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앞두고, 오랜 시간 고민을 거듭했다. 남편이 강남으로 출퇴근을 해야 했는데 서울의 살인적인 주거비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서울보다 조금 더 숨 쉴 여유가 있고, 조금 덜 빡빡한 곳. 결국, 나는 인천에 둥지를 틀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곳엔 두 명의 이모가 살고 있었다. 2002년, 내가 스물일곱이던 해. 막내 이모는 스무 채에 가까운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매년 이사철이 돌아올 때마다 오른 전세보증금이 수천만 원씩 이모의 통장으로 들어왔다. 그 돈은 마치 어디선가 마법처럼 생겨난 듯했다. 그 덕분에 이모는 언제나 나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었다.
막내 이모는 가진 것을 망설임 없이 내어주는 사람이었다. 가장 아끼는 것을, 계산 없이. 반지, 팔찌, 목걸이, 옷, 가방… 그녀는 늘 그런 것들을 조용히, 아무렇지 않게 건넸다.
예전에 어머니가 이모네 집에 다녀오는 날이면 명품 옷과 금붙이를 휘감고 오곤 했다. 그럴 때마다 주변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어느 동생이 언니한테 저렇게 퍼줘?”
하지만 결혼하고 가까이서 막내 이모를 지켜본 나는 알았다. 이모는 정말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나누는 사람.
또 다른 한 사람, 구미 이모도 인천에 살고 있었다. 그녀의 삶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젊은 시절, 겪어야 했던 원인 모를 마음의 병과 이혼은 그녀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그녀는 하나님께 의지해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마음의 병을 극복해 나갔다.
그녀는 막내 이모와 함께하면서 부동산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부동산 투자가 성공하면서 물질적인 여유도 생기기 시작했고 마음도 어느새 평온을 되찾았다. 그녀는 나에게도 부동산 투자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부동산은 단순한 투자 이상의 의미가 있어. 안정된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야.”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고도 확신에 찼다.
그렇게 구미 이모는 나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부동산에 투자할 것을 권했다. 막내 이모에게 “너 혼자만 돈 벌지 말고, 다른 가족들도 돈 벌게 해 줘.”라고 말하곤 했다. 구미 이모 단순히 자신의 경제적 안정을 넘어서, 가족과 함께 성장하는 꿈을 꿨고, 그 꿈은 나에게도 전해졌다.
이런 이모들의 영향으로 결혼을 앞두고 시댁의 도움과 손수 모은 쌈짓돈, 그리고 대출까지 끌어모아 28평 아파트를 신혼집으로 장만했다. 대출이 있어서 살짝 조심스러운 마음도 있었지만 평생 꿈꿔온 첫 내 집을 마련했다는 성취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집 사는데 큰돈을 보태주신 시부모님께 감사한 마음도 커서 남편에게 잘해주고 싶었다.
그때부터였다. 나는 이모들과 함께 매일 동네 부동산을 누볐다. 막내 이모의 인맥은 어느새 내 인맥이 되었다. 이모와 오랫동안 거래해 온 부동산 사장님은 우리 부부를 불러 조언을 했다.
“처음 집 마련해서 기쁘겠지만 거기에 평생 살 생각은 하지 마. 몇 년에 한 번씩 한 단계씩 더 좋은 집으로 옮겨야 해. 그래야 부동산 제대로 투자하는 거야.”
그 말은 내 마음속 깊은 곳에 단단히 뿌리를 내렸다.
그동안 가족들이 구미 이모의 권유로 막내 이모를 통해, 부동산에 투자했다. 다들 처음 가져보는 아파트 등기권리증에 흥분했고 막내 이모처럼 부자가 될 거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올랐다.
2004년, 나는 말 많던 제15회 공인중개사 시험에 1차로 합격했다. 이듬해, 드디어 자격증을 손에 쥐었을 때의 뿌듯함을 잊을 수 없다. 하루하루가 설렘이었다. 그리고 2005년 7월. 나는 34평 아파트를 장만했다. 늘어나는 자산, 차곡차곡 쌓여가는 자신감. 나는 매일, 내 삶이 한 층, 한 층 단단히 올라가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인생은 언제나 조용한 틈을 비집고 균열을 낸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말없이 스며들어, 가장 단단해 보이던 곳을 부순다. 2006년, 늘 당당하고 여유롭던 막내 이모가 사랑하는 외동아들을 잃었다. 이모의 이성적인 시계는 그날로 멈췄다. 그 대신, 세상이 자식 잃은 어미에게 무조건 양보하고 편을 들어야 한다는 비이성적인 시간 속에 이모는 갇혀버렸다.
그러나 현실 속 세상은 자식을 잃고 삶의 의지를 잃은 정신 나간 사람에게조차 자비롭지 않았다. 막내 이모가 병원 침대에 쓰러져 있던 그 시간들, 그녀가 관리하던 부동산들은 노를 잃은 배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에 얽힌 사람들의 불만은 날이 갈수록 들불처럼 번졌다.
이모부는 평생 회사 일만 했던 사람이었다. 막내 이모가 관리하던 부동산도, 서류도, 얽히고설킨 채무 관계도 전혀 아는 것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외동아들을 잃었고, 그 충격으로 생의 의지를 놓아버린 아내를 붙잡고 하루하루를 버터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병원으로 한 친척이 찾아왔다. 쓰러져 있는 이모를 향해 그는 소리쳤다.
“내 아파트, 내 돈 어떻게 할 거야?”
그는 이모가 권유해 아파트에 투자했다며, 손해를 이모가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모는 끝내 떨리는 손으로 배상하겠다는 각서를 썼다. 침대에 반쯤 기대어 앉아 있던 이모의 손끝은, 그날따라 유독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 오래, 누구보다 많이 이모로부터 패물을 받아왔던 사람이었다.
친척들과 통화하는 일도 고통스러웠다. 그들은 으레 이모들의 험담을 하며 전화를 시작했다. 자신들이 이모들 때문에 얼마나 큰 손해를 봤는지, 그들이 얼마나 비겁하고 무책임한 사람들인지, 쏟아내듯 말을 던졌다. 그리고 끝에는 꼭, 잊지 않은 듯 한 마디를 덧붙였다.
“가만두지 않을 거야.”
심지어 어떤 날은, 술에 취한 누군가가 이모 집 앞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이게 다 당신 때문이야! 이렇게 방치해 놓고 어떻게 하라고! 당장 나와!”
문을 열지 않는 이모를 향해, 그는 욕설을 내뱉고, 창문을 깨고 집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깨진 유리 조각이 그의 팔을 찔렀고, 그가 흘린 피는 현관 앞을 온통 피바다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이모는, 문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닫힌 문 너머로, 그는 더욱 거칠게 저주를 퍼부었다.
나는 그 모든 상황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화가 났다. 아팠다. 숨이 막혔다. 하지만 무엇보다 견딜 수 없었던 건. 막내 이모에게 가장 깊은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다름 아닌 가족이라는 사실이었다.
그 무렵, 나 역시 막내 이모에게 받을 돈이 있었다. 얼추 계산하면 1,800만 원쯤. 처음엔 그저 조금씩 빌려준 것이었다. 부자인 이모가 무너질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누구보다 야무지고, 여유로웠던 이모였으니까.
돈이 필요하다는 이모의 말에 선뜻 내어주는 일이 반복되었고 어느새 목돈이 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모가 나 말고도 큰외삼촌에게까지 돈을 빌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순간, 가슴 한편이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아픈 사랑이가 커갈수록, 이모는 돈이 더 많이 필요해 보였다. 사랑이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병원을 오가야 했고, 이모는 아픈 아이를 돌보는 스트레스를 쇼핑으로 풀었다. 그렇게 사들인 물건들은 아낌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졌다.
이모는, 이상했다. 나는 더 이상 이모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았다. 대신, 이모가 건네주는 반지, 목걸이, 팔찌 같은 것들을 하나하나 기록하기 시작했다. 내 가계부에는 조심스러운 글씨로 이렇게 적혔다.
‘2005년 4월 17일, 14K 금반지 1개, 이모에게 받음.’
‘2005년 6월 5일, 진주목걸이 1개, 이모에게 받음.’
예전의 선물까지 기억을 되짚어가며, 숫자와 날짜를 맞춰 적었다. 어쩌면 이미 그때부터 나는 이모의 몰락을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랑이가 세상을 떠난 후, 이모는 세입자들과 친척들에게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며, 나는 남편과 조용히 대화를 나눴다.
“내가 그동안 이모한테 받은 금붙이들 있잖아. 그걸 다 합치면 거의 1,800만 원쯤 될 거야. 그걸로 이모 빚을 퉁치면 어떨까?”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남편의 눈에는 깊은 연민이 담겨 있었다. 어릴 적부터 몇 년간 봐왔던 사랑이의 죽음은, 남편에게도 큰 슬픔이었다. 그리고 남편은, 이모가 금반지나 목걸이를 풀어 내 손에 쥐어주던 장면을 여러 번 보아왔다.
나는 조심스럽게 이모에게 말했다.
“이모, 내 돈은 안 갚아도 돼. 그동안 받은 거면 충분해.”
그 순간,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느꼈다.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자식을 잃은 어미에게서 무언가를 받아내는 일은, 내 양심이 끝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그보다도 나는, 이모가 조금이라도 덜 아프기를, 다시 삶을 향해 손을 뻗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계산기를 두드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만이라도 이모에게 끝까지 선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 일 때문인지 막내 이모와 구미 이모는 가족들에게 상처받을수록 나에게 의지하려 했다. 덩치 큰 두 여자가 내 거실 한가운데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손을 휘젓고, 발을 굴렀다. 그들이 내뱉은 말들은 모두 같은 결을 가지고 있었다. 가족들의 악행, 세입자들의 협박, 피로 얼룩진 현관문, 배신, 분노, 절망. 아파트가 무너질 것 같았다. 벽이 울리고, 천장이 흔들리는 듯했다.
그 모든 걸, 남편이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어느새 남편이 내게 건네는 말수가 적어졌고, 눈빛은 차가워졌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 눈빛에 눌려 숨이 막혔다. 어느 날, 나는 조심스럽게 이모들에게 말했다.
“제발, 남편도 보고 있고… 이웃들도 다 들려요. 우리 집에서 이렇게 가족 욕하는 거, 그만해 주세요.”
하지만 두 사람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 사람들, 네 가족 아니야. 우리만 네 가족이야.”
그 말은 억지였지만 흥분한 이모들에게 내 말은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우리 집을 피난처 삼아 찾아왔고, 여전히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나에게 큰 피해를 주고 있다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남편이 나와 이모들을 보는 눈빛은 점점 식어갔다. 말없이 나를 지나치던 시선에선 무시와 실망이 엿보였다. 나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간곡히 부탁드렸다.
“엄마, 제발 이모들 좀 말려줘. 나, 이젠 진짜 힘들어…”
하지만 어머니는 나의 말을 듣지 않았다. 아니, 듣지 못했다는 게 더 정확했다. 당신의 동생들에게 닥친 고통 앞에서, 잘 산다고 소문난 딸의 하소연은 너무 작고 미미하게 들렸던 것이다.
“그 애들이 얼마나 불쌍하니… 네가 좀 참아. 가족이잖니.”
어머니의 그 말 앞에서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이 그리도 무거울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