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은 당연한 권리이다.
중3 때였다. 소풍 장기자랑 대회 사회를 맡게 되었다. 함께 사회를 보게 된 여학생과 첫 만남에서 뻘쭘한 분위기를 깨겠다고 건넨 말이
"안경이 참 예쁘다."였다..
그러자 그 여학생은
"안경도 참 예쁘다"라고 말해야 한다고 알려줬다.
그래도 "안경은 참 예쁘다'라고 말하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어찌 되었든 난 그 여학생 때문에 '보조사'에 따라 글의 의미가 얼마나 달라지지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기본소득을 둘러싸고 이재명 경기지사와 윤희숙 의원이 연일 논쟁을 벌였다.
올 6월 초에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비지트 배너지 교수의 '기본소득'에 대한 입장을 두고 한바탕 설전을 주고받았다.
'얼토당토' (희망의 책 독서토론 모임)에서 아비지트 배너지 교수의 '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 책을 가지고 다음 주 토론을 하기로 해서 500여 쪽에 달하는 책을 여러 날에 걸쳐 겨우 완독 했다.
사실 논쟁이 되고 있는 부분은 9장 '돈과 존엄'편의 일부이다.
508쪽에서 배너지 교수는 '미국에서도 보편 기본소득이 해답이 될 수 있다.'라고 분명히 적고 있다.
이 구절만 보면 이재명 경기지사의 승리이다.
그런데 513쪽에서는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여겼던 많은 사람들이 직업을 통해 얻었던 자존감을 상실한 것이 부유한 나라가 처한 위기의 진정한 속성이라는 우리의 주장이 옳다면, 보편 기본소득은 여기에 답이 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또 515쪽에서 '미국에서 현 경제 모델이 야기한 교란을 보편 기본소득이 해결할 수 없다면 무엇이 해결할 수 있을까?'라고 말함으로 윤희숙 의원의 주장 역시 절대 거짓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배너지 교수는 결국 기본소득이 갖는 여러 장점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만 기본소득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은 해석 아닐까?
배너지 교수는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때로는 돈보다 위신과 존엄을 원한다라고 책에서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배너지 교수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기본소득은 시혜성, 복지성 정책이 아닌 공통부에 기반한 권리라는 주장이다.
기본소득은 가난해서, 일자리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라는 측면에서 이 책에서 배너지 교수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내용과 일맥상통한 측면을 갖고 있다.
또한 기본소득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며 기본소득을 바탕으로 여러 긍정적인 효과를 도출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기본소득 논쟁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기본소득을 기존 복지체제를 개편하는데 주안점을 둔 '우파형 기본소득'을 바탕으로 토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본소득은 우리가 얻는 모든 수익은 개인의 노력에 기인한 부분 말고도 사회 공동체 모두의 것에서 나오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 부분에 대한 몫을 사회 공동체 모두에게 지급하자는 것이다.
기존에 '세금'을 내고 있지 않느냐고 하는데... 그 '세금'은 사회 공동체 유지를 위해 필요한 비용을 형편에 따라 분담하고 있는 것일 뿐 공유부에 대한 정당한 지급은 한 번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부모로부터 '상속'을 받는 자녀가 있다고 보았을 때, 자녀라는 이유로 1/n을 하는 것이 기본이다. 거기에 부모 재산 형성에 기여도, 부모 봉양의 정도에 따라 개인별 조정이 가능하다. 그리고 장례비용 등을 자녀 형편에 따라 지불해야 한다.
여기서 바로 자녀라는 이유로 1/n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바로 사회 구성원이라는 이유만으로 '몫'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공유 부이다. 부모 재산 형성에 기여한 자식 개개인의 노력이 바로 오늘날 각자의 몫이다. 그리고 장례비를 형편에 따라 나눠서 내는 것이 공동체 유지를 위한 세금을 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그동안 개개인의 기여와 공동체를 위한 세금만을 내었을 뿐 원래 존재하는 공동부에 대한 각자의 몫에 대한 지급이 이뤄지지 않았었다. 그것을 발견하고 요구하는 것이 '기본소득'이다.
그러한 '기본소득'이 지급되었을 때 여러 효과가 발생하는 것인데 그 효과를 둘러싸고 여러 논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효과 이전에 당연한 권리로서 '기본소득' 지급이 우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