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한밤의 템플스테이 탈출소동

8월의 대장정을 시작하며

by 나야

8월 달력을 넘기면서 불에 덴 것처럼 마음이 뜨거웠다. 이달에는 남편의 '저요오드 식이요법'이 예정돼 있었다.


'저요오드 식이요법'은 갑상선암 환자가 요오드 치료 효과를 최대한으로 높이기 위해 2주 동안 요오드 수치가 거의 제로인 상태로 식사하는 것을 말한다.


당연히 식단에도 여러 제약이 따른다. 그중 핵심은 천일염 없는 식사를 2주 동안 지속하는 것. 그 말은 곧 평소 먹던 간장, 된장, 고추장이 전면 금지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식탁 위에서 간장, 된장, 고추장, 또는 천일염으로 간을 맞추지 않은 반찬을 보았는가? 난이도가 사막에서 바늘 찾기 수준이다.


사실 작년 이맘때도 2주간 '식이요법 감옥'을 경험한 적 있었다. 가뜩이나 먹는 걸 좋아하는 남편은 식탁에 앉을 때마다 동공이 흔들렸다. 갈 곳 잃은 그의 젓가락이 몹시 외로워 보였다.


마주 앉은 가족들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자고로 음식은 나눠먹어야 맛인데, 이 맛있는 걸 아빠는 먹을 수 없다니 아이들도 괜히 눈치를 살폈다.


그럼에도 우리 부부는 최선을 다해 저요오드 식단을 사수했다. 사막에서 바늘 아니라 소금 한 톨이라도 찾아야지. 남편의 건강을 위해서라면.




올여름에도 14일간의 대장정을 앞두고, 마음이 벌써 화닥거렸다. 혹시나 실수로 천일염을 넣게 될까 봐 싱크대에 '천일염 조심'이라고 써붙여야 하나, 오만 궁리를 다 해보고 있었다. 이런 사정을 알리 없는 중학생 딸아이는 여름방학이라고 들떠 있었다. 친구 누구는 해외여행도 가고 놀이공원에도 가는데 우린 어디로 가냐고 물었다.


나는 진심으로 안타까웠지만 그 대답마저 건성으로 하고 말았다. 7월 내내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일이 바빴기 때문이다. 급기야 지난주엔 브런치 연재를 한 주 쉬기까지 했다. (독자님들께 깊은 사과를 올립니다.)


급한 일들은 언제나 한꺼번에 몰려와서 사람을 코너로 몬다. 매번 간이 쪼그라들게 한다. 그럴 때면 말의 온도부터 차이가 났다. 나도 모르게 냉소적인 말을 툭 뱉어놓고 스스로 깜짝 놀라곤 했다.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행복하려고 바쁜데, 바빠서 행복할 새가 없다니.


시간에 질질 끌려가던 마음을 붙들어 세웠다. 널브러진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에 조바심 내기보다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자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리고 맨 처음 한 것이 1박 2일 템플스테이 신청이었다. 무겁고 중한 일들 틈에서 잠시 쉼표가 필요했다. 참석 인원은 남편과 나, 딸아이까지 셋이었다.





2시간 여를 달려 산사 입구에 도착했다. 먼 산머리에 구름이 걸려 있었다. 꼬불한 길을 따라 올라가니 녹음이 짙은 숲속에서 사찰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용한 경내에 들어섰다. 피부가 투명한 스님이 우리에게 방 하나를 배정해 주셨다.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이부자리가 깔끔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그밖에는 시계도, TV도, 컴퓨터도 없이 적막한 사각형의 공간이었다. 그나마 에어컨의 자비가 우릴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울 따름이었다.


개량한복을 갈아입고 둘러보니 벽에 일정표가 붙어 있었다. 저녁 5시 저녁공양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시간에 맞춰 공양간을 찾아갔다. 구수한 밥 냄새만 맡아도 허기가 밀려왔다. 무나물과 호박나물, 된장국, 풋고추, 호박잎 쌈까지 정갈한 사찰음식이 차려졌다. 역시나 꿀맛이었다. 허겁지겁 밥을 쓸어 넣다시피 하면서 그릇을 싹싹 비웠다.


이후엔 스님과 간단한 차담이 이어졌다. 주로 어디서 왔는지, 템플스테이 신청한 계기가 뭔지, 선풍기 바람처럼 선선한 대화를 나누며 차를 마셨다.


산에서는 해가 빨리 지는지, 금방 어둑해졌다. 산책도 할 겸 산사를 둘러볼까도 싶었으나 바깥 공기가 끈적거렸다. 열대야가 여기까지 따라올 줄이야. 우리는 곧장 숙소로 향했다. 에어컨이 반겨주는 그곳이 극락이었다.




소등시간 밤 9시 30분. 그전까지는 자유일정이었다. 방안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은 책이 여러 권 놓여 있었지만 함부로 열어보지 않았다. 대신 편안한 자세로 드러누워 각자 휴대폰 삼매경에 빠져 들었다. 이미 휴대폰과 한몸이 된 현대인들이 산에 왔다고 갑자기 달라질 리 없었다. 다만 도시와 다른 점이 있다면, 유튜브를 아무리 눈아프게 봐도 겨우 30분이 지나 있다는 점이었다. 산사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그런데 배는 금방 꺼졌다. 침을 꼴딱이던 우리는 의기투합했다. 아까 산에 오르기 전, 진입로 옆에 작은 찻집이 있었다.


"거기 차도 팔고 샌드위치, 피자도 판대."


나의 말에 남편은 그걸 언제 봤냐며 놀라워했다.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백화점 입구에 들어서기만 해도 마음에 드는 옷이 한 눈에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나 할까.


"9시 30분 소등시간 전까지 다녀오는 거야."


우리는 서둘러 신발을 챙겨신었다. 와라락. 자갈 밟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고등학교 야자시간에 몰래 떡볶이 사 먹으러 갈 때 느꼈던 긴장이 등을 타고 전해졌다. 남편이 차에 시동을 걸었다. 우리는 천천히 어둠을 밀고 나아갔다.




가로등 하나 없이 깜깜한 시골길을 달려본 것도 오랜만이었다. 운전대를 잡은 남편에게 조심하라고, 잔소리를 거듭했다. 막상 도착하는데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찻집이 아직 영업 중이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딸깍, 안전벨트를 푸는 찰나였다. 갑자기 푸시쉭~ 몸이 내려앉았다. 내가 앉은 조수석의 타이어가 펑크 난 것이었다.


"어? 타이어가? 왜?"


난데없는 상황에 말문이 막혔다. 당황스러워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어둠 속에서 부처님의 호통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거 하나 못 참고 이 밤중에 내려왔냐고, 뒤통수를 세게 후려 맞은 듯 했다. 암만 생각해도 민망하고 창피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남편이 어딘가로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멀리서 차량 한 대가 나타났다. 살면서 보험사 직원이 이렇게 반가웠던 적이 있었던가. 눈깜짝할 새 타이어를 교체하는 경이로운 기술 앞에 나는 절이라도 넙죽 올리고 싶었다. 그리고 떠나면서 그분이 남긴 한마디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누구나 밤중에 이런 일 겪으면 놀라잖아요. 전화받자마자 달려왔어요."


길 위에서 진정한 부처를 만났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무도 말이 없었다. 배고픈 것도 잊어버렸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불을 끄고 누웠다. 도시에선 아무리 커튼을 쳐도 어디선가 빛이 새어들기 마련인데, 산속에선 그야말로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딸아이가 무섭다며 손을 잡았다. 아이를 다독이는 사이 어슴어슴하게 방안의 사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도 익숙해지면 대상의 형체가 드러나듯, 시간이 지나면 보이는 것들이 있다. 우리는 서로 미안하다는 말을 주고받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배고프다고 해서 미안해."


"아니야, 나도 마찬가지였어, 미안해."


"아까 많이 놀랐지?"


"당신도 많이 놀랐죠. 운전하기 힘들었겠다, 미안해요."


문득 어떤 시선이 느껴졌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각자의 자리에서 힘들었을 서로를 곰곰이 응시하는 시간이었다. 그동안 바쁜 일상에 허둥거리다 놓치고 지나온 마음의 윤곽이 암흑 속에서 오히려 또렷하게 드러났다. 때로는 짜증으로, 스트레스로 덫칠했던 진심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그리고 서로의 존재가 더없이 애틋하게 다가왔다. 우리는 고요한 어둠을 이불처럼 덮고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스님께 인사를 하고 짐을 챙겨 나섰다. 산을 내려가자 어제 그 찻집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까지 온 김에 차나 한잔하고 갈까?"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는 찻집 안에는 손님이 제법 있었다. 우리는 구기자차와 오미자차, 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다. 창가에 올망졸망 작은 화분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둘러보는 사이 음료가 나왔다. 그런데 사장님이 뭔가 착각했는지, 오미자차가 아닌 매실차를 가져오셨다. 나는 괜찮다며 그냥 두시라 했다. 이 더위엔 매실차도 시원하고 달짝지근하니 잘 넘어갔다. 마시고 일어서는데 사장님이 차 한 잔을 더 내오셨다.


"죄송해서요, 오미자차도 직접 담근 거라 맛있습니다."


선홍빛 마음을 감사히 받아 들고 나왔다. 차에 타자마자 오미자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잊지 못할 여름을 하나 더 가진 듯 하여 흡족하면서도 뒷맛이 상쾌했다.

keyword
이전 24화빗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