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혹(佳惑)한 불혹 가혹(苛酷)한 마흔

중년들의 기획-논어 읽기의 유혹

by 김기황



오랫동안 천하를 돌아다니다가 쉴 자리를 찾고 있던 용이 어쩌다가 개천에 누워서 쉬게 되었다. 그러자 개천에 살고 있던 모기떼가 극성맞게 덤벼들었다. 논어라는 책은 만들어지고 나서 한 번도 쉰 적이 없이 인류의 정신문화를 받치고 있다. 한자문화권에서의 철학, 특히 정치철학의 역사는 논어에 대한 각주의 역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논어를 대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로 해석해 본 적이 있다. (인간사의 이치를) 말하고 (세상일의 이치를 밝혀서) 알리며, (말의 참뜻을) 여쭈어서 왈가왈부하면서 토론하고 헤아려서 사물의 이치를 헤아리는 것이 논(論)이라는 한자가 품고 있는 내용이다. 어(語)는 일반적인 말이었으나 논어가 대명사로 쓰이면서 공자와 제자들의 말로 한정된다. 논어의 집필진들이 특정한 계층만을 위한 목적으로 책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어차피 책을 구입할 수 있는 계층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스승의 좋은 말씀들을 기록으로 남겨두자는 갸륵한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단순하게 보자면 한 무리의 일상대화들의 기록이라고 볼 수 있는 대화록이 수천 년 동안 많은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친 것은 수준을 차원으로 이동시킨 사람들의 수고였다. 논어가 그 핵심성의 단순함이 세상 속으로 나타나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자 책 속의 내용에 대하여 이해를 넓히고자 하는 사람들은 논어의 단순함을 복잡하게 만들고 핵심의 핵심들을 점점 더 많이 창조하였다. 논어는 약 1500자 정도의 한자로 아주 많은 내용들을 풀어내고 있다. 용에게 많은 비늘이 있듯이 논어에는 비늘 같은 수많은 해석들이 있다. 교양으로 논어를 읽는다는 것은 원본논어를 번역하고 해석한 책을 읽는 것이다. 개인들의 능력이나 수준에 따라 읽고 나서의 느낌이 다르겠지만, 나에게는 전체의 내용이 일상과는 거리가 있다는 느낌의 오래전 기억이 있다. 지금은 논어를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명확하게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마음이 가지 않는다는 핑계를 댈 뿐이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아주 빠르게 논어의 한글해석 부분만 읽어 보았다. 나의 머릿속에는 왜 사람들은 마흔에는 논어를 읽고 싶어 하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어 있었다. 내가 찾아낸 단어는 ‘불혹(不惑)’이었다. 아마도 사람들은 삶의 후반기를 시작하는 전환점에서 흔들리지 않는 자신을 위해서 위안이 필요했던 것 같다. 마흔 살에 불혹이라는 단어에 혹하고 있는 상황은 역설적이기는 하다. 공자는 십 대에 배움에 들어갔으며 삼십 대에 뜻을 세웠고 사십에는 혼란함에 빠져들지 않았고 오십에는 하늘의 뜻을 알았다고 하였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해석을 하면 전체적인 맥락이 묘하게 받아들여지기도 할 것이다. 당시에 십 대부터 배움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은 요즈음은 건물주의 자손이라는 것이다. 삼십에 뜻을 세웠다고 하였는데 어떤 뜻을 세웠던 것일까? 설마 천하의 모든 백성의 삶을 평안하게 해 주리라는 망상을 품은 것은 아닐 것이다. 역사에서 피층 민들의 삶을 평안하게 해 주겠다는 사람들이 저지른 악행은 언제나 무능한 군주들의 책임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어떤 식자들은 비겁하다는 평가를 듣지 않으려고 목숨을 버리기도 하였다. 민주화된 오늘날 국민의 어려움은 역사의 전통(?) 일뿐이다. 공자가 불혹을 말할 때 무엇에서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였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후세의 많은 해석에서 사람들은 백성을 위한 정치철학을 세우고 알리며 실천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말았다. 어쨌든 세웠던 뜻을 흔들리지 않고 실천해 나간다면 하늘의 뜻을 알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얻기에는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인다. 그저 자애로운 스승이 제자들과 나누었던 한담 같았던 논어의 내용이 철갑의 용이 된 것은 많은 노력과 우연이 겹친 결과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들이 보여준 노력에는 수준과 차원의 차이가 있다. 수준은 확인이 가능하지만 차원은 확인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논어의 내용을 자신의 현재상황에 맞게 해석하고 받아들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흔들리지 않고 바르게 옳게 살아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논어 속의 내용과 글자의 뜻들을 다른 곳으로 까지 넓힌 사람들은 차원이 다른 사유로 자신들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마흔에 논어를 읽는 마음에는 –괄목상대(刮目相對)보다는 괄목상아(刮目相我)가 필요하다

인간의 모든 일은 생존을 위한 변화의 활동들이다. ‘먹고사는 것은 다 같다’와 같은 유형의 말은 타인이 자신과는 다른 행보를 하는 것을 체념시키게 한다. 특히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차원의 일들에 대해서 이러한 반응을 보인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짓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에 담긴 의미를 실현해야 하는 사람은 오롯이 그 이름을 가진 자신의 몫이다. 그리고 그 이름을 평가하는 것은 그 사람이 우주 속의 먼지가 되어 흩어진 후에 남은 사람들이 할 일이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동안 이름과 관련된 사회의 인습적 허상에 집착하는 것은 그리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자신의 이름에 붙여지는 온갖 수식어들이 내 삶의 리더로 살아가려는 의도와 결이 맞지 않는다면 지음(知音)이나 지기(知己)를 찾을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살펴보아야 한다.

괄목상대하여서 타인에게서 보이는 외형상의 변화된 모습이나 내면의 태도가 변화된 양상을 알아차린 것만으로는 시선을 넓히는데 한계가 있어 보인다. 그렇게 알아차린 것들을 나의 내면으로 쏘아 보낼 때 나의 존재를 차원으로 이동시킬 수 있는 역린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괄목상대한 후에는 괄목상아(刮目相我)하는 시선을 시도를 해보아야 한다. 이는 긍정적인 사고와 태도에 영향을 끼치는 환경을 조성하는 단순한 시도가 아니라, 그 수준을 넘어서 차원으로 이동해 보려는 강력한 의지를 내면화시키는 깨우침이다. 다른 사람들의 그림, 음악, 글들을 보는 것은 그것들의 수준에 감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속에서 얻어지는 영감으로 나의 생존의 차원을 살펴보려는 것이다. 타인들의 영감적인 생산물에 대해 비평, 비판, 찬탄하는 것은 내가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자기 검열의 자괴감을 표출할 것이 아니라, 나에게 영감을 주는 것을 찾아보려는 보이지 않는 노력이라는 정신승리로 갈무리해 둘 수도 있다. 괄목상대의 태도로 자신의 내면을 살피는 것은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찾는 것이며 이는 나의 시선을 수준의 영역에 머물도록 하는 게 아니라 나의 시선을 차원의 영역으로 이동하려는 매우 능동적인 의지를 내면화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물이 자유를 얻는 과정과 같다. 물이 수평만을 유지하려는 시선의 수준에 머물렀다면 다른 차원이 있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물이 다른 차원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 차원으로 이동하겠다는 시선을 가지는 순간부터 자신의 내부 속으로 엄청난 에너지를 불러들이게 된다. 이 과정에서 물은 수증기의 차원으로 존재하게 된다. 물이 수증기의 존재를 인식하지는 못하겠지만, 괄목상대를 지속해 온 나는 평안과 고요라는 수준에서 머물던 물이 다른 차원에서 평안과 고요를 얻고 궁극적인 자유에 접근하였다고 느낄 수도 있다. 물과 수증기는 수준과 차원을 형용하고 있다. 내가 수증기가 된 것을 장자는 ‘나는 나를 장사 지냈다’고 하였다. 장사를 지낸 대상도 나이고 장사를 지낸 후에 남아있는 나도 나이다. 곤이 변해서 대붕이 되었듯이 나(我)를 장사 지낸 후에는 나(吾)가 된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환골하고 탈태하는 과정을 지속으로 유지하는 것이 일생이다. 환골탈태는 대부분의 경우에 글의 창작과 관련하여서 활용하지만 다르게 활용할 수도 있다. 환골법이란 그 뜻을 바꾸지 않고 그 말을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의 뜻은 바꾸지 않고 내삶을 아름답게 영위해 나가는 것이 내 인생을 환골 시키는 것이다. 탈태법이란 그 뜻을 본받아 형용하는 것이라고 한다. 자신의 이름을 형용한다는 것은 이름을 설명을 할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인내하고 감내하는 과정을 쌓아가는 것을 말한다. 인류의 현자라고 대접받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자신의 삶의 과정 속에 있는 나를 살피기를 권하고 있었다. 삶의 과정을 살핀다는 것은 변화하는 양상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자신의 삶의 변화양상을 살피고 내삶의 질과 양의 수준을 향상하고 차원을 이동하는 것이 인간으로 태어난 이유임을 자각하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변화의 양상을 살피는 것은 변화된 모습을 설명하는 것과는 다르다. 세계의 변화양상과 변화된 모습, 역사의 변화양상과 변화된 상황 등 자신의 외부의 변화양상과 변화된 모습을 설명하는 이야기들은 많이 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의 변화양상이나 변화된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은 드믈다. 그것은 변화양상이나 변화된 모습의 실체가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기에 자신과 대조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그래서 장자는 자신의 이름이 품고 있는 잠재력을 위해 커다란 물고기알을 등장시켰고, 자신의 이름을 형용하겠다는 의지로 대붕을 등장시켰다. 나는 ‘곤’과 ‘대붕’이라는 모습에 집착한 짧고 좁은 시선으로 인해 ‘곤’과 ‘대붕’으로 변화하기 위한 변화양상과 변화된 모습을 볼 수 있는 넓고 기나긴 시선이 필요하다는 것을 놓치고 있었다. 장자가 ‘곤’과 ‘대붕’을 등장시킨 것은 그 변화양상과 변화된 모습을 살피라는 의도였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장자는 변화양상이나 변화된 모습을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다. ‘곤’이 ‘대붕’이 되는 과정과 대붕이 승천하는 과정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장자가 ‘곤’과 ‘대붕’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하는 순간, 장자는 이름을 형용하려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이름 안에 갇힌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장자의 이야기의 핵심은 무엇일까? 나는 감히 주장하건대 차원의 삶을 스스로 형용하라는 외침이라고 생각한다.

논어를 나를 바로잡는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 나를 흔드는 도구로 사용해야 하는 이유이다. 즉, 논어를 읽는 것은 바른 길, 옳은 일, 착한 일이라는 경계 속으로 들어가서 경계를 튼튼하게 하려는 것보다는 경계를 없애려는 도전을 해보는 것이다. 타인에게 꼰대가 되기보다는 내삶의 리더로 살아가려는 인간이 되려는 것이어야 한다.

불혹의 주제는 변화이다.

변화라는 주제에 지식으로 접근하면 ‘경천동지’가 가장 큰 흔들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내면으로 접근한다면 ‘역린’이 가장 큰 울림을 준다. 역린은 감히 누구도 건드리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완전 파괴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식으로 접근하면 ‘역린’은 뜻은 알고 있지만 한 번도 발동된 적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변화시킨다는 측면에서 접근해 보면 오직 나만이 ‘역린’을 건들 수 있다. 타인은 나의 역린을 건드려서 불편한 상황을 만들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타인이 건들려하지 않고 내가 건들지 않는다면 ‘역린’이라는 시한폭탄은 영원히 터지지 않으며 영원히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과는 다른 차원의 영혼을 만나보려 한다면 ‘역린’이라는 시한폭탄을 터트려야 한다. 그 시한폭탄을 건드리면 내가 죽을 수도 있다. 그래서 역린은 죽기보다도 싫은, 그럼에도 건드려보아야 하는 나의 내면이다. 폭탄이 터지고 나서 나타나는 변화의 역동을 견뎌내고 나면 차원이 다른 영혼의 고요 속에 머물 수 있는 내공이 생길 것이다.

마흔에 논어를 읽고 나서는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시선이 좁아진다. 이성을 지배하는 정신은 피폐해지지 않는다. 영혼이 피폐해지는 것이다. 영혼은 나의 외부로 향하는 시선과 나의 내부로 향하는 시선이 만나는 지점에 존재한다. 나의 내부로 향하는 시선이 망가졌을 때 사람들의 시선은 좁아지고 영혼은 피폐해진다. 정신이 피폐해진 영혼을 부여잡고 홀로 고군분투하고 있기에 그나마 내가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정신과 영혼은 한 몸에서 동고동락하는 애증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영혼이 피폐해지는 것은 인간이 가진 숙명이다. 동물들의 생각을 인간이 알고자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글들은 아주 많다. 현미경으로만 볼 수 있는 미생물, 작은 생물체인 개미, 인간보다 더 강한 근육과 몸집을 가진 생명체를 연구하는 이유 중의 하나에 정신과 영혼이 차이가 있다는 인간의 오만이 있다. 모든 인간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오만하다. 그것은 모든 생명의 공통 특성인 생존을 넘어서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존과 그것을 넘어선 무엇인가를 집중과 몰입, 열심과 끈기로 추구하는 과정에서 시선이 좁아들고 비틀어지곤 한다. 인간의 오만은 이 지점에서도 머리를 내민다. 인간은 인간의 지혜가 역사를 만들었기에 지혜가 더 늘어났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온갖 종류의 역사를 소중하게 정리한다. 역사를 정리한다는 것은 과정을 살피는 것이며 과정을 살핌으로써 인간에게 지혜를 가져다준다고 믿는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서 이 과정에서 인간들이 얻는 것은 집단으로서의 인간이지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다. 개인으로서의 인간들은 이러한 인류들이 지혜라고 하는 것들을 얻어내는 과정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왜곡, 아전인수, 곡학아세, 지록위마등의 시선에 모든 인간들이 빠져든다. 정신 수준에서 생존에만 매몰되면 이러한 상황에 빠져든다. 영혼 수준에서 생존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노력이 다른 차원의 삶을 보여주게 된다. 왜 빠져들었는가?라는 질문은 과정을 돌이켜보고 후회를 하게 만드는 순환에 빠진 자. 이는 생존이고 집단으로서 인간의 사고를 정리하는 것이다. 그래서 질문의 바뀜도 있다. 어떻게 그 상황에서 빠져나올 것인가? 이 질문은 다시 개인에게 생존에 집중하게 한다. 물론 과정을 반복하지만 개인으로서의 인간에 집중한다는 점이다. 자신만의 생존의 기술과 태도를 재점검하는 것이다. 거기에 괄목상아와 역린이 필요한 것이다. 인간이 시행착오를 거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성인, 현자로 추앙받는 사람들은 시행착오를 인식하고 빠져나온 사람들을 일컫는다. 이러한 태도를 견지한 사람들이라서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는 것이다. 추앙까지는 아니더라도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개인적으로 평온을 유지하여 자신의 삶을 만족스럽게 살아가는 것은 ‘인간은 누구나 시행착오에 빠진다’는 인식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시행착오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하여 자신의 삶을 정체시켜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정체하지 말아야 함을 인간의 숙명임을 인식하는 것도 중요하다. 정신과 영혼이 한 몸에서 존재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논어에서 찾은 나의 지혜

신화의 시대에 영웅들의 이야기가 역사시대로 오면서 영웅들의 이야기는 어디로 갔을까? 영웅들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성인들이 자리하였다. 신화시대의 영웅들은 자신의 일상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미 해석되어 있는 경험들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는 시선을 가졌기에 영웅이 되었다. 논어는 믿음의 세계에서 생각의 세계로의 새로운 가능성의 시선을 제공해 주었다. 논어를 마흔 즈음에 읽어보겠다는 것은 통과의례의 삶이 아니라 입문 의례의 삶을 살아보려는 인간의 욕구이다. 즉 외적 가치에 치중되었던 삶을 내적인 가치를 찾아보려는 관심의 방향을 또는 관심의 무게를 변경하려는 인간의 욕구인 것이다. 한 사람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를 꼽으라면 성년통과의례시기를 꼽을 수 있다. 성년통과의례는 ‘나는 이제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다. 그래서 이제 유치한 장난은 그만해야 한다’는 인식을 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시점이기는 하다. 이보다 중요한 점은 성년통과의례와 동시에 스스로 입문의례를 치를 수도 있기에 중요한 시점인 것이다. 입문의례의 핵심은 비밀이다. 비밀은 스스로 내면화하는 깨우침이다. 아이의 감정이 정신으로 확장되는 시점인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아주 많은 세상의 비밀을 체득한 이후에 찾아오는 깨우침이 영혼이다. 영혼의 출발점은 자신의 외부로 향하는 시선과 자신의 내부로 향하는 시선이 만나는 순간이며, 영혼이 드러나는 시점은 개인의 비밀이다. 그 비밀들이 굳어져 나의 역린이 되어간다. 나의 역린은 다른 사람이 건드려도 나의 정신이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나의 역린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역린은 오로지 나만이 건들 수 있으며 그러한 깨우침이 쌓여야 다른 차원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나도 나의 역린을 알기는 어렵다. 역린은 묻어둔 희로애락애오욕이다. 이것들을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승화시켜야 한다. 나의 역린은 그것을 건드려서 새로운 차원으로 이동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묻어둔 슬픔이나 감쳐둔 진실, 억압한 감정들을 건들고 나서 이전과는 다른 삶의 차원이 된다면 이런 것들을 나의 역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신이 어떤 계기로 이미 달라져 있는 상태를 영혼이라고 한다. 그 달라져 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공부이다. 그래서 공자의 십 대에 공부에 뜻을 두었다는 말은 중요한 것이다. 외부로만 향하던 나의 시선과 내부로 향하는 나의 시선이 만나는 지점에 영혼이 자리한다. 그 자리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깨우침이다. 깨우침이라는 달라짐을 겪고 나서야 영혼을 등장시킬 수 있다. 깨우침이 없다면 자신의 그 아름다운 영혼을 영원히 못 만날 수도 있다. 그 깨우침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넓게 존재한다. 경계지음보다는 경계 품음이나 경계 넓힘이 필요한 이유이다. 한자 성어들을 기존의 해석이라는 경계를 벗어나서 대해보면 정신이 받치고 있는 든든한 영혼을 만날 수도 있다. 깨우쳐야 영혼의 차원을 만날 수 있다. 우리가 삶의 질과 양에 매몰되어서는 확실히 증명되어야 하는 가치가 있는 것처럼 나열하여 거기에 가까이 가는 것을 수준이라고 집착하는 동안 깨우침은 멀어져 갔다. 깨우침 이후에 접하게 되는 영혼의 차원은 일상과 똑같다. 다만 전에 접하던 것과는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 논어에서 깨우침은 이입이다. 이는 자신의 내면으로 자신의 시선을 보냈다는 것이다. 불혹은 해탈이고 이순은 살아있는 열반이다. 십 대에 자신의 내면으로 시선을 돌린 공자는 사십 대에는 불혹 하게 되었다고 한다. 불혹을 경계지음이 아니라 경계 품음으로 해석해야 하는 이유는 20년 후를 이순(耳順)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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