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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1화. 빈집이 되어 버린 영혼, 신이 깃들다.

by 엄마쌤강민주

오랜만에 초등학교 친구들을 만났다. 어릴 적, 서로의 코를 닦아주던 사이. 같은 교실에서 도시락을 까먹고, 운동장에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놀던 사이. 그런 친구들이니 내가 살면서 겪고 있는 어려움을 털어놓기만 하면 무조건 내 편일 거라 믿었다.


그런데, 식당에 앉자마자 분위기가 어딘가 이상했다.

“야, 너 진짜 월에 오천 버는 거 맞아? 대박인데!”

“그 정도면 진짜 우리랑 급이 다른 거 아냐?”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다. 웃으며 헛소문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미묘한 시선들을 피할 수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친구들과의 사이엔 결이 생겼다. 같은 시골 출신이었지만, 대학 진학도, 결혼도, 사는 모습도 다들 조금씩 달라졌다.


가깝게 지내던 친구의 남편은 어느 날, 내 남편을 ‘영어 쓰며 잘난 척하는 인간’이라며 싫다고 했다. 그때 마음이 조금 상했지만, 그냥 넘겼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을 줄 알았다.


그날 모임에서 나는 밥값과 술값을 계산했다.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그런데, 돌아오는 말이 이랬다.

“야, 오천 버는 애 치고는 쏘는 거 너무 약해.”

웃는 얼굴이지만, 그 말은 바늘처럼 마음에 콕 박혔다. 나는 다시 한번 헛소문임을 해명했다. 그러나 친구들이 내 손을 더 이상 따뜻하게 맞잡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날 이후, 나는 그들과의 대화가 어색해졌고, 마음이 점점 멀어졌다.


결정적인 일은 그 얼마 뒤에 벌어졌다. 내가 정말 좋아했던 친구가 돈을 빌려달라고 연락해 왔다. 자신에게 꼭 필요한 돈이라며, 내 도움 없이는 안 된다고 했다. 나는 평소 그 친구라면 ‘꼭 돈을 빌려줘야지’라고 생각했었다. 그 정도로 좋아하던 친구였다. 그러나 망설였다. 마음 한구석에 찝찝한 진실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친구는 얼마 전, 내 남편에게 들었던 보험을 해지한 뒤, 또 다른 친구를 통해 새 보험을 들었다. 문제는 남편이 내 친구가 자신에게 들은 보험을 해지할 거라고 생각 못 하고 친구 대신 미납 보험료를 내주었다. 친구는 대신 보험료를 내주었다는 말에 보험을 해지하려고 일부러 보험을 안 낸 거라고 했다. 왜 보험료를 대신 냈냐며 화도 냈다. 그리고 얼마 후 보험을 해지했다.

그날 밤, 남편은 차가운 얼굴로 내게 말했다.

“네 친구는 왜 그 모양이냐? 내가 네 친구 때문에 얼마나 손해를 본 줄 알아?.”

나는 결국 친구에게 그 사실을 말했다.

“돈이 없다며? 그런데 어떻게 다른 친구에게 더 큰 보험을 든 거니?.”


친구는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에 강한 불쾌감을 나타냈다. 그 순간, 오래 쌓아온 우정이 눈앞에서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돈을 빌려주지 않았고, 그날 이후,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던 친구들은 이제 더 이상 내가 기댈 수 있는 ‘우리’가 아니었다.


2009년 7월, 나는 무럭이를 낳았다. 제왕절개 수술 후 멈추지 않는 하혈로 인해 내가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품에 안은 아이는,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소중했다. 나는 아이를 ‘무럭이’라고 불렀다.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을 꾹 눌러 담아.


하지만 무럭이를 품에 안은 순간부터, ‘고생 끝, 행복 시작’ 일 거라는 기대와 달리 남편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더 노골적이고 잔인해졌다.

“24시간 어린이집에 맡기면 되잖아. 애는 거기 맡기고 일하러 나가.”

내 몸은 아직 회복되지도 않았고, 무럭이는 아직 엄마의 손길이 필요했는데 남편의 눈에는 그런 건 중요하지 않는 듯했다. 그에게 나는 배우자나 아이의 엄마가 아니라 ‘일을 해야 하는 사람’, ‘돈을 벌어와야 하는 사람’ 일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보증을 서 달라고 했다. 이미 남편으로 인한 몇 번의 경제적 상처를 겪은 나로선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거절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안 맞아 봐서 그렇구나.”

그 말은 전조였다. 더 깊고, 더 어두운 곳으로 빠져들기 시작하는 순간의.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왔다. 작은 말에서 시작된 다툼은 곧 폭풍처럼 몰아쳤고,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이혼한다고 해도 처갓집에서 허락하겠어? 장모님이 동네 사람들 눈치 보느라 절대 안 된다고 할걸. 너네 이모들도 다 이혼했잖아? 너까지 그러면 뭐가 되겠어. 그리고 너… 무럭이 없이 못 살잖아. 절대 너는 이혼 못 하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그가 내게 해온 수많은 부당한 말들과 요구들, 그 모든 것의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는 내가 절대 떠나지 못할 거라 믿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가족, 나의 과거, 나의 두려움, 그리고 무엇보다 ‘엄마로서의 나’가 절대 그와 이혼하지 못하리라는 믿음을 주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동안 남편이 감히 두려움 없이 내 감정을 짓밟고, 나를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에게서 ‘달아날 수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남편의 말은 내 안의 어떤 문을 열었다. 두려움과 망설임으로 눌러왔던 말이 드디어 입 밖으로 나왔다.

“이혼하자.”

그리고 덧붙였다.

“이혼하지 않으면… 내가 너를 죽여 버릴지도 몰라.”

그 말은 나 자신에게도 낯설었다. 하지만 그것은 복수가 아니라, 내 생존을 위한 말이었다. 살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나는 그 말을 해야만 했다.


친구들은 얼굴을 안 보기로 했다. 남편과 시댁과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혼밖에 답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친정어머니와의 갈등은 해결책이 없었다. 답을 찾을 수 없는 절망의 순간, 나는 삶과 죽음 사이 어딘가에 멈춰 선 채 스스로를 방치했다. 빈집이 되어 버린 내 영혼에는, 내가 모르는 사이 ‘신(神)’이 깃들었다.


나는 한때, 죽음이 모든 고통을 끝내 줄 유일한 해법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신’에게 시달리기 시작한 뒤 그 믿음은 산산이 부서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신의 존재는 죽는다고 끝이 아니라는 것과 눈에 보이는 이 세계가 다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했고, 나에게 어떻게든 이번 생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지를 불태우게 했다.

마치 옛이야기에 나오는, 삼성가 이병철 회장이 미꾸라지를 키우는 논에 매기를 풀어놓았다는 전설처럼, 매기는 신이요, 미꾸라지는 나였다. 매기가 미꾸라지를 잡아먹기 위해 논밭을 헤집듯, 신은 내 안의 상처와 절망을 헤집어 놓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나는 오히려 ‘살아야만 한다’는 의지를 되찾았다. 생존을 위해, 매기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나는 기도하고, 수행하며, 스스로를 돌보는 ‘미꾸라지’가 되었다.


어느새 나의 간절한 기도는 부처님 법(法)과 만났다. 매기의 위협 앞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던 미꾸라지는, 부처님 가르침 속에서 자신이 지닌 업(業)을 돌아보고, 그것을 녹이는 법을 배웠다. 나중에는 매기 역할을 하던 신도, 미꾸라지 역할을 하던 나도, 부처님 법 앞에서는 그저 서로의 업을 녹여 주는 존재일 뿐이었다.

이제 나는 안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로 이끈 ‘신’이야말로 나를 변화시키고 생으로 이끄는 힘이었음을. 그리고 부처님 법을 만난 이후, 친구들도, 남편도, 시댁도 아닌, 내 안의 평화가 진정한 해결이라는 것을.


삶은 때로 빈집 같은 영혼에 매기를 풀어놓기도 하지만, 그 매기는 결국 스스로를 지키려는 의지를 일깨우는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의지는 부처님 법과 만나 비로소 고통을 넘어 자비와 평온으로 승화된다. 이것이 내가 깨달은, 절망 너머의 작은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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