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종종 꿈에서 용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은 대부분 내게 어떤 메시지를 전한다. 그러나 광수사에서 천도재 중 한번, 그리고 신중기도 중 한번. 그렇게 두 번, 용을 현실에서 본 적이 있다.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맑고 고요했던 그 아침, 내가 가르치던 학생의 어머니가 나와 친정어머니를 광수사에 데려갔을 때만 해도 나는 아무 기대도 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천태종 광수사는 그동안 다니던 조계종의 절과 생김새부터 달랐다. 처음 간 날이 하필 천도재의 마지막 회향일이라는 사실도 낯설었다.
광수사에 모인 대중들과 함께 기도를 올리는데, 친정어머니가 조용히 내게 말했다.
“네가 이 절에 다닌 적도 없고, 영가의 위패도 모신 적이 없는데, 여기서 기도한들 무슨 효험이 있겠니?”
어머니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를 위해 기도하기보다, 이곳에 모여 기도하는 이들의 기도가 이루어지는데 힘을 보태자 생각했다. 나는 광수사에 모여 기도하는 이들의 인연 있는 영가들이 극락왕생하길 빌었다.
그 순간이었다. 눈앞의 허공이 스르르 갈라지듯 열리며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마치 구름처럼 모여 거대한 용선(龍船)을 타고 있었다. 그들은 조용히 웃고 있었고, 눈빛엔 평온함이 가득했다.
그런데 이내 용선의 자리가 부족해졌다. 그러자 사람들은 하나둘 연꽃으로 변해 용선 위를 가득 메웠다. 미처 용선에 오르지 못한 이들은 작은 아기용을 타고 그 뒤를 따르듯 하늘로 향했다. 나는 숨을 멈췄다. 그 아름답고 숭고한 광경 앞에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내 앞에 선녀 네 명이 나타났다. 그들은 내 앞에 서서 조용히 말했다.
“우리는 당신을 지키는 중이에요.”
그 말에 내 마음 어딘가에서, 불쑥 원망이 일었다. 분명 내 몸에 신이 없다 하는데도 꿈에 계속 신이 나타나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이 보이는 것이 모두가 신계의 선녀가 내 옆에 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신에게 시달렸던 거야. 이들을 떠나보내면 이제 이 악몽도 끝나는 거겠지.’
나는 정중히, 그러나 단호히 말했다.
“저는 이제 혼자서도 잘 살아갈 수 있습니다. 걱정 마시고, 떠나 주세요.”
그녀들의 임무는 나를 지키는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정말 자신들이 가도 되냐고 물었다. 나는 단호하게 그들에게 떠날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고개를 숙여 내게 인사를 하고 하늘로 천천히 사라졌다.
내가 그들에 대해 제대로 알았다면, 아니 나에 대해 제대로 알았다면 나는 그들에게 떠나지 말고 계속 나를 지키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시 나는 그들이 내 옆에 있어 내가 신에게 계속 휘둘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즉 나는 신들이 나를 돕는다는 생각을 못하고 나를 괴롭히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마음공부가 깊어지면서 알게 되었다. 내가 선녀나 용을 본 것은 그동안은 요동치는 마음으로 인해 내 영혼의 눈이 흙탕물 가득한 세상을 보고 있었는데,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으며 그동안 존재하고 있었으나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는 것뿐이라는 것을. 그러나 이런 경험에 대해 들은 적도 없고 경험도 처음이기에 나는 남들과 다른 모든 것들이 두렵고 무서웠다.
몇 년 후, 아마 2016년 정도 일 거라 생각된다. 광수사에서 신중기도를 하던 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신중전 앞에 앉아, 과거를 곰곰이 돌아보았다. 신에게 시달리기 전, 가족들에 대한 원망과 절망으로 나는 스스로 삶을 끝내려 했었다.
삶을 포기한 내 영혼에 신이 깃들었다. 그러나 신에게 시달리며 알게 되었다. 눈에 보이는 이 세계가 전부가 아님을.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신에 시달리며 나는 오히려 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나에게 일어난 일들을 해결하기 위해 부처님 법을 배웠는데 나는 불법 속에서 성장한 스스로에게 꽤 만족스러워하고 있다는 것도.
그것을 깨달은 나는 진심을 담아 신에게 감사했다.
“신들이여, 당신들 덕분에 어리석은 중생이 부처님 법을 만났으니 당신들은 그 공덕만으로도 성불하기에 충분합니다. 극락왕생 하소서.”
그 순간, 법당 바닥에 물결이 요동치는 것이 보였다. 법당 안에 갑작스레 비가 내렸다. 천장에서 쏟아지는 것도 아니고, 밖에서 몰아치는 것도 아니었다. 공기 자체가 물기를 품은 듯, 맑고 투명한 비가 법당 안에 흩날렸다.
그리고 요동치던 물결 속에서 등에 연꽃을 피운 청룡 한 마리가 조용히, 그러나 위엄 있게 하늘로 승천해 갔다. 그 연꽃 위엔 기뻐하는 이들이 가득했다.
밖은 맑았다. 그런데 잠시 후, 법당을 나선 순간 맑던 하늘에서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비는 며칠간 그치지 않았다.
그 모든 일이 일어난 후, 나는 법당 안을 두리번거리며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다. 사람들은 그저 평온한 얼굴로 염불을 되뇌거나, 기도문을 들고 있을 뿐이었다.
‘방금 용이 하늘로 올라갔잖아. 왜 아무도 반응이 없지? 아무도 못 본 건가?’
그 순간, 깨달았다. 이 세계는 오직 나에게만 열린 세계라는 것을. 남들과는 다른 감각. 남들과는 다른 길. 나는 환희심 속에서도 두려워졌다.
비슷한 이야기를 선의 나침판 정진구 대표도 했다. 그는 수련 중 영덕 바닷가에서 용을 봤다고 했다.
“너무 커서 숨이 막힐 정도였어요. 사람 키의 40배 정도 되는 용이에요. 같이 있던 사제들한테 흥분해서 물었죠. ‘저 용이 안 보이세요?’”
하지만 아무도 그가 보는 것을 보지 못했다. 스승은 그에게 말했다.
“뱀 새끼 한 마리 본 걸로 호들갑 떨지 마라.”
결국 그는 벌로 절벽 위에서 몇 시간을 보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그에게는 악몽 같은 시간이었지만, 그는 그날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다. 용은 모든 이에게 보이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용을 보고 그 용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주의할 것이 있다. 동양에서는 용을 신비와 권위의 상징으로 여기지만, 서양에서는 악의 화신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있다.
『능엄신주 법문』에서 선화상인께서는 “용은 큰 벌레에 불과하다. 수행 도중 신통을 쓰고 계율을 완화했기 때문에 결국 축생으로 떨어진 것이다”라고 단호히 가르치셨다. 그 말씀을 처음 접했을 때는 충격이었다.
그리고 정진구 대표의 스승께서도 정진구 대표에게 “뱀 새끼 한 마리에 호들갑 떨다간 그동안 수행한 게 다 헛수고가 되고, 평생 귀신으로 살아야 할지도 몰라”라고 경고하셨다고 했다.
한 번은 광수사에서 살림을 맡아하시던 노보살에게 용이 사람들을 태우고 하늘로 오르는 광경을 보았다고 말했다. 평소 꿈에 이끌려 광수사에 오게 되었다는 내 말에 호기심을 보이며 잘해주던 노보살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분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고, 나를 바라보는 눈엔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그거, 신력이야…”
그 한마디는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나는 신력에 대해 극도의 경계심이 있는 사람이다. 서로 다른 병을 가진 이들에게 검은 환약 하나 건네, 치유하는 신통력이 있던 외할머니는 비극적인 선택으로 삶을 마감했다. 전생을 보고 미래를 보며 귀신을 보는 능력이 있는 구미 이모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다. 이모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이 사실임을 설명하느라 너무 많은 에너지를 썼고 그의 삶은 매우 고통스러웠다. 나는 그들을 통해 신통력이 행복을 보장하기보다는 행복을 앗아가는 능력이라고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서 공양주 보살의 말은 나에게 엄청난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내게 엄청난 신력이 있다면 나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되는 걸까? 무럭이 엄마로 제대로 살 수 있을까’
그때 누군가 밴드를 통해 다른 말을 전해주었다.
“큰 스님이 말씀하시길, 당신과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은 머지않아 스승을 만나고 살아서 이 세상에 있는 극락에서 도반들을 만나 불법을 공부하게 된다고 하셨어요”
얼마 후 내 글을 읽고 나의 업을 녹이기 위해 법주사에서 삼천 배를 올려주신 분이 나타났다. 그는 말했다.
“신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은, 한국 사람이 미국에 다녀온 것과 같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깨달음의 길은 신통을 기르는 수행이 아니다.”
그의 말은 불법을 수행하면 신력이 더 커질지도 모른다는 내 마음속 불안을 잠재워주었다.
이후 나는 그분의 소개로 불교 밴드에 가입했다. 그곳에서 나의 경험을 나누고, 수많은 선지식의 조언을 받으며 ‘지금 이 순간을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수행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 후 나는 눈앞의 현실, 손에 닿는 생의 온기를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신통이 아닌, 매일의 작은 순간들을 포용하며 부처님 가르침을 삶 속에서 실현하는 것, 그것이 내게 찾아온, 가장 고귀한 깨달음이다.
앞으로의 내용은 내가 이 과정에 이루기까지 경험했던 일들에 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