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5-8화. 죄책감은 정신암을 유발하고

참회는 정신암을 치유한다

by 엄마쌤강민주

삶이 고통스럽다고 토로할 때마다, 모두가 정해진 대본처럼 같은 해답을 내놓았다.

“아들을 낳으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거예요.”


2009년, 결혼 8년 만에 마침내 아들 무럭이를 낳았다. 그 작은 생명을 내 품에 안았을 때, 마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찾은 것처럼 가슴이 찡해졌다. 아기의 부드러운 피부와 작은 손끝은 나의 전신에 따뜻한 감정을 퍼뜨렸다. 눈물이 흐르며, 마음속으로 이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강한 의지가 솟구쳤다.


무럭이가 세상에 온 지 일 년이 채 되지 않았을 무렵, 나는 꿈속에서 비밀스러운 예언을 들었다. 꿈속에 나타난 선녀는 진주처럼 맑고 온화하면서도 동시에 얼음장 같은 여운을 남기는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건넸다.

“당신은 평생 ‘정신암(精神癌)’에 시달릴 거예요.”


며칠 뒤, 또 다른 꿈. 하늘에서 내려온 신(神)은, 흑요석 같은 눈동자로 나를 응시했다. 나의 영혼으로 퍼지는 신의 목소리는 바람처럼 부드럽고도 강렬하게, 마음속 깊은 곳까지 울려 퍼졌다.

“너에게 진정으로 훌륭한 아들을 줄 것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너의 목숨을 내놓거나, 나를 받들어야 한다.”


그 후 알 수 없는 병이 내 심연에 뿌리를 내렸다. 정신암인지, 신의 징벌인지 분간할 수 없는 고통이 매일 밤 나를 휘감았다. 꿈결마다 악몽이 춤추었고, 나는 차가운 침대 위에서 소스라치며 놀라서 깨어났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낮에는 또 다른 악몽이 펼쳐졌다. 사람들은 나에게 속삭였다.

“부잣집 사모님이라면서요? 한 달에 오천만 원을 번다면서요? 가족인데, 친구인데, 이웃인데… 그 정도는 당연히 해 줄 수 있지 않나요?”


그들이 어디서 무슨 소문을 들은 건지 몰랐지만, 나는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부잣집 사모님도 아니었고 한 달에 오천만 원을 벌지도 못했다. 오히려 내게 한 달에 삼천 이백만 원을 벌어오라고 닦달하는 남편 때문에 이혼을 꿈꾸는 상황이었다.


갈수록 가슴 한구석은 바람이 드나드는 빈집처럼 텅 비어 갔고, 정신은 짙은 안갯속을 헤매는 듯 몽롱했다. 손끝과 발끝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떨리기 일쑤였다. 허리는 차디찬 철처럼 굳어갔다. 욕실에 서서 머리를 감으려 허리를 굽힐 때마다, 아픔이 마치 살을 에는 칼날처럼 온몸을 덮쳤다.


공포와 혼란 속에서 나는 점점 현실에서 멀어져 갔다. 이따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순간들이 찾아왔다. 신이 나를 꺾고, 자신의 뜻대로 조종하려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깊은 수렁에 빠진 듯, 헤어날 수 없는 두려움에 빠져들었다.


병든 정신은 내게 속삭였다. “나는 가족들과 친구들에게조차 인정받지 못해. 무가치한 삶이야. 이 세상에 머물 이유가 없어.” 그 속삭임은 서늘한 바람처럼 나를 휘감았고, 나는 점점 죽음만을 유일한 해답처럼 느끼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둠이 내 마음 구석구석을 잠식해 들어왔다. 이렇게 정신을 무자비하게 갉아먹는 암세포로 인해 나는 조금씩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어린 무럭이가 있었다. 따스한 체온과 투명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이를 남겨둔 채, 나는 결코 이 세상을 떠날 수 없었다. 죽음이 손짓하는 순간에도, 나는 무럭이 때문에 죽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절박한 심정으로 나는 두 손을 모아 부처님께 기도했다. 간절히, 간절히 빌었다.

“제발, 부디… 무럭이가 열 살이 될 때까지만, 제 손으로 키우게 해 주십시오.”

기도를 올리며 숨이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나무아미타불’을 끊임없이 읊조렸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에도 구원의 한 줄기가 찾아왔다. 시아버님이 상갓집에 다녀오시면서 ‘고승의 법문곡’과 ‘생활 속 반야심경’, 그리고 ‘무상 법문집’을 얻어온 것이다. 세상 어디에서도 내 병에 대한 원인과 치료방법을 찾을 수 없었던 나에게, 그 가르침들은 따스한 등불처럼 다가왔다. 그 가르침들을 통해 나는 조금씩 알 수 있었다. 지금 내게 일어나고 있는 이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혼란에도 분명한 이유가 있음을.

고승 법문곡을 보고 나는 깊이 다짐했다. 이 생명을, 이 삶을 포기하지 않겠노라고. 육식을 끊고, 십선을 지키며 살아가겠노라고 결의를 다졌다. 그리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반야심경을 한 자 한 자 새기듯 독송했다. 그리고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2008년 친정어머니가 암에 걸렸다. 그때 용인까지 가서 용하다는 무속인을 봤는데 외할머니가 그의 몸을 차지하고 나타난 적이 있었다. 나는 그제야 외할머니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알게 된 나는 외할머니의 죽음에 대해 커다란 죄책감을 느꼈다. 내가 정신암에 걸렸을 때 처음에는 외할머니의 억울한 죽음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외할머니를 천도해 주면 정신암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일반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볼 수 있는 미정 스님으로부터 내 몸을 휘감고 있다는 무시무시한 업구렁이와 친정 조상들만 천도재를 지내주는 것에 대해 화를 낸다는 시댁 조상들에 대해 들었다.

그 후 나는 시댁 조상들을 위한 천도재도 지냈다. 그 천도재에 시할머니가 나타나 자신의 손자만 챙기는 것을 보았을 때 ‘왜 내 돈 들여 적을 불러들인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회의 파도가 밀려왔지만, 이미 의식은 끝났고 적은 힘을 얻었다.


의례가 끝난 뒤, 절 한구석에서 우연히 《오대산 노스님의 인과이야기》라는 책을 보게 되었다. 책장을 넘길수록, 원망을 품고, 세상을 떠난 자의 복수가 결국은 자기 자신을 가장 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복수와 원망의 무서운 윤회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것을 멈추고 싶었다.


그날 밤, 나는 다시 법당에 앉아 두 손을 모았다. 촛불이 머리카락을 간질이고, 향내가 숨결처럼 다가왔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기도했다.

“이생을 마무리할 때 제발 원망하는 마음, 그 하나만 없이 가게 해주세요. 고맙고 은혜 갚을 인연만 기억하게 해 주세요.”


그 후 이 기도는 “부처님의 바른 뜻 알아 생활이 불법이 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기 전, 나의 가장 간절한 바람이 되었다.


밤의 어둠 속에서 악몽이 반복될수록, 나의 기도는 더 간절해지고 수행은 더욱 깊어졌다. 그러자 꿈결 속에 미래의 파편들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내가 꿈에서 본 사건을 이틀 혹은 사흘 뒤, 교회에 다니는 구미 이모가 기도 중 보았다. 구미 이모의 기도 내용은 무속인의 말과도 정확히 일치했다. 얼마 후 꿈에서 본 일들이 현실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꿈속에서 보고 들었던 예언들은 대개 불길해서 나는 꿈을 꿀 때마다 가슴속에 싸늘한 두려움과 불안이 스며들었다.


죽음을 속삭이는 정신암과 치열하게 싸우면서도 나는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가족들에게 침묵했다. 과거, 신병인지 미친 건지, 이유 모를 마음의 병으로 아팠던 구미 이모는 가족들의 손길에 이끌려 정신병원에 갇혔었다.

2006년, 구미 이모가 마지막으로 정신병원에 갇혔던 일은 막내 이모 때문이었고, 나도 그 일에 책임이 있었다. 때문에 내게 드리워진 이 죽음의 그림자를 그 누구에게도 드러낼 수 없었다.

막내 이모는 왜 한동안 살갑게 잘 지냈던 구미 이모를 정신병원으로 보냈을까? 나는 오랫동안 이에 대해 고민했다.


첫 번째 그림자

구미 이모는 막내 이모의 외아들 사랑이의 죽음을 예언했다. 그 예언은 바람처럼 스며들어, 결국 현실이 되었다. 사랑이의 작은 영혼이 세상을 떠난 뒤, 막내 이모의 가슴에는 “그 말이 씨가 되었다…”라는 원망의 불길이 타올랐다.

두 번째 균열

사랑이가 떠난 후. 막내 이모는 슬픔에 짓눌려 스무 채가 넘는 부동산 관리를 놓아버렸다. 세입자들의 소송장이 빗발쳤다. 이모가 관리하던 집 중에는 친척들의 집까지 포함되어 있어서 그녀를 더욱 옥죄었다.

구미 이모가 막내 이모 덕분에 부동산 투자로 이익을 보자 다른 가족들에게도 투자를 권했다. 구미 이모는 가족들도 잘살게 해 주라고 끈질기게 막내 이모를 설득했다. 때문에 복을 짓겠다는 의도로 가족들의 부동산 투자를 도왔다가 가족들로부터 욕설과 폭력을 당한 막내 이모는 가족들과 구미 이모에게 원망하는 마음이 생겼다.


세 번째 파국

구미 이모는 둘째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혼했다. 그 후 아이들을 본 건 단 한 번뿐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아이들이 보고 싶다’는 말이 나올 때마다, 언니의 아픔에 누구보다 공감하고 언니를 연민했던 막내 이모였다. 그러나 정신병원 관계자를 부른 그날의 막내 이모는 평소와 달랐다.

구미 이모의 아이들은 아직 어딘가에 살아있었다. 숨을 쉬고 있었고, 자라고 있었고, 어쩌면 마음만 먹으면 볼 수도 있는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막내 이모의 사랑이는, 더는 이 세상에 없었다. 그 아이는 죽었다. 땅속에 묻혔다. 다시는, 어떤 방식으로도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언니가 “애들이 보고 싶어…” 하며 흐느낄 때, 막내 이모는 숨이 막혔을 것이다. 그 말 한마디가, 그 눈물이, 자신이 애써 눌러왔던 분노를 끌어올렸다. 언니의 슬픔은, 도리어 막내 이모에게는 일종의 사치처럼 느껴졌다. 볼 수 있는 아이, 살아있는 아이를 그리워하며 흘리는 눈물은, 그녀의 절망 앞에서 너무도 가벼웠다. 그 순간, 그녀의 마음속에서 뭔가가 툭 하고 끊어졌을 것이다.


구미 이모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기 위해서는 가족 두 명의 동의가 필요했다. 막내 이모는 동의서에 나보고 사인하게 했다. “사인하지 않을 거면 네가 언니를 돌봐라.”


차가운 동의서 용지 위에 내 이름이 새겨졌다. 볼펜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는 마치 내 영혼 깊숙이 단죄의 망치가 울려 퍼지는 듯했다.


사인이 끝나자, 깨달았다. 나는 보호해야 할 이의 손을 놓았다. 순수했던 마음은 되돌릴 수 없이 흐려졌다. 그날 이후, 순결하던 양심의 빛나는 결의는 차갑고 무거운 철창이 되어, 영혼을 옥죄었다. 동의서 한 장이 만들어 낸 이 죄책감은 마치 끝없이 펼쳐진 사막의 모래알처럼 나를 파고들었다.


그날 이후, 나는 막내 이모에게서 등을 돌렸다. 한때는 내 순수를 어지럽힌 존재라 여겨 분노했지만, 자식을 잃고 가족에게마저 외면당한 그녀를 그대로 내버려 둔 순간, 내 안에 또 다른 죄가 피어올랐다.


죄책감은 잔잔한 물결이 아니었다. 검은 파도가 밀려들 듯 내 마음을 뿌리째 흔들었다. 잘못이 크다고 느낄수록 나는 스스로를 채찍질했고, 마침내 ‘정신암(心病)’이라는 어둠에 잠식되어 이 땅에 머무를 이유조차 잃고 말았다.


어느 고요한 새벽, 나는 깨달았다. 죄란 타인에게 던지는 돌멩이가 아니라, 자신에게 꽂히는 가장 날카로운 칼날임을. 참회문의 부드러운 언어가 내 가슴에 스며들며, 열 가지 가르침 ‘십선(十善)’을 새기게 했다. 그리하여 나는 과거의 상처 위에 다시는 발을 디디지 않기 위해 십선을 지키며 살기로 했다.


이제 불행이 닥쳐도 허망하게 자신을 책망하지 않는다. 10년이 넘도록 지켜 온 십선의 인과가, 내 비극이 결코 내 악의나 무능 탓이 아님을 증명해 주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차분히 눈을 감고 사건의 파편을 모아, 새로운 길 위에 놓는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분노와 원망을 놓아주는 일이었다. 막내 이모를 비롯해 나를 죄인으로 만든 모든 이들을 향한 분노와 원망을 흘려보내고 그들에게 내가 먼저 참회했고, 마침내 내 안에 작은 평화가 피어났다.

십선과 용서, 그리고 성찰은 나를 옭아매던 정신암의 사슬을 풀어 주는 연금술이었고, 진정한 참회는 자유의 문을 여는 열쇠였다. 이제 나는 그 문턱에 서서, 한 걸음 내딛는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