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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가족이 불화하면 그곳이 바로 지옥.

by 엄마쌤강민주

남편은 대한민국이 전형적인 장남이다. 태어날 때부터 자연스레 붙은 그 호칭처럼 그는 늘 자기 집안의 중심이었다. 집안의 기둥, 집안의 대소사를 책임지는 장남. 다들 장남은 그런 거라고 했다. 맏며느리는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시어머니는 종종 밤늦게 전화를 걸어왔다. “네 시아버지 말이야…” 시작은 대개 그랬다. 그녀는 술 마시고 늦도록 들어오지 않는 시아버지 이야기를 한참 하셨다. 나는 조심스럽게 내 얘기를 덧붙였다. “저희 남편도 요즘 자주 술 마시고 늦어요.”


그러자 돌아온 시어머니의 말.

“에이, 그건 사회생활이지. 남자들, 다 그렇지.”


그 한마디에 내 말은 허공으로 사라졌다. 같은 일이지만, 다른 잣대. 시어머니에게 시아버지가 술 마시는 것을 가족을 ‘걱정’시키는 나쁜 짓이고, 내 남편이 술 마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시댁에 내 마음에 있는 이야기들을 말하지 못하고 삼키는 날들이 이어지던 어느 날, 막내 이모의 외아들, 사랑이가 죽었다. 2006년, 봄의 끝자락이었다. 사랑이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지만, 그 순간 나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2002년, 내가 결혼으로 인천에 둥지를 틀고부터 그 아이는 내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었다. 2005년, 사랑이가 병원에 장기 입원하기 전까지 나는 사랑이를 거의 매일 보았다. 문득문득 그 아이의 웃음이 떠올랐다. 그런데 그 아이가, 이제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믿고 싶지도 않았다.

장례식 동안 막내 이모는 의연했다. 한 번도 울지 않았고, 묵묵히 모든 절차를 감당했다. 오히려 우리가 걱정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장례가 모두 끝난 몇 달 후, 이모는 무너졌다.


예전의 그녀는 넉넉한 형편만큼이나 마음도 후했다. 가족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주며 사람 좋은 웃음을 잃지 않던 이모는, 어느 날부터 현실을 살지 않았다. 눈빛은 자주 흐려졌고, 말은 가끔 엉뚱한 곳으로 흘렀다. 긴 머리를 풀어헤친 채 오래된 소파에 깊이 파묻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모습은, 내가 알던 이모가 아니었다.


특히 이모는 이런 말을 자주 반복했다.

“지들은 자식 살아 있으면서, 자식 잃은 어미한테 뭘 그렇게 바라는 게 많아? 그런 놈들은 나라가 다 잡아갈 거야. 나는 자식 잃은 어미니까, 아무것도 안 해도 나라가 나를 보호해 줄 거야.”


이모가 부동산 관리를 손에서 놓자 세입자들은 대화할 집주인을 만날 수 없었다. 이는 소송으로 이어졌다. 이모의 많았던 재산은 눈 녹듯 사라졌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재산의 붕괴는 이에 얽힌 가족 간의 불화를 수면 위로 떠오르게 했다.


병원을 찾아온 누군가는 막내 이모에게 각서를 요구하며 “배상해 주세요.”라고 말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아무리 초인종을 눌러도 반응하지 않는 이모를 만나기 위해 한밤중 유리창을 깨고 집 안으로 들어가려다, 그 유리에 찔려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어떤 이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욕설 섞인 전화를 걸어왔다.

“다 죽여버릴 거야, 이 나쁜 년아.”


나는 이모 옆에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다. 돈 앞에서는 혈연도 무력했다. 자식을 잃은 사람에게조차, 그들은 가혹했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평소 막내 이모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받았는지조차 잊은 듯 보였다는 것이다. 나는 깊은 배신감을 느꼈고, 그래서 막내 이모에게 받을 돈을 받지 않기로 했다. 1,800만 원. 작은 돈은 아니었지만, 자식을 잃은 이모에게 내 돈을 갚으라고 요구할 마음이 도저히 들지 않았다.

그런 내 결정을 두고 이모들은 나를 ‘우리 편’이라 여기게 된 것 같았다. 막내 이모와 구미 이모는 이제 나만을 가족이라 불렀고, 다른 이들은 ‘가족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그 후 두 이모는 내 거실에서 마음속에 눌러둔 상처들을 목소리 높여 풀어놓기 시작했다.

“걔는 원래 사람도 아니었어.”

“그동안 나한테 받아먹은 게 얼만데 이럴 수가 있어?”


나는 조심스레 손을 내저었다.

“그만해요. 남편도 듣고, 이웃도 들을 수 있어요.”

하지만 그 말은 늘 허공을 맴돌 뿐이었다. 분노와 상실, 억울함과 절망이 뒤섞인 이모들의 목소리는 우리 집구석구석을 울렸다.


남편은 처음엔 침묵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사랑이의 죽음, 그리고 막내 이모가 그로 인해 무너져 내린 모습을 보며 그는 연민을 느꼈다. 소송에 걸린 아파트 문제로 고생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먼저 나서서 도우려 했다.

“당신 가족 일이잖아. 우리가 도와줄 수 있으면 도와야지.”


내가 이모에게 돈을 받지 않겠다고 했을 때도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모들의 방문이 반복되고, 그때마다 가족들의 악행을 고발하는 고성이 우리 집에 울려 퍼졌다. 그들로 인해 집 안에 흘러들어온 어두운 기운은 조용히 우리 부부 사이까지 흔들었다.

“당신 가족들은 왜 그래? 도대체 사람이야? 어떻게 가족끼리 그래?”

그가 나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따뜻하지 않았다.


어느 날, 막내 이모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평소보다 다소 단호한 목소리였다. 남편이 쓰고 있는 노트북을 자기에게 넘겨달라는 것이었다. 이유를 묻자, 이모부가 그 노트북이 필요하단다.

“그건 남편이 회사 일로 쓰는 거라, 힘들 것 같아요.”


내가 거절의 말을 하자마자, 이모의 목소리가 한층 더 단단해졌다.

“그것도 못 해줘?”

순간 마음 한쪽이 싸해졌다. 뭔가 서운한 감정이 번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 말 뒤에는 아무 설명도, 다짐도 없었다. 그냥 전화는 툭 끊겼다.

며칠 뒤, 남편이 어두운 얼굴로 집에 돌아왔다. 이모가 남편에게 가입했던 종신보험을 갑자기 해지했다고 했다. 보험 설계사로 일하는 남편에게 그건 단순한 해약이 아니었다. 수년의 신뢰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일이었다. 한숨 섞인 그의 말에서 실망보다 더 깊은 상처가 느껴졌다.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남편은 내게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 그 돈 다시 생각해 봐야 하는 거 아냐?”

“왜 당신만 손해 봐야 해?”

“그냥 착한 척하다가 바보 되는 거야. 당신은 늘 그러더라.”


나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손해를 감수했지만 내가 옳다고 믿은 선택은 결국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다. 그렇게 가족이라는 단어가, 내 안에서 조금씩 무너져갔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구미 이모가 정신병원에 갇혔다는 것을 남편이 알게 되었다. 이후, 남편의 태도는 나에게 잔인하다 싶을 만큼 변하기 시작했다. 일단 남편이 나에게 생활비를 주지 않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진, 남편과 시댁의 말도 안 되는 요구들.

막내 도련님이 결혼을 한다는 소식과 함께 시댁에서 연락이 왔다.

“네가 막내 아파트 하나 사주면 되겠더라.”

처음엔 웃었다. 농담인 줄 알았다. 아파트가 어디 한두 푼인가? 하지만 시어머니는 진지했다.

“네 남편이 너에게 말하면, 네가 알아서 해 줄 거라고 하던데.”

나는 여전히 웃었지만, 속은 서늘했다.


며칠 후 남편이 말했다. “막내 결혼할 때 축의금 1천만 원 해.”

나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그건 좀…”

그런데 그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형수란 사람이 축의금도 그 정도 못 하냐? 인정머리 없게.”


그 말이 칼처럼 박혔다. 여윳돈이 없었던 나는 겨우 카드로 막내 도련님의 결혼식비용을 냈고 축의금 조로 얼마를 제외한 돈을 시댁에 요구했다. 시댁에 미운털이 또 박혔다.

2007년, 반복된 유산으로 고통받던 시절. 막내 도련님이 먼저 아이를 낳았을 때도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큰 형수가 돼서 시댁에서 사랑받으려면, 앞으로 조카 기저귀 값은 네가 대.”

나는 더 이상 억지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이를 거절했고 나의 미운털은 하나 더 늘었다.

또 한 번 비슷한 일로 시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둘째가 기공소 차린다는데, 5천만 원만 보내주라.”

남편이 내게 말하면 내가 해결해 줄 거라고 했다는 말도 또 한 번 들었다. 내 안의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시댁에서 모내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땀에 젖은 티셔츠, 허리를 펴기도 힘들던 그 순간. 시어머니가 조용히 다가와 속삭였다.

“너는 왜 네 남편한테 돈을 안 주니?”

그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남편은 이미 자신이 버는 돈보다 더 많은 금액을 카드로 쓰고 있었고, 그 빚은 고스란히 내가 감당하고 있었다.

시댁에서 땅을 산다며 또 돈을 요구했다. 이번에도 남편이 시부모님께 나한테 말하면 내가 해결해 줄 거라고 했다는 걸 알았다. 나는 웃음을 잃었다. 그리고 시댁에 대한 트라우마로 시댁 이야기만 나오고 두통이 심해졌고 두통이 심할 때는 욕실에서 쓸개즙까지 토하며 쓰러졌다.


결혼 초부터 남편은 나에게 맞벌이를 원했다.

“네가 100만 원만 벌어도 집에 엄청 도움이 되지.”

그러나 얼마 후, “500만 원은 벌어야지.”라고 말했다.

부동산을 차려 한 달에 천만 원 이상 벌자 남편은 이번엔 자기 회사의 여자 설계사는 한 달에 3,200만 원을 번다며, 나에게도 그만큼 벌어오라고 했다. 그때부터 남편이 나를 인생의 동반자가 아니라 자신에게 돈을 벌어다 주어야 하는 노예처럼 여기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이 들었다.


가장 아팠던 순간은, 남편이 늦은 밤 술에 취해 돌아온 날들이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자신과 함께 술을 마신 여자 설계사들에 대해.

다른 집 여자들은 친정에서 사업자금도 끌어오고, 남편이 망해도, 바람을 펴도 따뜻한 밥을 지어준다더라. 와이셔츠도 매일같이 다려주고.”

그리고 덧붙였다.

“왜 너만 못한다고 징징거려?”

그 말은 밤의 정적을 찢는 비수였다. 그 순간, 내 안에 남아 있던 ‘가족’이라는 단어는 조용히 무너져 내렸다.


지옥은 멀리 있지 않았다. 바로 내 집, 내가 매일 머무는 이곳이었다.

지옥에서 울부짖는 나에게 사람들은 조용히 속삭였다.

“아들만 낳으면 다 괜찮아질 거야.”


그래서 나는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하나의 생명, 하나의 아들. 그 아이만 품에 안으면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정말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안다. 그 시절 나를 옭아맸던 그 지옥은, 아들을 낳지 못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건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조용히 강요되던 기대와 침묵, 외면과 부당함이 쌓여 만든 깊은 어둠이었다.

그 어둠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그리고 마침내, 알게 되었다. 나는 귀한 사람이라는 것. 누구도 나를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허락해선 안 된다는 것. 나를 지켜야 했다. 누군가의 딸이기 전에, 아내이기 전에, 며느리이기 전에 그저 나 자신으로서 나를 소중히 여겨야 했다.

나는 그렇게, 천천히 지옥에서 걸어 나왔다.


* 이 그림은 DALL·E, OpenAI의 이미지 생성 모델로 만들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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