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해는 여느 때처럼 지고 있었다. 주황빛으로 물든 하늘 아래, 나는 힘없이 아파트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육신은 분명히 여기에 있었지만, 마음은 어딘가 멀리 떠나 있었다. 집 문 앞에 다다라 비밀번호를 누르기 직전, 나는 문득 6층에 사는 한나 어머니가 떠올랐다. 나와 비슷한, 너무도 닮은 삶을 살고 있는 이웃이었다.
처음 그녀를 만난 건 무럭이가 아직 돌이 되기 전, 무럭이를 데리고 산책을 나섰을 때였다. 어린 무럭이를 보고 8살 한나가 다가왔다. 그들은 많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함께 웃으며 놀았다. 그 모습에 자연스럽게 한나의 어머니인 그녀와 내가 친해졌다. 그녀는 조용한 말투에, 어디서도 눈에 띄지 않지만 이상하리만큼 따뜻한 사람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나와 같은 ‘K장녀’였고 K장남을 남편으로 두었다.
시어머니의 눈치가 보여 가죽 소파를 사는 돈보다 더 많은 돈을 들여 옛날 구식 레간자 소파를 리폼해서 쓴다고 말하던 그녀. 남동생의 아파트가 그녀의 아파트보다 몇억이나 비싼데도 그 집에는 융자가 있어서 남동생이 가엾다고 하는 친정어머니 때문에 가족 모임에 들어가는 돈을 혼자 부담한다는 그녀.
그날, 나는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한나네 집으로 갔다. 그리고 참지 못하고 그동안 가족들에게 쌓은 울분을 토해냈다.
“가족이니까요. 가족이니까 돕는 건, 돌보는 건 당연하죠.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대가를 바란 적도 없어요.”
나는 두 손을 무릎에 꼭 쥐고 있었다. 마치 안간힘을 다해 무언가를 붙잡고 있는 사람처럼. 눈동자는 떨리고 있었고, 입술은 바르르 떨렸다.
“그런데… 진심으로 듣고 싶어요. ‘고맙다’는 그 한마디. 내가 감당해 온 수많은 일들, 아직 마무리도 안 됐는데 또 새로운 부탁이 와요. 부탁이 아니라 거의 명령처럼… 숨이 막혀요. 내 생명을 갈아 넣는 기분이에요.”
순간, 방 안은 정적에 휩싸였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외부의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단지 내 목소리만이 울리고 있었다.
“나는 정말 죽을 것 같아요. 계속 이렇게 살면, 어느 날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그들 눈에는 그게 안 보이나 봐요. 내가 얼마나 힘든지, 얼마나 무너지고 있는지… 아무도, 아무도 몰라요.”
내 말을 들은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손을 내밀어 나의 손을 감싸 쥐었다. 위로는 때로 말보다 손이 빠를 때가 있다. 그 온기에, 나는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그토록 오랫동안 참고 눌러왔던 눈물이, 그날 밤 비처럼 쏟아졌다.
2002년 8월, 태양이 내리 꽂히던 어느 날. 아스팔트가 녹아내릴 듯 뜨겁던 그 여름, 나는 인생의 새로운 문턱 앞에 서 있었다. 하얀 웨딩드레스 아래로 흘러내리는 땀방울조차, 그날의 설렘을 식히진 못했다.
‘함께라면 뭐든 해낼 수 있을 거야.’
뜨거운 햇살만큼이나, 나는 남편에 대해 타오르는 열정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결혼은 내가 상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결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남편의 말이 그저 현실적인 조언처럼 들렸다.
“일하면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고 자기 계발도 되고 생활에도 보탬이 될 거야”
그래서 시작한 일이었다. 그런데 내가 버는 돈이 백만 원, 오백만 원. 매달 숫자가 커질수록, 남편의 말투엔 처음의 격려와 고마움 대신 당연함이 스며들었다.
2006년 부동산 사무실을 열었고, 이른 새벽부터 깊은 밤까지 발로 뛴 끝에 한 달에 천만 원이 넘는 수익을 올렸다. 그러나 남편은 만족하기는커녕 다른 여자와 나를 비교하며 말했다.
“달에 3,200만 원은 벌 수 있잖아. 우리 사무실 여자 설계사도 그 정도는 번다고.”
욕심은 만족을 모른다. 그의 요구는 매번 나의 노력을 잠식했고, 어느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 사람의 욕심은, 내가 평생을 바쳐도 다 채울 수 없겠구나.’
그러는 사이, 나는 몇 번이나 새 생명을 잃었다. 이유 없는 유산이 반복되었고, 병원을 드나들던 나의 눈동자엔 어느새 생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부동산 운영 중에는 자궁 외 임신으로 나팔관이 터졌고, 생과 사를 오갔다. 죽음이 바로 코앞까지 왔었다. 그러나 세상이 내가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아이를 그것도 아들을 낳는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나는 아이를 향한 희망만큼은 놓지 않았다.
“이제는, 아이를 위해 잠시 일을 내려놓고 싶어.”
어느 날, 내가 조심스럽게 꺼낸 말에 남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아기는 밖에서 낳아 올 테니, 너는 계속 돈을 벌어.”
그 순간, 나의 시간은 멈췄다. 말로 쏟아진 무정함이 칼처럼 나의 가슴을 베었다. 그가 나를 아내로 본 것이 아니라, 돈을 벌어오는 기계로 보았다는 걸, 나는 그제야 완전히 깨달았다.
그날 이후, 나는 이혼을 하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를 시작했다. 일단 재산 정리에 들어갔고 이혼 후 혼자서도 먹고살기 위해 자격증에도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런데 갑자기 친정어머니가 암진단을 받았다.
2008년, 어머니가 유방암 3기 후반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병원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어머니는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겨울나무들을 멍하니 바라보던 어머니의 얼굴엔, 오래 묵은 삶의 슬픔이 굳은살처럼 박여 있었다. 입술은 단단히 닫혀 있었고, 눈빛은 멀고 깊었다. 말 대신 침묵이 차 안을 가득 채웠다.
이후의 시간은 지독했다. 남편이 어머니를 우리 집으로 모시고 왔고 암 수술과 항암치료를 서울에서 하기로 하면서 나의 이혼 결심은 유아무야 사라졌다. 항암치료로 어머니의 면역 수치는 바닥까지 떨어졌고, 어떤 음식도 넘기지 못한 채 구역질만 반복했다. 몸은 고통에 잠식되어 점점 말라갔다. 병원 복도 끝, 회진을 도는 의사 앞에 선 어머니는 마침내 울부짖듯 말했다.
“제발… 저 좀 죽여주세요.”
그 시간은 어머니에게 지옥이었다. 그리고 그 지옥은 곁에서 간병하고 있던 나에게도 스며들었다. 어머니는 살기 위해 싸우면서도, 동시에 이렇게 암에 걸리고 항암치료를 받아야 것에 대해 너무 억울하다는 듯, 마음속 깊이 눌러 담았던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내가 왜 암에 걸렸는지 알아? 네 아빠랑 살면서… 피눈물 흘렸거든.”
그날 이후, 어머니는 매일같이 자신이 걸어온 세월을 들추듯 꺼내 놓으셨다. 말끝마다 묻어나는 원망, 그리고 지울 수 없는 후회. 자식도, 삶도, 자신도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시간이 흘러, 어머니가 암에서 회복된 지 10년쯤 되었을 때였다. 어느 봄날, 어머니와 여동생, 그리고 나는 만인산에 함께 올랐다. 산길을 걷던 엄마에게 그 시절, 나에게 했던 말과 행동을 기억하는지 물었다. 어머니는 조용하고 무심하게 말했다.
“그때는 말이다, 모든 것이 억울하고 분해서 자식 얼굴도 보기 싫더라. 얼마나 참고, 얼마나 착하게 살았는데… 내가 암에 걸리다니. 그때 그냥 죽었으면…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너희들과 강 씨 집안 식구들, 하나도 가만 안 뒀을 거야.”
항암치료 중 어머니는 몸의 고통이 심해질수록 아빠를 점점 더 깊이 원망하게 되었고, 그 감정은 내게로도 흘러왔다. 나는 어느새 어머니의 자랑스러운 딸도 간병을 해주는 고마운 딸도 아니고 원수의 자식일 뿐이었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그리워하며, 친정 식구들을 다시 챙기기 시작하셨다. 그 시기 이모들의 삶은 이미 무너져 있었고, 그 무너짐은 나에게까지 부담으로 이어졌다.
나는 지쳤고, 점점 말이 거칠어졌다. 숨이 막히는 날들의 끝자락에서, 어머니는 담담하게 말했다.
“네가 분명 전생에 이모들한테 죄를 많이 지었을 거야. 그러니까 지금 그 죗값 치르는 거지.”
나는 그 말에 상처받았지만, 엄마는 거기서 멈추지 않으셨다. 마치 별것 아니라는 듯, 한마디를 툭 던지셨다.
“사실 너 낳기 싫어서 낙태약도 먹었어. 근데 네가 죽질 않더라. 결국 이렇게 태어나서… 내 발목을 붙잡고 살 줄은 몰랐지. 너만 아니었으면, 네 아빠랑도 살지 않았고, 암에도 안 걸렸을 텐데. 암만 안 걸렸어도, 너한테 손 안 벌리고, 내 힘으로 살았을 거야. 다 너 때문이야.”
그 말은 칼날 같았다. 어머니가 내게 기대는 고통의 무게보다, 그 한 문장이 주는 상처의 무게가 더 버거웠다. 어머니는 육체적 암을 이겨냈지만, 어머니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들로 인한 내 감정의 암덩어리는 아직도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잔해 속을 걸으며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