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마지막 수요일.
절에 함께 다니는 보살님과 창덕궁으로 나들이 갔다.
추석이 훨씬 지났는데도 날씨가 덥다.
시기로는 단풍이 곱게 물들어야 하지만 올해는 여름 해가 꾸물거리며 남아있는 통에 아직 단풍이 들지 않았다. 단풍 구경을 온 나로서는 아쉽기 그지없다. 후원은 비원으로도 불렸었다. 아주 오래전에 왔었지만 그땐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고 뛰어다니기만 했었다. 미리 후원 입장권을 구입하고 가을 햇살을 받으며 창덕궁 구석구석 돌아봤다.
평일인데도 사람들이 꽤 많았다. 한복을 입고 들어온 외국인들도 보였고, 일본 학생들로 보이는 단체 관광객들도 보인다.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친구들과 함께 오셨는지 웃음꽃이 만발이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백인 여성은 나의 예쁘다는 칭찬에 고맙다고 부끄러워한다. 정말 예쁘다.
창덕궁 옆에 있는 창경궁에 예쁜 곳이 많아 사진을 몇 장 찍고 후원에 들어가기 위해 한참을 기다렸다.
맨 마지막 시간밖에 없어서 오래 기다려야만 했다.
드디어 입장 시간이 되어 후원 해설자의 안내를 받으며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서쪽으로 기울어가며 보내주는 햇살이 마음을 가라앉혀준다. 일행이 한 20명쯤 돼 보인다. 해설을 들으며 열심히 쫓아다녔다. 해설하시는 여성분의 설명이 귀에 쏙쏙 들어온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 속에 나오는 장소이기 때문에 전각 하나하나의 이름이 낯설지 않다.
정은궐 작가의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에 나오는 장소이다. 정조대왕과 아끼는 젊은 신하들과의 대화가 들리는 듯하다.
규장각, 홍문관, 궐내각사, 검서청, 부용지, 주합루, 애련지, 춘당지, 영춘문, 집춘문...
이 장소들에서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상상하며 열심히 설명을 듣고 사진을 찍어 기록했다. 정조 임금이 특별히 사랑하는 각신들과의 대화와 움직임 속에 내가 들어가 있는 느낌이다.
책을 읽으며 상상했던 곳에 내가 서 있다니...
부용지에서 왕과 신하가 나누는 대화가 들리고, 천천히 걸었을 왕의 발걸음과 고뇌가 가득한 얼굴이 바로 앞에서 보이는 듯하다.
이몽룡이 과거 급제를 했다던 영화당 앞 마당도 보았다. 애련지에 연꽃은 없지만 정자가 아름답다.
늘 가야지 하는 마음을 간직만 하고 있다가 보살님의 제안으로 걸음을 했는데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작년에 단풍 사진을 찍으러 왔었는데 단풍이 너무 예뻐서 나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보살님은 취미로 사진을 찍으시는 분이다. 작년에 찍은 단풍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천상세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런데 이번 가을엔 날씨가 더워 아직 단풍이 들지 않아 아쉽다고 했다.
하지만 난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정조 임금과 후원을 산책했기 때문이다. 내가 감히 왕을 만날 수나 있었겠나. 하지만 하도 많이 읽은 책 덕분에 내가 전각을 지을 때부터 있었던 느낌이다. 책을 구입한지 12년이 지났다. 그리고 스무 번은 더 읽었을 것이다. 우울할 때마다 꺼내 읽고 조심스럽게 보관해 오는 사랑하는 책이다. 급제한 유생들의 이름들 중에서 눈에 들어온 이름 하나로 이야기를 만들어 낸 작가님을 존경한다.
내 상상 속에 그린 왕의 모습은 드라마에서 보는 꽃미남 왕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내가 그린 왕은 잘 생긴 모습보다는 카리스마 넘치는 차가운 왕이다. 현재 아무도 그의 모습을 아는 이가 없으니 나는 내가 상상하는 왕으로 사랑할 것이다.
내가 왕을 만났다면 무슨 말을 했을까? 어떤 질문을 받았을까? 나는 왕의 얼굴을 볼 수나 있었을까?
하루 종일 걸은 걸음수가 2만 보를 훌쩍 넘겼다. 발이 아프다. 하지만 마음은 행복했다.
아직 물들지 않은 단풍은 아쉽지만 내년에 다시 볼 수 있으면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