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대통한 날

by 길은연

낮 12시쯤 민수로부터 전화가 왔다. 영란은 핸드폰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심드렁하게 전화를 받았다. 시험에 합격했나 보네라고 생각하면서 "여보세요?" 하고 말을 했다. 그러자 예상대로 약간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나 시험에 합격했어. 그것도 100점으로 말이야. 내 평생에 100점을 받아 보기는 처음이네." 이미 예상을 하고 있었던 영란이지만 기쁨에 들뜬 목소리에 같이 기분이 좋아졌다.

"잘했어. 고생했어. 축하해. 그럼 언제부터 출근인데?"

"음. 2월부터 출근이야."

"잘 됐다. "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는 오랜만이다. 대기업에 다니다가 하지 말라는 사업을 했고 사업이 점점 어려워 지자 민수는 영란이 앞에서 자꾸만 자신감을 잃었다. 영란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밀어붙였던 사업인데 몇 년이 지나자 사양사업으로 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접으라는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미련이 남아 아직도 접지 못하고 겨우 끌고 가고 있었다. 가장 노릇을 못하니 자존심 강한 민수는 가족들에게 얼굴을 들지 못했다. 직원들을 모두 내보내고 혼자서 겨우 버티고 있는 상태인데 거래를 이어오던 각 관공서에서는 예산이 없다며 공사를 미루기 일쑤였다. 그러자 매일 쉬는 날이 늘어나고 이제는 무슨 일이든 해야만 했다.

다행히 하던 일과 비슷한 일자리가 소개로 들어오자 이력서를 넣고 교육을 받았다. 하루 교육을 받고 시험에 통과해야 하는데 점수가 모자라 불합격을 했다고 했다. 그 사실을 모르고 계속 기다리기만 하던 민수는 회사에서 출근하라는 전화만 기다리고 있었다. 답답한 영란은 왜 출근하라는 전화가 없는지 회사에 알아보라고 다그쳤다. 하는 수없이 민수는 회사에 전화를 했고 점수가 부족해 시험에서 떨어졌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제야 다시 교육을 받고 시험을 본 것이다. 그리고 시험에 합격했다고 전화로 알려왔다.


열흘 전. 민수는 불합격한 사실을 알고는 암담해졌다. 창피하기도 하고 자신이 너무 무능력해 보여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무슨 수라도 써봐야 했다. 민수는 큰 딸 수정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한테 전화해서 절에 같이 가지고 ...

수정은 영란에게 전화해서 "아버지가 절에 같이 가자고 하는데 같이 가실래요?" 하고 물어왔다.

영란은 내키지는 않지만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셋이서 진관사에 갔다. 절에 올라가는 길에는 얼음이 언 계곡과 길 옆 곳곳에 녹지 않은 눈이 조금씩 남아있는 것이 보였다. 대웅전에 들어가 공양미를 올리고 영란이 108배를 하는 동안 민수도 영란의 기도에 맞춰서 함께 108배를 했다. 영란이 민수를 보니 한없이 간절하게 보인다. 얼마나 간절하면 저렇게 절을 할까? 부처님도 민수의 기도를 모른척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절을 마치고 나와서는 칠성각과 나한전에 들러 삼배를 올리고 내려왔다. 민수는 정말 간절하게 절을 올렸다. 수정은 영란에게 속삭였다. " 어머니. 아버지가 절하시는 모습이 아주 간절해 보였어요." 영란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다.

민수는 점심을 사주고 싶었다. 가장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크지만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근처 백반집으로 가자고 했다. 하지만 영란은 단호하게 싫다고 말한다.

"난 거기 싫어." 민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러자 수정이 자신이 점심을 사겠다고 말하고는 고기뷔페로 가자고 했다. 민수는 못 이기는 척하며 수정이 말하는 곳으로 내비게이션을 찍고는 차를 몰았다.

셋이서 점심을 맛있게 먹고 나서 민수는 밖으로 나가 담배를 한대 피웠다. 지금은 사정이 이렇지만 곧 다시 좋아질 거라며 자신을 위로했다. 영란이 자신과 함께 절에 가 준 것만도 고마웠다. 언제나 영란의 말은 맞았다. 듣고 싶지 않고 믿고 싶지 않지만 항상 그랬다. 영란의 말을 무시하고 자신의 뜻대로 일을 진행했다가 결과가 좋지 않은 게 이게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처음 몇 번은 그럴 수도 있지 뭐 그렇게 생각했지만 실패하는 횟수가 점점 늘어 갈수록 이혼을 당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절에 다녀온 뒤 영란은 민수가 걱정이 됐다. 매일 전화로 밥은 먹었는지 아프지는 않은지 물어봤다. 꼴도 보기 싫다고 말은 하지만 절에 다녀온 후로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목요일에 시험을 본다고 들었다. 영란은 저녁마다 기도를 했다. 민수가 시험에 합격하게 해 달라고...

그리고 목요일 합격했다고 전화를 받은 것이다. 영란은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감사 기도를 올렸다.

영란은 평생 살면서 민수가 책을 보는 모습을 못 봤다. 늘 누워서 TV만 보는 모습만 보여줬다. 영란이 책을 읽고 있으면 "책이 재미있어?" 하고 물어보곤 했다. 자신과 함께 놀아주지 않아서 심심하다는 표현을 마구 해 댔다. 책은 학교 다닐 때 보고는 담을 쌓고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엔 열심히 공부를 했는지 시험에서 만점을 받았다. 민수는 기분이 너무 좋아 이말 저말 마구 쏟아냈다. 갑자기 가장의 이름이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내가 가장이다.

영란은 모르는 척하며 민수의 과장된 목소리와 행동을 기쁘게 받아줬다. 영란이 웃어줬다. 오늘은 민수가 운수 대통한 날이다.

작가의 이전글정조와 후원을 거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