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십 대 지우학(志於學). 공부에 뜻을 두다.
인간의 배움은 두 갈래로 흐른다. 1차 학습은 세상을 향한 배움이다. 지식과 기술, 경험을 통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익히며 생존과 성취를 추구한다. 그 동기는 대개 결핍의 자각에서 비롯된다. 타인과의 비교 속에서 자신에게 없는 것을 인식하고, 그 부족함을 채우려는 열망이 배움을 움직인다. 이 과정에서 사람은 외부의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하며, 사회적 쓸모를 얻는다. 그 결과로 어느 정도 안정된 삶을 꾸리는 이들은, 1차 학습의 효과를 누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세상과의 관계를 익혔고, 살아가는 기술을 체득했다. 그러나 이 배움은 한계가 있다. 외적 결핍이 채워져도 내면의 공허가 남는다. 성공을 이뤘는데도 충만하지 않고, 일상의 반복 속에서 의미가 희미해진다. 이때 드러나는 것은 ‘더 배워야 한다’는 필요가 아니라, ‘왜 배워왔는가?’라는 물음이다. 그 물음이 열리는 순간, 배움은 1차에서 2차 배움으로 넘어간다.
2차 배움은 세상이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한 배움이다. 배운 그것을 다시 자신에게 비추며, 그 경험이 나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성찰한다. 이 배움의 초점은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이다. 배움의 방식과 태도를 살피며, 외부의 기준보다 내면의 질서를 세우려 한다. 결국 1차 학습이 세상을 이해하는 힘이라면, 2차 배움은 자신을 납득하는 지혜다. 납득이란 단순히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서, 스스로 충분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삶이 안정될수록 그 지혜의 필요는 더욱 절실해진다.
나는 사마천이나 찰스 다윈처럼 40대 후반에 심한 흔들림을 겪었다. 그러나 그것도 시간이 흘러서야 알았다. 당시에는 그것이 어려움이나 곤란으로 느꼈다. 흔들림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어려움은 삶의 외부에서 오는 저항이었고, 흔들림은 그 저항이 나의 내면을 흔들 때 일어나는 존재의 진동임을 깨달았다. 어려움은 문제를 해결하면 해소되지만, 흔들림은 해결이 아니라 깨달음으로만 잦아들었다. 사마천과 다윈은 삶의 구조가 무너지는 듯한 시기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보다 ‘나는 누구인가?’로 시선이 옮겨졌다. 흔들림의 크기는 사건의 크기가 아니라, 그 진동이 닿은 깊이로 측정된다. 사마천은 육체의 고통 속에서 인간의 존엄을 다시 물었고, 다윈은 신앙과 진리 사이에서 인간 이해의 지반을 흔들었다. 나의 흔들림은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다. 그래도 나에게는 그 흔들림 속에서 스스로에게 낯선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들과 같은 결의 진동을 버텨내었다는 그것이 의미가 있었다. 고통은 외적 사건이지만, 흔들림은 내면이 자신을 새로 인식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완전히 새롭게 시작한 시골 생활은 어렵고 곤란한 상황이 몇 년간 이어지고 있었다. 오롯이 나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존재들의 어렵고 곤란한 상황을 돌아볼 겨를도 없었다. 자존감이 무너진 사람은 세상 탓을 했다. 환경, 사람, 운, ···. 일상은 흘러갔고 내면은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같은 어려움이 되풀이되고 노동은 의미를 잃어 갔다. 같은 상황에서 평소에 듣던 익숙한 말에도 위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아주 낯선 시선이 하나 날아들었다. 나를 조소하는 나의 시선이 폐부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피할 수도 피해 서는 안 되는 아픔이었다. 그 시선이 주는 아픔의 끝에는 이렇게 써져 있었다. “왜 나는 이렇게 반응하는가?” “이 상황이 나에게 무엇을 비추고 있는가?” 이 자문이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 곤란이 ‘문제’에서 ‘거울’로 바뀌었다. 그때부터 나는 해결이 아니라 성찰의 길, 즉 흔들림이라는 내면의 배움으로 들어선 것 같다.
‘불혹’은 문자 그대로 ‘흔들리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 전제는 ‘수많은 흔들림을 지나온 뒤’에야 가능하다는 점이다. 결과에 쓸려 다니는 사람들은 혹독한 비바람을 견딘 대나무의 죽절(竹節)에는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40대 전후의 시기는 내면과 외부 세계에서 수없이 질문받고 흔들리면서, 스스로의 기준과 방향을 점검하고 다져가는 과정이다. 이 시기에는 “내가 무엇에 흔들렸고, 왜 그랬는가?”를 돌아보고, “어떤 중심을 세워야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에 대한 내적 탐구의 생각이 깊어진다. 그래서 불혹은 흔들림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 흔들림을 통해 나다움을 완성하는 과정의 한 지점임을 보여준다. 사람에 만족하지 못하고 인간이 되기를 애쓴다면 2차 학습이 있어야 한다.
시기와 상황이 빚어내는 오묘함에서 가혹(佳惑)한 시선이 생긴다. 여기에 2차 학습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자리한다. 2차 학습에는 ‘힘을 들여 노력하다’라는 뜻으로 새기는 공부가 필요하다. 공부는 자기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고 다듬는 내면적 작업이기에 중요하다. 2차 학습을 공부라 하는 것은 지식과 기술을 익히는 1차 학습과 구분을 위해서이다. 또한 ‘배움’이 좀 더 포괄적이기는 하지만 주로 외부로부터 무언가를 습득하는 의미가 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부에서 ‘힘’은 단순한 육체적 힘이 아니라, 생각하고 사유하는 정신적 힘, 즉 집중과 성찰의 힘을 주로 가리킨다. 그래서 ‘공부’는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정신을 다해 깊이 들여다보고 다루는 내면 작업의 의미가 강하게 내포된다.
공부의 본질에는 ‘삶은 단순히 외부에서 무엇을 배우는 데 그치지 않는다. 진정한 배움은 자신과 마주하고, 흔들림 속에서 나다움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어려움과 혼란은 성장의 징표이며, 그 안에 스스로를 깊이 성찰할 기회가 있다. 우리는 모두 불확실한 흔들림 속에서 중심을 세워가야 한다. 그 중심은 타인의 잣대가 아니라, 내면의 진실과 일치하는 나만의 길이다.’라는 사유가 담지(擔持)되어 있다.
공부에서 얻은 사유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서 시작된다. ‘나는 왜 이렇게 흔들리는가? 이 흔들림 속에서 나는 무엇을 발견해야 하는가? 내 삶의 중심은 무엇이며, 어떻게 세울 수 있는가? 나는 어떤 ‘나다움’으로 서야 하는가? 배움이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나는 외부의 기준이 아닌 내 안의 기준으로 살고 있는가? 어려움 속에서 나는 어떻게 성장할 수 있는가? 나는 내 삶의 주체로서 충분히 서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지식과 정보를 얻으려는 노력과는 결이 다르다.
공부는 나로부터, 나에 의해, 나를 위해 나의 내면을 떳떳하게 하려는 배움이다. 세상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을 스스로에게 비추어 깊이 성찰하는 과정이다. ‘무엇을 아는가?’보다 ‘어떻게 그 배움을 내 삶과 일치시키는가?’에 집중한다. 외부의 평가가 아닌, 내면의 중심과 진실에 따라 자신을 세우는 지혜를 키운다. 흔들림과 어려움을 자기 성장의 계기로 삼아, 나다움으로 살아가는 힘을 길러낸다. 따라서 공부는 단순한 지식 습득이나 기술 익히기를 넘어, 내면 깊숙이 자리한 자신과의 대화이자 성찰의 과정이다. 세상에서 얻은 경험과 배움을 다시 자신에게 비추어 묻는 일이 핵심이다. ‘어떤 것을 알고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그 앎을 나답게 살고자 하는 삶에 녹여내는가?’를 탐구하는 간곡한 행위다.
그래서 이 과정은 외부의 잣대나 성과에서 자유로워지는 훈련이기도 하다. 1차 학습이 주로 타인과의 비교, 사회적 인정에 집중한다면, 2차 학습인 공부는 자신의 내면 질서와 진실을 세우는 일에 무게를 둔다. 흔들림과 고통, 실패와 좌절도 내면 성찰의 중요한 재료가 된다. 이러한 경험들이 단순한 장애물이 아니라,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고 다듬는 과정임을 깨닫는 순간, 배움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나다움’으로 거듭나게 된다. 공부는 결국 ‘나다움으로 살아가기’라는 삶의 중심을 세우는 길이다. 이 길은 정해진 답이 없고, 누구도 대신 걸어줄 수 없다. 흔들림 속에서 자신을 묻고, 그 속에서 자신의 기준과 중심을 찾아가는 긴 여정이다. 그래서 공부는 내면의 질문과 답변으로 이루어진 대화이며, 삶을 깊이 사유하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필요한 배움의 단계이다. 이 배움을 통해 우리는 타인의 기대가 아닌, 스스로 인정하고 사랑하는 ‘나다움’으로 서게 된다.
논어는 단순히 지식 전달이나 기술 습득을 다루기보다, 자신을 성찰하고 내면을 닦는 공부의 본질에 집중한다. 논어를 읽는다는 것은 외부 지식이 아니라, 내면의 중심을 세우고 흔들림 속에서도 올곧게 서는 길을 탐구하는 철학적 공부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자기 삶의 주체로 서고자 하는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기에 논어는 시대를 넘어 가르침을 이어간다.
공자가 말하는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는 반복 학습을 넘어, 배움을 삶 속에서 어떻게 ‘나답게’ 살아가는 지혜로 삼을지에 대한 가르침으로 읽어야 참맛이 있다.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라는 말은 겉으로 보면 단순한 반복 같지만, 그 속에는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자기 성찰과 내면의 변화가 숨어 있다. 사람들은 이것을 흔들림을 겪고 나서야 어렴풋이 느끼는 것은 그 결이 다른 차원의 인식 전환이 있었기 때문이다. 배움은 단번에 깨닫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삶의 흔들림 속에서 서서히 열리는 문과 같다. 지금 그 문 앞에 서 있는 자신과 대화하는 것 자체가 이미 그 공부의 중요한 순간임을 기억하자.
공부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성찰(省察)이라는 단어를 피해 갈 수 없다. 성(省)은 ‘거울에 비추다’, ‘돌이켜보다’라는 뜻이 있다. 찰(察)은 ‘자세히 살피다, 살펴보다’로, 깊이 관찰하는 의미이다. 그리고 성찰과 혼동하는 반성(反省)이 있다. 반(反)은 ‘되돌아보다, 뒤집다’로, 자신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는 행위를 뜻하고, 성(省)은 앞서 말한 ‘돌이켜보다’ 의미와 같다. 즉, 성찰은 자기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고 세밀히 살피는 과정이고, 반성(反省)은 지나간 행동이나 생각을 되돌아보고 잘못을 깨닫는 과정으로, 주로 과오나 잘못을 중심으로 한다. 우리가 성찰을 반성으로 새기게 되면 깊은 자기 탐구 대신 자기비판이나 후회에 머무르게 된다. 이 차이의 인식만으로도 공부에는 큰 진전이 있다.
논어로 대표되는 동양사상에서 성찰을 독려하는 글은 많다. 이는 자신의 내면을 직시하면서 내삶을 나다움으로 흐르게 하는 것이 어렵다는 반증일 것이다. ‘吾日三省吾身(나는 날마다 나 자신을 세 번 되돌아본다)’는 구절은 지금도 회자한다. 이는 스스로의 행동과 마음을 자주 돌아보고 점검하라는 의미로, 성찰의 핵심적 자세를 잘 보여준다. ‘學而不思則罔,思而不學則殆(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리석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는 말은 배움과 성찰이 함께 가야 함을 강조하며, 성찰 없이는 참된 배움이 완성될 수 없음을 일깨운다.
성찰은 단순한 지식 축적이 아니라, 꾸준한 자기 점검과 깊은 사유를 통해 내면의 공부로 나아가도록 이끈다.
논어에는 성찰이 시작될 수 있는 내면의 흔들림이나 문제 제기를 드러내는 구절들도 있다.
‘知之爲知之,不知爲不知,是知也(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바로 아는 것이다)’는 구절은 스스로의 무지를 인정하는 데서 성찰이 출발함을 말한다. 무지를 깨닫는 순간 내면이 흔들리고, 그 흔들림이 곧 자기 성찰의 첫걸음이다. ‘君子不器(군자는 하나의 도구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말은 자신의 고정된 틀이나 한계를 넘어서려는 자각을 촉구하는데, 이는 기존 자신에 대한 문제 제기와 내면의 변화를 예고한다. 논어는 성찰을 촉진하는 독려뿐 아니라, 그 성찰이 시작되는 내면의 문제 제기와 자각도 함께 담고 있다. ‘吾未見好德如好色者也’(나는 덕을 좋아하는 사람이 색(色)을 좋아하는 사람만큼 흔하지 않음을 보았다.) 욕망과 덕 사이의 갈등을 지적하며, 내면의 혼란과 자각을 불러일으킨다. ‘知者不惑,仁者不憂,勇者不懼’(지혜로운 자는 혼란하지 않고, 인자한 자는 근심하지 않으며, 용기 있는 자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혼란(惑)과 근심, 두려움이 내면의 흔들림을 나타내고, 이를 극복하려는 성찰을 촉구한다. ‘不患人之不己知,患不知人也’(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남을 알지 못함을 걱정하라.) 타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함에 대한 자각도 자기 성찰로 이어진다. ‘性相近也,習相遠也’(본성은 서로 가까우나, 습관은 서로 멀다.) 본성과 습관 사이의 괴리를 깨닫는 것이 성찰의 출발점이다. ‘過而不改,是謂過矣’(잘못을 저지르고 고치지 않는 것을 진정한 잘못이라 한다.)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고 고치는 성찰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三人行,必有我師焉’(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타인으로부터 배우려는 겸손과 자기 성찰 태도를 말한다.
나다움으로 흐르는 내삶을 위해 이러한 성찰을 공부한 사람을 나는 ‘어른’이라고 부른다. 나는 ‘어른’을 나다움으로 나아가기 전 단계로 본다. 어른은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감과 성숙함을 지닌 존재이다. 때로는 책임 있는 어른으로서 자신의 말과 행동에 무게를 지니고, 때로는 깊이 있는 어른으로서 내면의 생각과 감정을 끊임없이 다독인다. 또한 자유로운 어른으로서 외부의 기대와 관습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삶의 방향을 선택한다.
이 ‘어른’의 모습들은 서양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아실현의 초기 단계와도 맞닿아 있으며, 동양사상의 군자와 성인이 지향하는 도덕적 완성의 길과도 긴밀하게 연결된다. 따라서 공자가 학에 뜻을 두었다는 것은 어른으로 서는 훈련이며, 그 어른이 더 깊이 자신다움을 실현해 가는 과정이다. 즉, ‘공자의 학’은 끝없는 자기 성찰과 성장의 길이며, 그 길 위에서 우리는 비로소 나답게 서는 ‘나다움’에 이른다. 이처럼 우리에게 학은 과거의 지식 전수가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각자 삶의 주체성 회복과 내면의 진정한 성장을 위한 깊은 성찰의 시작이다. ‘나다움으로 읽는 논어’의 첫걸음, ‘학’은 그래서 우리가 책임 있는 어른, 깊이 있는 어른, 자유로운 어른으로 서고, 그 어른에게서 나다움으로 나아가는 길잡이라 하겠다.
공부는 내면으로의 깊은 여행이자 나다움을 향한 끊임없는 성찰과 성장의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나의 내면 성찰이 타인에 대한 배려와 윤리적 행동으로 확장되는 방향성을 보여주는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과 자기 내면의 욕망과 혼란을 이겨내고, 본래의 ‘예’ 즉 균형과 조화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노력인 극기복례(克己復禮)는 나침반 같은 역할과 인간의 차원이 다름을 보여준다. 공부의 끝없는 확장과 깊어짐은 나 자신을 다스리고, 그 다스림이 타인과 조화롭게 연결되는 삶의 실천으로 이어지는 순환이다. 이 돌아올 기약 없는 내면 여행이야말로 공자가 일러준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의 참뜻이며, ‘나다움’과 ‘내삶의 리더’로 서는 길이라 할 수 있다. 그를 현대의 군자라 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