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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돌아오는 거야

부메랑처럼

by 나야

1미터쯤 앞에 중학생 딸아이가 걸어가고 있다. 평소

같았으면 둘이 팔짱끼고 그날 하루 있었던 일들을

쫑알쫑알 얘기하느라 바빴을 텐데 오늘은 서로 멀찍이

떨어져 걷는다. 왜냐하면 내가 아이 학원 마치는 시간을

깜빡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가 단단히 골이 나있는

상태였다.



평소 학원 픽업은 남편이 주로 한다. 한데 오늘따라

그가 좀 지쳐 보였다. 낮동안 피곤했는지 퇴근하자마자

소파에서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랬으면 나라도 대신

나갔어야 했다. 그러나 하필 그 시간에 나는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모니터에

붙들려 있던 중 전화를 받았다.

“엄마, 왜 안 와?”


전기가 찌릿했다. 화들짝 놀라 입고 있던 반바지 차림

그대로 슬리퍼를 끌고 학원 방향으로 달려 나갔지만

이미 늦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딸아이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났다. 아이는 왈칵 원망을

쏟아냈다.


“컴컴한 데 아무도 없어서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죄인은 아이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아이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쌩하니 앞서 가버렸다. 나는 그저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같이 가자고 불러볼까도

싶었지만 잠시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녀석이 걸을 때마다 가방에 달린 작은 곰 인형이 좌우로

흔들거렸다. 엉덩이를 삐죽거리며 앞서 가는 모습이

귀여워서 실실 웃음이 새어 나오려 했다. 입술에 힘을

꾹 주었다. 정신 차려, 지금 그럴 때가 아니야.


“미안해, 아까 엄마가 일하느라 깜빡했어.”

“그럼 아빠는! 아빠는 왜 안 왔어?”


“아빠는 좀 피곤했나 봐, 잠이 들었어.”


내가 말하면서도 안타까웠다. 왜 엄마는 항상 바쁘고

아빠는 늘 피곤한지, 아이에게 설명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골목을 지나 아파트 단지로 접어들었을 때 문득 그녀가

스쳐갔다. 철부지 시절, 나도 똑같은 경험이 있었다.

그때는 내가 앞서 걸었고, 뒤에서 할머니가 따라왔다.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 나도 잔뜩 화가 나

있었다. 심지어 그날은 할머니가 나를 보러 일부러

시골에서 오신 길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죄송합니다!)

그랬는데도 무슨 일 때문엔가 토라진 나는 그녀를 한번

불러보지도 않고 땅을 푹푹 밟으면서 걷기만 했다.

마치 땅에다 마구 화풀이하는 사람처럼.

실은 내가 얼마나 화났는지 보여주고 싶어서였음을

고백한다.


오래전 그녀가 했던 것처럼, 아이 뒤를 말없이 따라

걸으면서 알게 되었다. 묵묵히 지켜보는 마음도 있다는

것을.


땐 미처 몰랐던 할머니의 진심을 이제야 헤아리다니.

그러고 보니 난 참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었네.

어리석은 손녀는 뒤늦게 가슴이 뜨거워졌다.

언제쯤 나는 할머니처럼 속 깊은 어른이 될 수 있을까.

그 사랑의 반의 반이라도 아이에게 주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간장종지만 한 속으론 아직 한참 멀었다.


그래도 이 따뜻한 울림이 아이에게 전해지길 바라며

남겨본다.



딸아.

엄마가 살아보니까 인생은 돌아오는 거였어.

지금 먹은 마음을 언젠가는

내가 돌려받도록 설계된 시스템인 거지.

신기한 건 뭔 줄 아니?

너그러운 마음은 너그럽게,

부끄러운 마음은 부끄럽게,

내가 부린 만큼 출력된다는 거야.

그러니 너무 조급해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았으면 해.

느긋하게 걷다 보면

머지않아 너의 길을 만날 수 있을테니까.

조금 돌아가거나 중간에 길을 잃는다고

당황해할 필요도 없단다.

가다 보 길이 나오고

길은 서로 이어지게 돼있거든.

그러니 딸아,

넌 언제나 앞을 보면서 당당히 가렴.

이 엄마가 지켜줄게.

너의 뒤에서!




써놓고 보니 지금의 나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가다 보면 언젠가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게 될 것이다.

다시 돌아올 것이다.

중요한 건

이 마음이 어디에서 왔는지

기억하는 것이다.

스스로 얼마나 사랑받은 사람인지

소중한 존재인지

한시도 잊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할머니께 받은 마음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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