웃음이 낫다.

“엄마, 그 사람들 다 나쁜 놈들이네, 그 사람들이랑 엄마가 친구라면… 엄마가 전생에 아주 높은 사람이었는데, 나쁜 짓 해서 지금 벌 받고 있다는 말이 맞네.”

내 말에 어머니도 같이 있던 제부도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경험이 있어 나는 종종 사람들에게 이렇게 당부하곤 한다.

“윤회하는 삶 속에서 천년이란 한순간에 불과합니다. 은혜를 갚기 위해 기다린 천년도, 복수를 품고 기다린 천년도 결국은 모두 한순간일 뿐입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곁에 있는 이를 사랑하세요. 그것이 지난 생의 업연을 녹이기 위해 하늘이 우리에게 주신 기회입니다.”


세상을 향한 내 말들은 늘 내 그릇만큼만 담겨 나온다. 나는 내게 주어진 눈으로 세상을 보고, 내 귀로 세상의 소리를 듣고, 내 마음으로 세상의 결을 느낀다. 진심을 다해 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모든 이에게 진실이 되지는 않는 이유다. 나의 한계 속에서 피어난 말일뿐이다.


나는 전생을 믿고, 다음 생을 꿈꾸며 살아간다. 그래서일까. 세상이 내게 건네는 시련에도 나는 다양한 이유를 찾아내곤 한다. 내가 찾아낸 이유가 스스로에게 납득되면, 시련을 주는 세상을 원망하기보다 오히려 세상을 이해하고 용서할 뿐 아니라 내가 먼저 나 자신을 돌아보고 참회하고, 뉘우친다. 죄 많은 나를 품어준 이 세상에,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되는 삶을 살겠노라 다짐도 한다. 아마도, 이것 역시 내가 나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나는 평범하다. 누구보다 평범하다. 그러나 그 평범함 안에도 이렇게 광대한 우주가 숨 쉬고 있음을 안다. 그래서 다른 평범한 이들 또한 저마다의 거대한 우주를 품고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사람을 대할 때 예의를 잃지 않으려 애쓰는 이유다. 물론 지난 생, 나 자신에 취해 살아온 버릇이 남아 있어 늘 온전하지는 않지만, 정신을 가다듬는 순간만큼은 모든 생명을 깊이 사랑하고 존중한다.


오늘도 나는, 천년을 한순간으로 품은 지금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간다. 인연들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내 작은 우주를 통해 세상의 무한함을 배워나간다.


이 이미지는 OpenAI의 DALL·E 모델로 제작된 것입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4-7화. 저승버스를 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