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성어 이야기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by 김기황

경전이나 경서들이 어려운 이유는 평소 접하는 일상의 단어들이 아니라는데 있다. 일상의 많은 단어를 하나로 묶으려고 하거나 구별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왕조시대의 궁궐 문화나 궁궐 언어들이 서민들에게 쉽게 이해되지 못한 것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임금의 변을 ‘매화’라고 하였던가? 당시의 논리가 충분히 납득은 되지만 현재의 나에게는 왠지 탐탁지 않다. 이런 단어를 알아듣고 이해하는 것도 그렇지만, 이런 단어를 만든 사람은 자신의 본성을 어디에 팔았을까? 하는 측은함이 밀려오기도 한다. 이미 오래전에 장자는 이런 행태를 사람의 본성을 팔아먹는다고 조소했다.

왕조시대의 어느 날이다. 궁궐의 한쪽에서 근무복을 입은 사람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모여있다. 꽃의 색깔이 진하다, 연하다, 꽃잎이 단단하다, 약하다. 다름 아닌 임금의 아침 용변을 나름 세밀히 살피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우연히 그곳을 지나친다면 황당한 표정도 모자랄 것이다. 단순히 ‘매화’를 ‘똥’이라는 단어로 바꾸면 모든 것이 이해된다. 물론, 당시의 사람들은 그들의 그 행동들이 의미가 크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 감춰진 인간의 이기심은 요즈음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경전이나 경서 속의 단어들도 우리의 일상 단어들로 바꾸면 좀 더 이해하기 쉬울 수는 있다. 하지만 모든 경전을 일상 단어들로 바꾼다고 해서 우리의 일상이 많이 변할 수 있으리라는 장담이 쉬운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일상의 뜻이 비슷한 단어들을 묶어서 하나의 단어로 설명하는 방식이 인류문명을 더 발전시켰을 수도 있다. 다만 개인으로서의 나의 삶을 어려운 단어들로 설명하려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은 확고하다. 가끔 어렵게 설명해 놓은 차원들을 나의 일상 단어들로 바꿔서 생각하는 연습을 한다. 그러한 생각이 마음에 들면 그곳에 머물러 숨을 고른다. 아니면 다른 곳을 기웃거리면서 다음 인연을 기다린다.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을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많다. 선불교 선승들의 화두들을 참구 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말이다. ‘글로써 쓸 말도 없고, 별도로 전하여 가르칠 것은 없다’고 새긴다. 결론은 이 소리 저 소문에 쓸리지 말고 스스로 깨우치라는 말이다. 스승과 제자가 몇 년 동안 함께하고 나서 제자가 떠날 때, 마음에 새길 한마디를 요청하는데 이렇게 말하면 왠지 서운할 것 같다. 이러한 방식이 그쪽의 방법이라면 달리 할 말은 없다.

고등학교 시절에 이 한자 성어를 배울 때 선생님은 ‘행간을 살피고 읽어라’라는 말을 같이 해주었다. 행간. 활자화된 글의 줄과 칸에 쓰여지지 않고 나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뜻을 살피라고 했다. 이건 더 어려웠다. 요즈음은 이 말과 비슷한 말이나 장면을 마주치면 ‘몸짓언어’를 떠올린다. 사람의 몸짓에는 다양한 뜻이 담겨 있지만 완전히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사람들은 눈빛, 얼굴의 안색, 손짓, 몸짓, 발짓 등에서 쏟아져 나오는 언어들 속에서 많은 것들을 얻어내고 소통한다. 오히려 소리를 통한 말이나 활자로 된 문자들보다 ‘몸짓언어’로 소통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하기도 한다. 이것은 ‘눈치’를 본다거나 ‘눈치’를 살피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다. 만약 이러한 경험이 있었다면 나와의 소통을 무심결에 지나친 것이다. 이 경험을 잘 살피면 일상을 대하는 자세가 좀 더 여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불립문자 교외별전은 항상 붙어 다니면서 화두 아닌 화두로 나의 개인 일상을 따라다녔다. 선승들이 화두 속에서 얻은 것들을 글로 적으려고 할 때 문자 속에 담지 못하는 것들이 있는데, 그 속에 문자들로 전하려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들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다녔다. 물론 나만의 해석일 따름이다.

어떤 선승이 수행을 위해서 먼 길을 나섰다. 어떤 산속을 지나가다가 암자를 발견하고선 ‘주인 있냐?’고 소리쳤다. 선승들은 왜 이리도 무례한 것일까? 혹시 여기에도 글로서는 전하지 못하는 뭔가가 있는 것일까? 어쨌든 소리를 들은 암자 주인이 문을 열고 주먹을 들어 보이고는 문을 닫아버렸다. 우리는 당황스럽다. 그러나 지나가던 선승은 개의치 않고 가던 길을 간다. 그러다 이 선승이 다른 암자를 발견하고는 ‘주인 있냐?’고 또 소리쳤다. 같은 계통의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별로 험악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같은 계통의 운전을 하는데 그렇게들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는지 안타깝기는 하다. 이번에도 암자 주인은 주먹을 들어 보이고는 문을 닫는다. 매번 소리를 치니 대접이 소홀한가 보다라고 생각할 찰나에 지나가던 선승의 말이 터져 나온다. 둘 중 하나는 물이 얕아서 배를 댈 수가 없고, 하나는 물이 깊어서 자유자재로 놀 수가 있겠다고 한다. 문자로 전해지는 이 이야기는 도무지 알쏭달쏭하다. 마치 나의 엉덩이에 매화꽃이 핀 느낌이랄까?

어쩌다가 먼 곳으로 운전을 하게 되었다. 농사일을 하다가 나선 길이니 나의 몸짓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발산되고 있었을 것이다. 예정된 일을 마치기 위해서 끼니 시간을 늦춰서 배가 고팠으나 식당을 들르기가 꺼려졌다. 나의 몸짓언어는 다른 이들을 불쾌하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한계상황이 닥쳤을 때 염치 불고하고 한 식당에 들어섰다. 많지는 않았으나 식당 안에는 손님이 몇 있었다. 그들의 곁눈질하는 시선을 애써 외면하고 자리에 앉았다. 최대한 여유 있는 표정으로 국밥 한 그릇을 주문해서 맛나게 먹고 나왔다. 갈 길은 멀지만 초조하지 않으려고 천천히 자동차 문을 여는 순간 보이지 않았던 것이 스쳐 갔다.

화두를 통한 공부에는 핵심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잡다한 것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라 모든 것을 한 번에 느끼는 것이라는 것을. 언제부터인가 대부분의 식당은 물의 영어단어를 셀프(self)로 바꿔놓았다. 그렇지 않은 곳은 작은 물통과 컵을 가져다준다. 이날 할머니도 물통과 컵을 내가 앉은 식탁에 내려놓고 갔다. 내가 차 문을 열면서 본 것은 할머니가 식탁에 작은 물통과 컵을 내려놓으면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게 내려놓았던 순간이다. 할머니의 표 나지 않던 그 몸짓이 나의 화두 속으로 들어온 것이었으나 그 순간에는 알지 못했다. 밥 한 상 차려주고 곁눈질로 조용히 지켜보는 그 눈길 속에는 말로 전하지 못하는 뭔가가 있었다. 국밥 한 그릇을 먹는 약 30분 동안 할머니의 오래된 식당 내력을 모두 본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이다.

불립문자 교외별전의 최종 종착지는 ‘나’이다. 이 한자 성어는 그 ‘나’로 가는 도구일 뿐이다. 그 속에 뭔가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고 여기에 매달리면 ‘나’로 가는 길은 점점 희미해질 뿐이다. 우리의 ‘몸짓언어’는 상대방과의 소통에서만 파악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와의 소통에서 파악되어야 함에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짙다.

내 몸과 동일시되는 물건들이 있다. 사람들은 옷, 신발 등을 소중히 여긴다. 그러나 잠시 스쳐 가는 많은 물건들은 소홀히 취급한다. 모두가 그러하며 나 또한 예외일 수는 없다. 할머니와의 인연 이후로 나는 조금 달라졌다. 특히 나의 몸을 잠시 스쳐 가는 물건들에 대해서 조용히 대한다. 이것이 뭐 그렇게 특별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번 해보길 권한다. 마음이 참 차분해진다. 문을 쾅 소리 나지 않게 닫기, 신발을 땅에 끌지 않기, 물건을 빼낸 택배 상자를 던지기 않기.... 자신을 살피면 보이는 것들이다. 화두를 일상으로 끌어내린 나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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