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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배 May 11. 2021

짐승보다 사람이 무섭다(?)

호젓한 산길을 걷는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산 대신 사람들 발길이 뜸한, 풀숲이 우거진 길을 찾아 걷는다.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않아서, 오르막 내리막이 가팔라서 한가롭지는 않지만 그래도 마스크 벗고 숨 마음껏 내쉬고, 들이마시며 걸을 수 있어 좋다. 


이런저런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이어폰을 꽂지 않고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어도 좋다. 그렇게 한발 한발 내딛으며 비 그친 뒤 5월의 푸르름을 만끽한다. 한 시간 여 산행 동안 한 사람도 만나지 않았다. 사람이 없다는 것이 이렇게 큰 기쁨일 줄이야.


그렇게 여유를 만끽하며 걷는 길, 그때 저 앞에서 말소리가 들린다. 깜짝 놀라 전방을 주시하니 몇 사람이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 난 깜짝 놀라 자리에 멈춰 섰다. 그 무렵 그분들도 놀라는 기색이 역력하다. 나는 허둥지둥 주머니를 뒤졌다. 윗옷 주머니에 없다. 서둘러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았지만 잡히지 않다. 순간 어떻게 해야 하나 당황스러웠다. 우선 급한 대로 길 한쪽으로 비켜서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계속 손으로는 더듬거리며 찾기를 계속했다.

마침내 가슴에 달린 주머니에서 마스크를 발견하고 황급히 마스크를 썼다.


내게 다가오던 한 분은 들고 계신 부채로 입을 가렸고, 또 한 분은 마스크를 반쯤 걸쳤고 그렇게 그분들도 이야기를 멈추고 서둘러 내 옆을 통과해갔다.


산행길에서 만난 분들께 반갑게 인사하는 것이 에티켓인데 어느새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경계하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옛 어른들 말씀에 산에서 짐승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고 한 말은 사실 가난하던 시절 '산적'이 출몰해서 재물을 빼앗고, 사람을 해쳤기 때문일 것이다. 산적이 사라진 시대에 여성들은 아직도 혼자 산행이 두렵다. 이른바 '관악산 발발이' 등 산에서 일어난 성폭행 사건 등으로 안전이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산적도, 발발이도 아닌 모두가 두려운 세상이 되어 버렸다. '코로나 19'의 잠재적 전파자라는 서로에 대한 경각심 때문이다.


백신 예방 접종이 한창이다. 대통령은 긴 터털의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며 조금만 더 협조해달라고 당부했다. 앞으로 6개월 후면 집단면역이 달성되고 그러면 코로나 19로 인해 사람들을 경계해야 하는 일들은 사라질 수 있을까?


그런데 과연 코로나 19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를 경계하는 것일까? 코로나 19로 경계심이 확산된 것일 뿐 우리 사회는 서로에 대한 불신이 강한 사회가 된 것은 아닐까? 치열한 경쟁 속에서 내가 살기 위해서는 너를 짓밟고 올라서야 한다는 의식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면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되어 버린 사회 속에서 우리는 이미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치열한 경쟁은 사회적 히스테리를 증가시키고 그로 인해 약한 고리에서 폭발한 분노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범죄로 이어져 우리는 불안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한 악독한 개인의 일탈로 봐야 할 것인지? 아니면 사회구조적 문제에 기인한 현상인지? 그 진단에 따라 해결책도 달라질 것이다.


분명한 것은 악순환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범죄로 인해 경계하고, 혐오하고 그로 인해 누군가 또 소외되고 그가 다시 범죄를 일으키는 악순환. 그것은 엄한 처벌과 개인의 신변보호 강화 만으로 해결될 수 없다. 사회 공동체가 서로에 대한 총, 칼을 거두고 손을 내밀어 체온과 마음을 나눌 때, 치열한 경쟁 대신 협력으로 사회적 스트레스를 감축시킬 수 있을 때 비로소 안전한 사회가 가능해질 것이다.


코로나 19 탓으로 가려 놓은 사회적 불신의 장벽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을 누군가는 해야 한다. 그 누군가가 나부터이어야 한다. 


비록 마스크를 황급히 썼을지라도 산에서 만난 이들에게 반갑게 인사 건넬 수 있어야 했다. 다음에는 꼭 그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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