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랜B가 있는 삶인가?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유달리 가방이 가벼운 느낌이었다. 수업에 필요한 카메라와 삼각대를 챙기지 않았나 싶어서 가방을 열어 확인해보니 들어 있었다. 그냥 괜한 느낌이었을까? 찜찜한 마음을 뒤로하고 서둘러 수업을 하러 차를 타고 이동했다. 오늘은 수업 후 상담까지 있는 날이라 상담 자료를 출력하는데 프린터기가 애를 먹여서 조금 늦은터라 마음이 급했다. 이럴 때일수록 신호등은 더 자주 걸린다.
정차하고 있는 동안 오늘 수업할 장소를 확인하기 위해 가방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러나 난 꺼내지 못했다. 그때서야 아까 가방이 가벼웠던 느낌이 괜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미 집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예전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는 주소록을 가방 속에 넣어두기도 하고, 차에도 별도로 한 분 더 비치해두었는데, 그러고보니 스마트폰 일정표를 이용하고 나서는 그 일을 그만두었다.
다행히 목적지 근처에 공중전화가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거기에 가서 집에 전화를 해서 아내에게 물어보면 될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놓였다. 아 그런데 문제는 공중전화에 넣을 동전이 하나도 없었다. 만날 카드만 사용하다보니 돈을 갖고 다닐 이유도 없고, 게다가 있다해도 지폐뿐이니 동전이 있을턱이 없었다.
한순간 막막했으나 콜렉트콜 - 수신자부담 전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게 지금도 되나 싶기도 했고, 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불안했지만 스마트폰이 없으니 검색도 해볼 수 없었다.
서둘러 공중전화 근처에 주차를 하고 뛰어갔다. 다행히 전화기 옆에 안내가 붙어 있었다. [긴급버튼 + 1541 + 상대방 전화번호] 그런데 몇 번을 시도해도 계속 '주화 또는....넣은 후 다시 걸어' 안내 음성만 들릴 뿐이었다. 마침 지나가는 분이 계셔서 그 분께 전화 좀 한 통화 할 수 있게 빌려달라고 부탁을 할까 싶었지만 코로나19 시국에 그런 부탁이 가능할까 싶기도 하고, 또 피싱으로 오해 받을 수도 있어 여의치가 않았다.
다행히 근처에 상가가 있어서 일단 달려갔다. 어느 가게에 들어가서 부탁을 드릴까 했는데 문방구가 눈에 들어왔다. 서둘러 들어가서 다짜고짜 천 원을 내밀며 제일 싼 볼펜 한 자루 주세요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아저씨가 잔돈을 500원짜리로 주려는 순간
"죄송하지만 100원짜리 동전으로 부탁드려요."
아저씨는 이상하다는 듯 한번 날 쳐다보고는 말없이 100원짜리 일곱 개를 건네 주었다. 그래서 난 모나미 볼펜이 요즘 300원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행히 조금 늦게 도착해서 수업도, 상담도 할 수 있었다. 스마트폰이 없으니 시간도 제대로 몰라서 답답했지만 아이들 스마트폰이 있어서, 아이들이 수업 끝나는 시간은 귀신같이 챙기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다.
스마트폰에 모든 정보를 다 담아서 사는 세상이다. 덕분에 엄청 편리해졌지만 그 스마트폰이 없어진다면 난 어떤 플랜B를 갖고 있을까? 정보의 집중이 갖는 편리의 반대는 위험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것이다.
예전에는 자동차 키도 2개가 있었던 것 같은데 스마트키는 한 개 뿐이다. 만약 스마트키를 분실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벌어지지도 않은 일, 벌어질 가능성이 별로 없는 일에 대해 대비하며 사는 것이 현명한 것인지? 그냥 무시하고 사다가 벌어졌을 때 적절하게 해결하면 되는 것인지?
한때 일본이 재고를 쌓아두지 않고 그때 그때 조달하는 회사 시스템으로 혁신을 이뤄 성장 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그런 시스템이 재난 등 뜻밖의 상황에 전혀 대처하지 못함으로 일시에 무너져 내린 일이 있었다. 결국 뻔한 이야기이지만 공짜는 그 어디에도 없다.
결국은 선택의 문제이다. 다만 효율, 집중으로 우리 사회가 나 자신이 너무 경도되어 있지 않은지 점검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플랜B는 A가 유효하게 작동할 때는 낭비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낭비적 요소가 사실은 A의 안전판 구실을 할 수 있다.
플랜B가 적절하게 갖춰진 사회가 조금은 더 안심하고 살 수 있고, 여유로운 사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