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은 말없이 나를 삼켰다. 숨쉬기조차 어려운 그 캄캄한 공간에서, 나는 아이의 비명을 들었다. 비명은 떨리는 호흡과 함께 내 안으로 파고들어 왔다. 나는 무릎을 꿇은 채 떨리는 손으로 아이를 찾아 허공을 더듬었다.
꿈속에서 마주한 장면은 잔혹했다. 불탄 바닷가. 모든 것이 폐허로 변해 버린 그곳에서 나는 아이의 작고 따뜻했던 몸을 애써 품에 안았지만, 이미 그 온기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손끝에 느껴지는 건 점점 식어 가는 영혼의 무게였고, 그 무게가 내 가슴을 갈가리 찢어 놓았다. 내 머리칼은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고, 울음은 부스러진 조각처럼 목구멍을 찌르며 올라왔다.
그 고통은 죽음보다 깊었다. 사랑하는 이를 죽음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한 자의 후회는 살아 있는 모든 순간을 칼로 내리찍는 상처였다.
나는 꿈에서 깨어나자마자 온몸으로 떨었다. 식은땀이 등에 맺히고, 눈앞이 흐려졌다. 그때 알았다. 상처받고 쓰러진 이들만이 아픈 것이 아니다. 지켜주지 못했던 자의 마음속 고통은, 때로 죽음보다 깊고 길게 스며든다는 것을.
나는 기도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슬픔을 겨우겨우 모아, 스스로를,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연약한 존재를 위해 기도했다.
“과거 무량겁 동안…”
허공에 메아리치는 내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나를 지키지 못해 내 원망과 저주의 대상이 되었던 모든 이들을 용서합니다.”
그 한 문장이 나를 통과할 때, 가슴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울렸다. 숨겨두었던 죄책감, 마주하기 두려웠던 후회, 스스로 짓눌러 온 자책의 무게가 파도처럼 몰려왔다. 기도가 내 안의 모든 어둠을 비추는 촛불이 되어, 차마 꺼버릴 수 없었던 상처를 밝혀 주었다. 어둠을 헤치고 나온 빛 한 줄기처럼, 지키지 못한 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깨달음에 젖어든 나의 기도는 처연했으나 한편으로는 묵직한 위안이 되었다. 나는 비로소 자식을 잃고 변해버린 막내 이모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내 글에는 종종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머무른다. 7명의 아이를 유산하고 그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불법 속에서 간절하게 기도했던 지난날을 이야기하는 내게 위로를 구하러 온다. 그러나 때로는 내 말과 글에 더 큰 상처를 받기도 한다.
나는 부모와 자식의 인연도 전생의 업연으로 맺어진다는 사실을 인과응보 법문을 통해 조심스레 전한다.
“이십 전은 부모 인과. 이십 넘어 사십까지 과거에 지은 자기 업보, 사십 넘어 육십까지 현세에 지은 자기 과보. 육십 넘어 죽기까지 현세 내세는 거울이라. 용서하고 참회하며 반성하고 정진하세.”
“내 몸이다. 내 입이 마음대로 하지 마소. 나의 손이 도끼 되고, 나의 발이 칼이 되어 한을 맺고 원수를 맺어 죽고 다시 만난 곳이 이 세상의 부부 자식, 인과응보가 이 아닌가.”
이 땅에 태어난다는 것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복수의 도구이기도 하다. 부모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찬란하게 빛나다가, 그 모든 기대 위에서 스러져야 하는 아이. 전생의 업이 어떤 설계를 해놓았다 해도, 과연 그런 운명을 맞이한 영혼이 통쾌한 복수를 완수했다고 만족할까? 오히려 자신에게 사랑을 베푼 이들에게 남긴 상처가 더 깊고 길게 울림을 남길 터이다.
또한 복수하느라 찬란한 인생을 누리지 못하고, 급작스러운 이별 앞에 선 아이. 그 아이가 놓고 간 이 세상의 온기와 아름다움을 떠올리면, 복수의 대가는 너무나도 비극적이다. 그 아이도, 그 부모도, 결코 온전한 행복을 누릴 수 없으니, 이대로 윤회의 고리에 또 다른 이별과 죄업만 이어질 뿐이다.
세상에 누가 내가 하는 이야기를 쉽게 믿을 수 있을까? 사랑으로 품은 자식이, 전생의 원수를 찾아 복수하기 위해 왔다는 사실을. 부모의 무한한 애정 속에서 밝고 총명하게 자라다, 사랑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아이, 그 잔혹한 운명을.
나는 세상을 향한 위로와 조언을 멈추었다. 더는 설득하기 어려운 이야기로 누군가의 상처를 어루만지려 하지 않는다. 그저 같이 아파하며 눈물을 흘릴 뿐이다. 대신 나부터 이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나는 아직 무량겁으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긴 윤회의 사슬을 단번에 끊어낼 능력이 없다. 다만 이생에서 만난 부모님과의 인연 앞에 머리 숙여 참회하며 전생에 모르고 지은 죄,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고 지은 죄를 진심으로 뉘우친다. 동시에 부모님이 내게 과거 무량겁으로부터 지은 잘못들을 모두 용서하여 업을 녹이려 노력할 뿐이다.
그리고 간절한 원을 하나 세웠다.
“이 세상 뜰 때, 제발 원망하는 마음, 그 하나만 없이 가게 해주세요. 고맙고 은혜 갚을 인연들만 기억하게 해 주세요.”
가끔 어떤 부모님들은 나에게 조심스럽게 속내를 털어놓는다.
“자식이 원수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아이들은 대개 다섯 살 전후부터 부모의 말에 반항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어찌 보면 아주 자연스러운 발달의 한 부분이다. 심지어 부처님의 아들, 라훌라조차도 어릴 적에는 제법 말썽꾸러기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래도 문득, ‘혹시 이 아이가 전생의 원수는 아닐까?’ 싶은 마음이 스치듯 찾아올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는 가만히 자는 아이의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속으로 이렇게 기도한다.
“제가 과거 무량겁으로부터 무럭이에게 알게 모르게 지은 죄를 참회합니다. 이 아이와의 업을 녹이고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있는 모습 그대로, 서로가 서로에게 복이 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어떤 날은, 조용히 아이의 눈을 바라보며 한마디를 건넨다.
“엄마가 부족해서 많이 미안해.”
그 말 한마디가 아이 안에 자신도 모르게 맺혀 있던 부모에 대한 분노와 원망을 스르르 풀어주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2025년, 봄의 끝자락. 밤 열 시가 훌쩍 넘은 시간, 고등학교 1학년 무럭이가 지친 어깨를 이끌고 현관을 들어섰다. 등에서 벗겨낸 책가방은 마치 한 짐의 무게처럼 툭 떨어졌고, 아이는 그제야 엄마를 찾았다.
“어서 와, 수고했어.”
나는 말없이 그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아들, 엄마에게는 막내 이모가 있어. 너도 아주 어릴 적 인천에서 본 적 있을 거야. 그 이모에게 외동아들이 있었는데…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단다. 오늘 그 이야기를 글로 쓰는데, 마음이 너무 아프더라. 그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 ‘무럭이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겐 큰 효도구나.’”
하지만 무럭이는 피곤에 찌든 얼굴로 내 말을 무심히 흘려버린다. 내 품에서 살짝 몸을 떼며, 이렇게 말한다
“엄마, 내가 살아 있으니까 나한테 고마워해. 그보다… 중간고사 범위가 너무 많아. 이번에 1등급 못 받을지도 몰라.”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툭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나는 아이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숨을 삼키고,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올라갔다.
“뭐라고?”
무럭이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감정이라는 게 참 이상하지. 방금 전까지는 네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마웠는데, 성적이 안 나올 것 같다는 말 한마디에 마음이 확 식어버리는 걸 보니.”
잠시 멈추었다가,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무럭 아, 너는 엄마 아들로 태어나서,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효도한 거야. 그러니까 공부는 네가 원하는 삶을 위해 해. 엄마는 그걸로도 충분해.”
나는 아이에게 늘 이야기한다.
“엄마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야. 그저 널 사랑하고, 걱정하고, 네가 잘되길 바라는 사람일 뿐이야. 그래서 너에게 잔소리도 하고, 이런저런 말을 하게 되는데… 그걸 다 따르지 않아도 돼. 죄책감 느끼지 말고, 네가 원하는 인생을 살아. 엄마 말을 다 따르면, 너도 결국 엄마처럼 밖에 못 살잖아. 넌 너의 생각대로 살아야 해.”
일곱 번의 유산 끝에 어렵게 품에 안은 아들이기에, 걱정이 앞설 때마다 나는 여전히 조용히 두 손을 모은다.
“이 아이와의 인연을 감사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내 안의 두려움과 욕심을 모두 부처님께 바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참회하여 업을 녹이고 복이 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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