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상처를 대물림하고 싶지 않은 당신에게
*정리되지 않은 글이라도 일단은 올려보려고 한다.
그제 동네 도서관에서 셰팔리 차바리라는 심리학박사의 <깨어있는 부모>라는 책을 빌려왔다.
마음숲인지 어느 유튜브인지애서 추천했던 책을 알라딘 장바구니에 담아놓았다.
보통 책을 빌리러 갈 때 알라딘 장바구니를 참고한다. 지금 한 70권 정도 담겨 있다.
차바리 박사의 이 책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내가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것들,
남편과 내가 실천하고 있는 것들이 녹아 있다.
그리고 나 너무 잘하고 있다며 스스로를 칭찬한다.
잘 되지 않더라도,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과 너무 달라 '이게 맞아?' 하며 자신을 끊임없이 의심하더라도
우리는
아이들을 지지하고 신뢰하며
그들에게 너희를 믿고 지지해.
너희들이 하고 싶은 것에 마음을 기울이고 그것을 해.
엄마아빠는 그것을 한없이 지지해.
라는 신호를 계속 주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나보다 남편은 더더더 아이들을 신뢰하고 지지한다.
정말로, 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하여.
학교에 가려 하지 않는 아이들과 지내는 와중에
그 과정에서 내가 정신적으로 상처를 받기도 한다.
화살을 맞는 느낌이다.
그 화살에 피를 흘리며 야수와도 같은 깊은 울음을 울 때도 있다.
차바리 박사는 말한다.
"우리가 부모로서 가졌던 비전과 아이의 미래를 그려보면서 품었던 기대를 포기한다는 것은 어쩌면 견디기 힘든 정신적 죽음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라도 지금까지의 모든 계획과 기대를 완전히 내려놓고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어찌...
나의 상황과 같지 않다는 말인가..
내가 아이에게 가졌던 기대들.
우리 아이는 학교에 성실하게 다니며 공부를 잘 할 것이며 숙제를 잘 해갈 것이며
선생님들께 칭찬을 받을 것이며 건강할 것이며 부모와의 대화를 좋아할 것이며
건전한 취미를 가질 것이며 좋은 친구를 사귈 것이며 좋은 음식을 먹을 것이며 등등등.....
이 모든 부모로서 가질 법한 기대를 내려놓는 것.
나는 아이들을 통제하고 싶고 상황을 통제하고 싶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결석하면 불편하고 아이들이 내가 예상하는 바에서 움직이지 않으면 잔소리를 했다.
결석에 대해 담임에게 말하는 것이 불편하고
담임이 나를 책임감없고 아이들이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는 나사빠진 부모라고 생각할까봐 걱정하며
마음을 졸였다.
그리고 '네 알겠습니다'같은 중립적이거나 최소 긍정적인 답이 오면 그제서야 마음을 놓았다.
문득,
어린 시절 나에게 들리던 목소리를 떠올린다...
어떤 남자의 그 목소리는 나에게 고함을 쳤다.
최소 2n년 동안.
보통은 이랬다.
내가 누군가와 대화를 하거나 어떤 결정을 해야 할 때
그래 가지고 되겠나!
그렇게 하면 안 돼!
어떻게 생각하겠나!
이것은 누구의 목소리였을까?
어른 남자와 이야기할 때 그 목소리는 더 커졌다.
나는 지금도 어른 남자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나 정말 어른처럼 보이는 중년 남자, 양복이나 정장을 한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 무슨 트라우마가 있었던 것 같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아빠,
끝없이 아빠를 비난하던 엄마,
그 엄마를 "폐물"이라 비난하던 아빠.
자주 아팠고 아픈 척이라도 해서 남편의 동정을 받고 싶었던 엄마.
그것을 받아들여야 했던 어린 장녀였던 나.
그 엄마가 죽기라도 할까봐 공포에 휩싸여 자기 전까지 엄마의 어깨를 주무르고
물수건을 해 와 이마에 얹어주고 약을 데워서 오던 어린 나.
술을 마시고 들어와 엄마와 싸우다
그 목소리는 어느 겨울밤
언쟁이 격해져 급기야는 "죽여봐! 죽여봐! 내가 도망갈 줄 알고!"라며 악을 쓰던 엄마에게
진짜로 칼을 가져와 동생과 내가 숨어있는 작은방에
칼로 찍으며 나오라고 했던 술취한 그 아빠의 목소리였던가.
한참 뒤 잠잠해져 안방으로 들어가 아빠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며
아빠의 술주정을 받아낸 그 어린 나는 누군가에게 보호를 받았던가?
믿을 만한 어른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잘못했다며
무릎을 꿇은 나의 감정은 굴종적이고 굴욕적이었다.
잘못은 나보다 나이먹은 어른들에게 있었다.
그리고 그 어른들은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거나 배우지 못했고
그저 악을 쓰고 잔소리를 하면
내 뜻이 통하리라 막연히 믿었던 시대에 살고 있었다.
어린아이들이 받을 상처는 뒷전이었다.
보호받지 못한 어린아이에게는
그 이후로도 이십년 동안 고함치는 목소리가 따라다녔다.
또한 그 목소리의 주인에게 자랑거리를 던져주고 싶지 않아
(자녀에 대한 진심어린 칭찬 없이 남들에게 자랑하는 것을 증오했다)
성적보다 낮추어 대학을 아무데나 쓰고
자랑스럽게 느껴질 만한 잘한 것들을 내놓지 않았다.
언제 칼이 날아들어올지 모르는 어린시절의 밤에
나는 그 상황을 내가 휘어잡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감.
그것은 아직까지도 영향을 주는가.
내 부모는 가정을 지키고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어떤 사건으로 인해 아이가 받은 상처는 그냥 아물지 않는다.
지금부터라도 내 안의 상처받은 어린아이를 치유하기 위해
하나하나 꺼내보려 한다.
어렵고 힘들고 괴로울 수 있다.
하지만 꺼내놓지 않으면
어려움과 트라우마를 대물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아이들에게 가지고 싶어하는 통제권,
그것부터 내려놓고
우리 아이가 규칙에 따르기 싫어하는 것을 받아들인다.
보통 말하는 성실한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을 받아들인다.
싫어하는 공부는 절대 안하리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때로는 깊은 생각에 빠져들어 주변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을 받아들인다.
핑계를 대기도 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우리 아이가 사람들 앞에서 주목받는 것을 즐기는 것을 받아들인다.
우리 아이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것을 즐기는 것을 받아들인다.
차바리 박사는 말한다.
"나는 내 아이가 어떤 사람인지 정말 알고 있는가? 내 안에 아이에 대해 매일같이 새롭게 알아갈 공간을 만들 수 있는가?"
아이들은 각자 본연의 모습으로 존재할 권리가 있다. 자기만의 고유한 기질을 따라 삶을 살아갈 권리가 있다. 아이는 고유한 울림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라.
그리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라.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그랬어야 한다 같은 말은 이제 내 인생에 없다.
우리 부모들이 그랬듯이 부모의 여정은
질서나 체계와는 거리가 멀다.
오로지 아이를 믿고 지지하고 격려하며
높은 기대감을 갖고 너는 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아이를 대하고
현재에 충실하자고 마음 먹는다.
차바리 박사는 말한다.
"우리에게 인생 여정을 함께 할 아이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값진 선물인가. 아이를 키운다는 건 끊임없이 우리의 무의식을 드러냄으로써 에고에서 벗어나 더 진실한 존재로 변할 기회를 수없이 제공해 부모와 아이 모두에게 참으로 이로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