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찾아간 시간 (장애인활동지원사)
글: 엄마쌤 강민주
고등학교 1학년이 된 아들이
오늘 월평동 종합사회복지관에서 자원봉사를 하게 되었다.
마침 오전에 흑석동에서 일이 있어
아들과 함께 나갔다가,
오후에 월평동까지 데려다주었다.
가는 길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들, 여긴 엄마가 아는 곳이야.
저 뒤편에 보이는 임대주택 있지?
LH에서 지은 집인데,
엄마가 예전에 저기서 장애인활동지원사로 일했었어.
엄마가 너한테 자주 얘기했던 한 선생님이 여기 살았거든.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
월평동 종합사회복지관 뒤편, 임대주택 단지.
그곳엔 한때 내가 머물렀던 시간의 그림자가 남아 있다.
가족과 단절된 채 홀로 살며 암과 싸우던 한 선생님,
항암치료의 고통을 내게만 드러냈던 그분.
나는 여전히 그분을 잊지 못한다.
그분이 장애인으로 살아냈던 하루하루를,
그분의 마지막을 지켜보며 배웠던 생의 깊이를
나는 지금도 마음에 품고 산다.
장애인활동지원사라는 일을 시작할 때
처음엔 단지 누군가를 돕는 내가 좋았다.
그 마음 하나로 문을 두드렸는데
그 안에서 뜻밖의 ‘나’를 만나게 되었다.
사람들은 내가 장애인을 후원하거나 자원봉사에 참여하면
“좋은 일 한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장애인활동지원사’라는 직업을 말하는 순간,
어딘가 애써 외면하는 눈빛,
은근한 무시와 선을 긋는 말투들이 따라왔다.
그럴 때마다 속으로 되뇌었다.
‘정작 나 자신은, 지금 이 일을 통해
더 깊이 배우고 더 많이 성장하고 있는데…’
한 번은 남편과 아들이 물은 적이 있다.
“집에서도 살림 잘 안 하면서,
왜 남의 집에 가서는 밥하고 청소하고 설거지까지 다 해?”
나는 그 말에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다.
“집에서는 내가 아무리 애써 살림을 해도
‘고맙다’는 말을 듣기 어려워.
오히려 ‘그것밖에 못 해?’라는 말에
마음이 무너질 때가 많아.
그런데 내가 활동지원사로 일할 땐,
밥 한 끼, 청소 한 번에도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해주셔.
그 말이 내 마음에 오래 남아.
그리고 그 진심은 월급이 되어 내 통장에 들어오지.”
그 일을 하며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가정 안에서 여성이 해오던 ‘살림’이란 것이
누군가와 비교되어야 할 일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가장 기본적이고 소중한 수고라는 것을.
살림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존중’이다.
그건 ‘여자라서’ 하는 일이 아니라,
가족을 돌보는 삶의 중심이자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한 방식이었다.
장애인활동지원사로 일하며 받은 월급으로
아들에게 간식을 사주던 어느 날,
나는 그 작고 단순한 순간에
일하는 기쁨과 자립의 뿌듯함을 느꼈다.
그 시간들은 내게 자존감을 돌려주었다.
세속에서 말하는 성공을 하지 않고도
내가 믿는 신념을 위해 선택한 일을 하면서
돈도 벌 수 있다는 사실이
나의 삶을 더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용기를 주었다.
그리고 올해 페이스북 친구 추천에
한 선생님의 이름이 뜨는 걸 보았을 때,
이상하리만치…
그분이 살아 계신 것만 같아 마음이 먹먹했다.
그래서 나는 그분을 위해 영가등을 달았다.
혼자 조용히 삶을 마감하셨던
그분의 외로운 마지막을 기억하며
극락왕생을 진심으로 기도했다.
지금도 나는 마음 한편에
언제든 다시 장애인활동지원사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
그만큼 그 시간은
내게 단순한 ‘일’이 아닌,
내 삶을 다시 세운 ‘길’이었다.
비록 거창한 성공은 아니지만,
누군가의 일상을 함께 살아내는 그 일은
내가 인간으로서, 엄마로서,
그리고 한 사람으로서 성장하는 데
무척이나 귀중한 발걸음이었다.
그 발걸음이 있어
오늘의 내가 조금은 더 향기로운 사람이 되었음을.
* 지난주 수업 한번 빠졌다고 학생들이 출석부에
이렇게 써 주었다. ‘나~ 사랑받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