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찻잔

by 길은연

그러니까 내가 국민학교 시절 내 눈엔 세상 모든 게 새롭고 신기한 것 들 투성이었다. 어느 날 우리 동네에 살다가 이사 간 친구 엄마가 우리 집에 놀러 오셨다. 손에는 미군부대에서 나온 물건들이 한 보따리 들려있었다. 친구 아버지께서 비 오는 날 퇴근길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나서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다. 그 시절엔 미군 PX 물건을 파는 게 불법이지만 삼 남매를 키워야 하는 엄마는 미군부대에서 물건을 떼다가 팔아서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다가 옛 동네에 한번 오셨던 것일 게다. 내가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오니 마루에 커피며 햄 버터들이 놓여있었다. 친구 어머니는 우리 엄마와 큰소리로 웃기도 하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참을성이 부족한 나는 그분이 돌아가시고 난 후 바로 물건 앞에 다가가 앉아 이리저리 돌려보고 빨리 먹어보고 싶어 안달이 났더랬다. 그러나 엄마는 매몰차게 물리치고는 부엌 찬장으로 가서 높고 깊은 곳에 넣어놓고는 손대지 말라며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손대지 마. 알았지?"

아니 그냥 궁금해서 그러는데 한 번 더 보면 안 되냐고 했지만 네가 먹을 건 하나도 없다며 단칼에 잘라내셨다. 호기심이 많은 난 속으로 생각했다. '어디 보자고요. 내가 뭐 가만둘 것 같아요?' 그러고 나서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생활했다. 그러다 어느 날 엄마가 외출을 하게 되었다. 시간이 꽤 오래 걸릴 것 같은지 나에게 동생들 저녁밥 좀 챙겨주라고 하시며 나가시는 게 아닌가. 비로소 내게 탐구의 시간이 찾아왔다. 나는 씩씩하게 "네" 하고 대답했다.

"동생 밥 차려 주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엄마 걱정하지 마시고 다녀오세요."

믿음이 가는 첫째의 대답에 오늘따라 더 안심을 하시고 집을 나가시는 모습에 내 얼굴에는 엄마에게는 보이지 않는 미소가 음흉스레 얹혔다.


우선 햄을 먹어 봤다. 맛이 이상했다. 이건 뭐야? 처음 느껴보는 맛에 도통 맛있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럼 이건 통과. 다음 버터를 꺼냈다. 버터는 그래도 몇 번 먹어봤기에 밥에 간장과 버터를 넣고 동생들을 불러다가 먹이기 시작했다. 동생들은 모두 맛있다며 만들어준 밥을 다 먹었다. 간장과 버터와 밥을 비벼서 김치와 먹으니 꽤나 맛있었다. 가끔 사다 먹는 버터와는 비교가 되지 않게 고소했다. 그리고 마지막 커피.

커피는 광고에서 봤기 때문에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먹어보기는 처음인지라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잘 몰라서 우선 대접에 커피가루를 한 숟가락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그리고 조금 맛을 봤는데 써서 먹을 수가 없었다. 한약만큼 쓰다. 그래서 설탕을 한 숟가락 넣고 휘휘 저었다. 그리고 맛을 봤다. 그래도 쓰다. 처음보다는 낫지만 그래도 내 입에는 너무 쓰다. 다시 또 설탕 한 숟가락 넣고 휘휘 저어 마셔보니 이전보다는 나았다. 단 맛과 어우러진 커피가 '이런 맛이구나' 생각하고 동생들과 함께 한 대접을 나눠 마셨다. 하지 말라는 짓은 절대 혼자 하면 안 된다. 공범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날 잠을 쉬이 들지 못했다. 엄마는 내가 이렇게 마구 열어본 사실을 알지 못하고 며칠이 지났다. 엄마가 찬장을 열어보고 큰 소리로 나를 부르신다.

"너 이리 와봐. 이거 네가 그랬어? 네가 그랬지."

난 그냥 가만히 있다가 씩 한번 웃고는 냅다 대문 밖으로 도망을 쳤다. 집에서는 엄마가 큰소리로

"아 이렇게 놔두면 어떡하냐고 먹었으면 제대로 잘 닫아 둬야지. 이년아."

'난 먹을 줄만 알지 어떻게 보관하는지 몰라요.' 속으로 크게 대답했다.


얼마 후 난 엄마가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손님이 오셨기에 나름 예를 갖춘 예쁜 잔에 커피를 내오셨던 것이다. 우윳빛이 나는 접시에 얹힌 우윳빛 물결 모양의 클래식한 커피잔이었다. 그 어떤 무늬도 없는 그냥 모양만 화려한 하얀 영국풍 커피잔이었다. 늘 장식장에만 들어있던 잔이 바깥세상에 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 찬장에 숨겨져 있던 커피가 우아하게 담겨있었다. 내 생각에는 저번 커피와는 맛이 다를 것 같았다. 그 잔에 담겨있는 커피가 궁금했다. 손님이 가셨다. 엄마가 배웅을 나가서 나 혼자다. 내 손이 남겨진 커피잔을 잡았다. 조심스럽게 입으로 가져가 아주 살짝 맛을 봤다. 응? 뭐 이래. 다 식은 커피는 저번보다 더 맛이 없다. 설탕도 없이 그냥 마신다고? 다 식은 커피는 담배 냄새 비슷한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커피가 맛이 없는 물이라고 생각하며 더 이상 탐하지 않았다.


여러 번 이사를 다니면서 그 우윳빛 커피잔은 세트에서 하나씩 줄어들었다. 깨지기도 하고 색이 변해 잘 사용하지 않았다. 다른 예쁜 커피잔이 장식장을 채워갔다.

그래도 싱크대 찬장에 그 잔이 남아있는 게 보였다. 그 안에는 동전 몇 개와 나사 같은 것들이 들어있었다. 이제는 커피가 아닌 잡동사니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엄마의 청춘과 함께 그 잔도 늙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