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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진실인 줄 알았으나, 진실이 아니었던 것들

by 엄마쌤강민주

“사람은 자기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만을 믿는다. 그러나 진실은 그 너머 어딘가에 숨어 있다.” — 헬렌 켈러


본격적으로 나의 무의식 세계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나는 먼저 고백하고 싶다. 나는 완전한 사람이 아니다. 보았다고 해서 제대로 본 것이 아니었고, 들었다고 해서 제대로 들은 것도 아니었다. 때로는 눈앞의 것에 속았고, 귀를 스친 말에 상처받았다. 내 눈으로 보고 내 귀로 들어서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알고 보니 착각이었다는 걸 몇 번이고 깨달아야 했다.


한때 나는 알 수 없는 소리에 시달렸다. 혼자 조용한 집에 있을 때면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고사를 지내는 듯한, 음산하고 기이한 소리였다. 처음엔 그저 불쾌했지만, 점점 그것이 두려움이 되었고, 마침내는 내가 무속의 운명을 짊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는 움츠러들었고, 스스로를 의심했고, 마음속에 불안을 품은 채 살았다.


그러던 2023년 어느 날, 방 안에 앉아 있던 나의 귀에 또다시 익숙한 그 소리가 들려왔다.

‘왜 또 이 소리가 들리지?’

두려운 마음을 억누르며 문을 열었고, 나는 마주했다. 중학교 2학년이 된 아들이 거실에서 기타를 연습하고 있었다. 한가롭게 거실 한가운데에서 기타 줄을 튕기는 아들의 모습. 순간, 나는 멈춰 섰다. 그 소리였다. 그토록 무섭게 들렸던 소리의 정체가, 기타 소리였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기타 소리가 왜곡되어 전해진 소리였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두려움은 대부분, 오해에서 비롯된다.”— 생텍쥐페리

그 이후로 나는 ‘믿음’이라는 것의 허점을 조금씩 배우기 시작했다.


불교 밴드에서 활동하던 시절, 하루도 빠짐없이 나에게 인사를 건네는 이가 있었다. 나는 그가 내 글에 공감하고 감동해서 그러는 줄로만 알았다. 진심이 통했다고 믿었다.


나는 그를 깊은 수행자, 법화행자라 여겼고, 밴드에 쓰지 못했던 나의 진솔한 이야기들까지 조심스레 들려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다. 그는 여러 불교 모임을 전전하며 사람들의 신뢰를 이용한 사기꾼이었다는 것을. 어느 절의 스님과 신도들이 그의 손에 피해를 입고서야 그 진실이 드러났다.


그리고, 더 오래된 오해가 하나 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나는 어떤 사람을 피해 다녔다. 어머니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그가 인신매매범이라는 충격적인 이야기. 그 이야기에 나는 두려워했고, 그에게 분노했다. 그 사람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았다. 그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세상이 불공평하구나’ 탄식했고, 나쁜 일이 생기면 ‘벌을 받았구나’ 스스로 위안 삼았다.


하지만 마흔을 넘긴 어느 날, 그 모든 것이 오해였음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가 이야기했던 인물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A의 이야기를 하다 B로 넘어가면서, 나는 이름과 인물을 혼동했고, 그 오해는 수십 년간 내 마음속에서 굳은 진실이 되어 있었다. 그 사람의 삶을 내 마음대로 재단하고, 오해 속에 가둬버린 것은 결국 나였다.


“진실은 늘 간단하지 않다. 복잡한 마음과 얽힌 맥락 속에 숨어 있다.” — 버지니아 울프


그때야 비로소 깨달았다. 진실이라 믿었던 많은 것들이 진실이 아니었고, 그 안에서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하지만 그 착각과 오해 속에서도 나는 자라고 있었다.


누군가는 말한다.

“보았다고 다 아는 건 아니고, 들었다고 다 이해한 것도 아니다.”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일수록 그 말이 깊이 다가온다.


우리는 자신의 경험과 기억, 감정의 틀 안에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그렇게 믿음이 왜곡되고, 진실이 흐려진다.


사람의 인식은 늘 불완전하다. 우리는 늘 한계 안에 있고, 해석은 언제나 주관적이다. 기억은 조각나고, 상황은 너무 복잡하다. 그래서 진실은, 늘 조심스럽고 겸손하게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다.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것도 제대로 보지 못한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이런 내 어리석음을 나는 오랫동안 모르고 살아왔다. 내 어리석음을 마주하고서는 글을 쓰는 것도 두려웠다. 이미 세상에는 나보다 더 많이 알고, 더 잘 말하는 이들이 넘쳐난다. 그런데 내가 굳이, 나의 어리석었던 과거의 부끄러운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한때는 그렇게도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처럼 오해하고, 나처럼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나처럼 후회할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내가 겪은 이야기가, 작은 이정표가 되어줄 수 있다면 그 착각의 길에서 조금 더 빨리 돌아설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내가 글을 쓰는 이유가 충분하다고, 이제는 생각한다.


나는 여전히 부족하다. 그러나 그 부족함으로 인해 나는 누군가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삶을 더 조용히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나를 사람답게 만들어 주었다.


“어리석음도 지나고 나면, 누군가를 이해하는 따뜻한 빛이 된다.” — 엄마쌤 강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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