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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치마를 아시나요?

Love is all

by 나야

"와, 이 노래 뭐야?"


바다를 보고 오는 길이었다. 의자에 기댄 채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내 귀에 낯선 노래가 들어왔다. 산뜻한 멜로디에 살랑이는 리듬, 담백하면서도 다정한 가사에 마음이 출렁거렸다. 딸아이의 선곡이었다.


"검정치마 곡이야. 노래 좋지?"


"제목이 검정치마야?"


"아니, 가수 이름."


"생전 처음 들어본 가순데?"


"은근 인기 많은 밴드야."


그러면서 딸아이는 몇 곡을 더 들려주었다. 사춘기 감성이 돋보이는 발라드 곡들이 이어졌다. 그중에서도 나는 검정치마의 처음 그 노래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몇 번이나 반복재생 했는데도 지겨운 줄 몰랐다. 뒷자리에 앉은 딸은 콧노래를 흥얼거렸고, 운전대를 잡은 남편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며칠 뒤, 우연히 남편의 휴대폰으로 뭔가를 검색하다가 눈에 띈 단어가 있었다.


검. 은. 치. 마.


"자기야, 이거 혹시 검정치마 검색한 거야?"


"아, 검정치마였어? 어쩐지 아무리 찾아도 안 나오더라고."


그날 함께 들었던 노래를 남편 혼자서 찾아봤던 모양이다. 근데 노래가 뜰 리가 있나. 검정치마를 검은치마라고 했으니. 한 글자 차인데도 느낌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순간 안드로메다에 빠졌을 중년의 사내가 눈앞에 그려졌다. 당황해서 얼굴이 벌게졌을지도 모른다. 가수 이름을 이렇게 짓는 건 반칙이라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을 지도. 그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는 실실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 귀여운 아저씨를 어쩌면 좋을까.


나는 노래를 좋아한다. 그리고 남편은 그런 나를 좋아한다.(고 나는 믿는다.) 왜냐하면 그의 차에 오르자마자 평소 내가 즐겨 듣던 노래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때가 많기 때문이다. 집안에서 설거지하거나 빨래를 개거나 할 때 배경음악 삼아 틀었던 노래들을 유심히 봐두었던 남편이 차 안에서 들려주는 것.


그건 아주 사소한 순간이지만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장면들이었다. 그만큼 내 일상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니까. 차에 타면 우연처럼 노래가 흘러나오게 하려고 때를 기다렸을 남편을 생각하면 심장이 간질거렸다.




이렇게 섬세하고 따뜻한 남편이 조금은 예민한 반응을 보일 때가 있다. 요즘 남편이 저요오드 식단을 하고 있는데, 허용된 육류 양이 하루 150g. 생고기라도 유통과정에서 약간의 저염처리가 될 수 있어 그런 듯 했다. 천일염을 제한하기 위해서.


야무진 인상만큼이나 기능도 우수한 저울이었다.


그래서 주방 저울을 주문했다. 손바닥만 한 크기에 뭐든 올리면 제깍 무게를 보여주는 것이 무척 앙증맞고 대견했다. 당근 하나, 숟가락 한 개, 양파 반 개... 손에 잡히는 대로 무게를 재보다가 고기를 올려보았다. 고기는 그릇에 담아야 하니 그릇 무게를 미리 달아봐야겠지? 한데 옆에 있던 남편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왜? 그릇 무게가 있잖아."


"아니, 바로 해도 돼."


그러다 벌컥 화를 냈다.


"그릇 무게는 달 필요가 없다고!"


우리 집 천장에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집안 공기가 찬물을 뒤집어썼다. 말없이 식사를 마치고 나는 방안에, 그는 거실에 머물렀다. 잠시 후 남편이 사용설명서를 들고 왔다.


"여기 적혀 있어. 그릇에 담아서 올릴 때는 두 번 누르면 0에서 시작하는 거야. 자동으로. "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나는 알겠다고 했다. 설명서를 못 봤다고. 그렇다고 화를 낼 것까진 없지 않냐고 하려다 말을 삼켰다. 그가 미안해하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손바닥에 열이 나는 것 같아."


같이 TV를 보던 남편이 말했다. 손을 만져봤지만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호르몬 때문에 그럴 거야. 갱년기 아줌마들이 얼굴에 열난다고 그러잖아."


"나도 갱년긴가?"


"갑상선이 호르몬을 조절하니까, 그걸 떼내서 자기가 더 힘든 걸 수도 있어."


실제로 남편이 암수술을 한 이후 사소한 일에도 짜증스러워하거나 화를 낼 때가 종종 있다. 옆에서 나도 당황스러웠다가 같이 화가 치밀었다가 안쓰러웠다가 여러 감정들이 춤을 춘다.


그럴 때마다 펼쳐보는 나만의 사용설명서가 있다. 지난날 차곡차곡 저장해둔 기억의 페이지를 열면 차 안에서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들려주기 위해 기다렸을 그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설거지하는 내 뒤에서 배경음악을 몰래 찾아보고, 생전 처음 들어본 가수 이름을 잊어버려서 허둥거렸을 장면도.


그는 참 섬세하고 다정한 사람이다. 그래서 상처에 더 민감할 수 있다. 모든 걸 이해할 수 없어도 괜찮지 않을까. 가장 좋은 약은 우리의 사랑이니까. 그가 몰래 검색해 보았던 검정치마의 노래 제목처럼, 그 이상 뭐가 더 필요하겠는가. 사랑이 전부인 것을.


https://www.youtube.com/watch?v=lOSF2vQDPiQ&list=RDlOSF2vQDPiQ&start_radio=1



덧.

발행북을 지정하지 않아 같은 내용으로 다시 올립니다. 앞서 '좋아요' 눌러주신 분들께 양해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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