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에서현장으로] 취재에세이 <따듯한 이가 가는 길은 외롭다> 1화
(이 글은 전태일 평전을 바탕으로 쓰였다. 책에서 인용된 부분은 굵은 글씨로 표시하였으며 밑줄이 그어진 것은 전태일 열사의 글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평전의 저자인 조영래 변호사의 글이다. 혹시 이 글이 처음인 독자라면 <따듯한 이가 가는 길은 외롭다> 서문을 먼저 읽으시기를 권해드린다.)
1970년 초겨울,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동대문 평화시장 앞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불길은 횃불이 되어 외쳤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지나치게 담백한 우리 교과서는 불길로 타오른 전태일을 이렇게 적어 놓았다. '1970년 평화시장의 재단사였던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분신하였고 이 사건을 계기로 노동 조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졌다.' 이 문장을 쓴 사람은 '사건'에는 관심 있지만 '사람'에는 요만큼의 관심도 없는 것이 분명하다. 전태일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질문이 생긴다. 역사공부는 우리 공동체, 더 나아가 나를 향한 관심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제도권 역사 교육은 이게 최선인 걸까? 오늘도 지식인이라며 방구 좀 뀌는 교육계 사람들은 교육받는 아이들에게 관심이 있긴 한가? 그래서 다르게 접근했다. 교과서에 적힌 딱딱한 기록에 그치지 않고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생생한 숨결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를 주목한다. 다른 세상 사람이 아니라 우리 세상 사람으로 그를 짚어보자. 모두를 다룰 순 없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
전태일은 이상한 사람이다. 그는 평생 배고픈 사람이었다. 하루 15시간에 달하는 노동에 매일같이 시달리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굶는 대신 동료들의 배고픔을 채워주었고 지친 어린 여공의 일도 감당했다. 그는 진지한 사상가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책상에 갇혀 있지 않았다. 미소 한 번 짓기 어려운 현실에서 유쾌함과 약자를 향한 다정함을 잃지 않았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잠시 남대문초등학교와 청옥고등공민학교(고등공민학교란 가정 사정 등으로 중학 과정을 배우지 못했던 학생들이 다니던 학교다.)를 다닌 것이 전부지만 그가 수기에 쓴 문장들은 그의 제도권 학력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담백하고 싱싱하다. 또한 행동과 함께 나날이 성장하는 그의 사상은 어느 철학자의 그것보다 깊다. 전태일의 이토록 멋진 이상함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전태일은 여섯 식구의 장남이다. 그의 가정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가난을 빼곤 말할 수 없다. 그가 어릴 적 아버지인 전상수의 사업 실패와 실직에 따른 가정분위기는 이러했다.
그 지루하고 짜증 나고 불안하고 초조한 생활. 그 생활에 으레 껏 따르는 폭음과 주정, 자학과 좌절, 부부싸움과 부자간의 불화, 그 숨 막히는 절망... 굶주린들 무엇으로 배를 채울 것인가? 병이 든들 어디 가서 치료를 받을 수 있겠는가? 자식이 자란들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30p
전상수는 폭음과 매질을 일삼았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열심히 살고자 했다. 아내와 자식을 향한 그의 비인간적인 행동은 도저히 못 봐줄 정도다. 그러나 그것을 그의 됨됨이의 문제라고만 보기엔 무리가 있다. 겨우 일자리를 찾아 돈을 벌면 사기꾼이 주변에 득실거렸고 1960년대의 현실은 태일 가족에게 절실히 두드려도 전혀 열리지 않는 문이었다. 어머니 이소선과 장남 전태일은 돈벌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아이들이 다 하는 데 나라고 못할 것이 어디 있나?"33p 어린 태일은 굴하지 않는 기질을 갖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신문팔이와 구두닦이는 그가 노동시장에 내딛는 고통스러운 첫 발이었다.
생계를 이어보려 시작한 일이었지만 어린아이의 일이 큰 도움이 될 리 없었다. 이미 자리를 잡고 있던 다른 아이들의 텃세를 견뎌내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아지지 않는 생활에 좌절한 태일은 방황을 거듭하고 가출하기에 이른다. 그 시간 속에서 그가 지불해야 했던 대가는 있었지만 공짜는 없었다. 약 1년간의 가출은 자존심까지 내놓아야 하는 생활의 연속이었지만 그 생활은 그를 성숙하게 만들고 있었다.
무엇엔가에 이끌려 또는 떠밀려 거기까지 온 우리들을 가로막고 버티고 선, 저 완강한 철조망 앞에서 어떤 사람들은 풀 죽어 되돌아 선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넘는다. 아니, 넘을 수밖에 없다.
철조망, 그것은 법이다. 질서이다. 규범이며 도덕이며 훈계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억압이다. 겹겹이 철조망을 둘러치고 그 속에서 무엇인가를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은, 철조망을 넘어서려는 사람을 짓밟고 그 쓰러진 얼굴에다 침을 뱉는다.
철조망을 넘는 과정은 무뢰한으로 전락하는 과정, 법과 질서의 테두리 밖으로 고독하게 추방되는 과정, 양심과 인륜을 박탈당한 비인간으로 밀려나는 과정이다.
그것은 동시에 인간으로 회복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것은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그 어떤 법률과 질서와 도덕과 훈계로도 가로막을 수 없는 자신의 삶의 권리를 주장하는 과정이다. 그것은 철조망 앞에 결박당하여 의식이 마비되기를 거부하는 인간의 생명력, 인간 의지의 표명이다.
차표를 살 돈이 없어 태일은 무임승차를 결심한다. 철조망을 넘는 순간. "죽더라도 서울에서 죽고 살더라도 서울에서 사는 편이 낫다. 돈은 없지만 또 가는 거다. 내가 언제 돈 가지고 다녔나? 승강구에서 좌석 있는 안으로 들어서자 이번에는 뒤쪽 맞은편 도어를 열고 승무원 2명이 기록첩을 들고 오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나는 생각할 틈도 없이 무의식적으로 의자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가슴은 참새처럼 두근거리면서 어서 빨리 승무원이 통과하기만 기다렸다. 내 바로 위에 앉은 할머니는 치마를 밑으로 내려서 나를 감추어주셨다. 나는 할머니의 말없는 인간애에 어머니에게만 맛볼 수 있었던 감정을 느꼈고, 그리운 동생들을 생각할 때 슬픔은 내 작은 가슴을 온통 그리움으로 변하게 했다. 그 무엇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감정을 마음껏 느끼고 있을 때, 기차의 발차신호가 순수한 감정을 빼앗아 가버리고 또다시 차가운 현실에 나를 내동댕이치고 말았다."40p
그렇게 기차에서 내린 태일은 수표원에게 걸릴 위기에 처하지만 수표원은 태일을 쳐다보고는 빨리 가기나 하라고 뒷머리를 밀어버린다. 잡히기에도 쓸데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흩어졌던 가족이 모두 모였다. 1년 간의 가출 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온 태일이 마주한 것은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부단히 일하는 아버지와 고된 노동에 망가졌던 건강을 회복해 가는 어머니였다. 태일은 "힘이 닿는 껏 집안일을 돌보리라고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p.46라며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때 태일은 청옥공민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배움을 향한 열망 앞에 선 태일은 마치 배시시 웃는 소녀 같다.
나는 기초지식이 없어 영어와 수학과목은 이해하는 데 무척 힘이 들었다. 그렇지만 다른 과목은 다 재미있고, 50분 수업시간이 너무 짧은 것 같았다. 정말 하루하루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p.48
"하루하루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누구라도 그보다 안정된 생활을 하는 요즘이지만 저 표현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여러분은 오랫동안 방황과 굶주림과 세상의 험난함을 거쳐온 어린 태일의 짓눌릴 대로 짓눌렸던 작은 가슴이, 청옥에서 배움의 나날을 맞아 얼마나 싱싱하게 자랐는가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p.51
더불어 내일이면 노동의 하루가 또 돌아온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던 태일은 공부를 시작하며 "내일이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나는 내가 살아 있는 인간임을 어렴풋이나마 깨닫고 진심으로 조물주에게 감사했습니다."52p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태일은 그가 그동안 어떻게 지내왔는지 곱씹으며 여전히 그 자리에서 하루를 견디는 그의 이웃들을 떠올렸다.
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감정에는 약한 편입니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언짢아 그날 기분은 우울한 편입니다. 나 자신이 너무 그런 환경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든지 공부를 끝까지 해서 지금도 서울에서 고생하고 있는 친구들을, 그리고 거리에서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5원의 동정을 받고 양심까지도 다 내어 보여야 하는, 언제든지 밑지는 생명을 연장하려고 애쓰는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리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53p
취재과정에서 가장 주의 깊게 다뤄야겠다고 힘을 준 것은 그의 생각이 깊어지는 과정이었다. 처음에는 가족의 안위를 생각하여 조금이라도 더 노력하고자 했다면 이때부턴 어렴풋이 가족의 범위를 넘어 나와 관계없는 사람들의 생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는 태일이 사사로운 보통의 인간에서 따듯한 이가 되어 걷는 첫걸음이었다.
좋았던 시절도 잠시, 태일은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자퇴하게 된다. 가난 때문에 학교를 다니지 못한다는 것은 아이와 부모 모두에게 가혹한 불행이다. 그때라고 달랐으랴. 김소진 작가의 <자전거 도둑>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가정 형편등의 이유로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아이는 교복을 입은 아이를 볼 때마다 자존감에 상처를 입기 일쑤이고 이를 모를 리 없을 부모의 마음이란 것 또한 편할 리 없다. "나라는 인간은 왜 이런 가슴 아픈 일이 많은지 혼자 서러워서 뜨거운 눈물이 줄기줄기 흘러내리고.." 현실에 무릎 꿇고만 태일의 절절한 표현이다. 스스로의 처지에 대한 자기 연민이나 청승이 거의 없던 그였기에 더 가슴이 먹먹해지고 말았다.
공부를 포기한 이후 그는 다시 생계라는 현실 앞에서 발버둥 치는 삶을 살게 된다. 식모살이를 떠난 어머니를 찾고자 서울에 온 태일에게 벌어진 이야기다. 태일은 우산 팔이를 하고 있었다. 건물 창문에서 "우산!" 하며 외치는 한 '부한 환경'의 여자에게 부리나케 달려간 태일. 35원 하는 우산이 마뜩잖았던 여자는 30원으로 깎고자 태일과 실랑이를 벌인다.
"천만에요, 이건 분명히 제가 이제 금방 받아온 거야요."
"변명은 말아! 너희들이 그런 지저분한 변명을 하니까 밤낮 그 모양 그 꼴이야. 이 거지 같은 새끼야!"
그래요, 나는 태어날 때부터 거지예요. 댁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도도한 집에서 태어났고요. 내내 도도하십시오.
우산이 더러웠다한들, 가격이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한들 그 여자에게 화가 난다. 하지만 내내 도도하라는 태일의 말에서 저항정신이 느껴진다. 50년 전의 일화지만 요즘은 또 어떤가. 가난은 개인의 책임이라는 인식이 사회 저변에 깔려 있지는 않은가? 명품, 비싼 저녁식사, 부동산 그리고 학력 등으로 천박한 교양쯤은 쉽게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들의 깊은 마음속에 저 여자의 한마디는 여전히 고고하게 숨 쉬고 있다. 나부터 비워내자고 잠시 숨 돌리며 다짐한다.
조영래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현실이야말로 가장 좋은 교사다. 자기의 심장으로 느끼고 스스로의 머리로 생각할 수 있었던 사람이야말로, 교과서의 해설이나 권위자의 암시를 통하여 왜곡되는 일이 없는 현실의 벌거벗은 모습을 생생히 본 사람이야말로, 현실에서 가장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고 자신의 인간성을 가장 열렬하게 지킬 수 있다." 어린 나이에 겪은 고된 노동과 무시와 천대는 성자라는 말이 어울리는 그의 뿌리를 단단하게 만든 시기였다.
다 같은 인간인데 어찌하여 빈한 자는 부한 자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까. 왜 가장 청순하고 때 묻지 않은 어린 소녀들이 때 묻고 부한 자의 거름이 되어야 합니까? 사회의 현실입니까? 빈부의 법칙입니까?
자본주의의 폐부를 찌르는 그의 질문이 시작된 곳이 동대문 평화시장이다. 당시 평화시장에는 약 2만 명의 노동자가 있었는데 그들의 노동조건은 현저히 열악했다. 옷을 만드는 곳이니 미싱사, 시다, 재단사, 재단 보조가 주를 이루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초보들이 하는 '시다'라는 직업은 미싱사의 보조역할임과 동시에 독립된 노동을 하는 존재였다. 다리미질, 실밥을 뜯는 일, 용품을 나르는 일을 주로 했고 윗사람의 개인적인 잔심부름까지 감당해야 했다. 이들은 모두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12~14살의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작업 도중에 일어나 화장실을 가려고 해도 눈치를 봐야 했고 윗사람의 기분에 따라 야단을 맞아야 했고 별의별 욕설에도 참아야 했고 시답잖은 이유로 매질까지 당해야 했다. 월급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당시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한 월급이었으나 그조차도 나 몰라라 하거나 매우 적은 급여로 노동력을 착취당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일을 마음 편히 그만두지 못했다. 그들은 떠돌이 생활을 하다 범법자의 길로 들어설 것인지 노동지옥에 빠질 것인지 선택해야 했다. 노동지옥에 빠지기로 마음먹은 그들은 성수기에는 각성제를 강제로 먹어가며 일을 해야 했으며 비수기 때는 일감이 없다는 이유로 해고된 상태나 마찬가지로 지내야 했다. 형무소냐, 노동지옥이냐의 고민이라니. 울분이 치밀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전태일은 지긋지긋했던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는 것에 큰 기쁨을 느꼈다.
그들의 노동시간은 하루 평균 15시간에 달했다. 정시 출퇴근이란 개념도, 야근수당이라는 개념도 없었으며 휴일, 휴가의 개념조차 없었다. 여성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직장 특성상 적어도 생리휴가는 보장되어야 했을 것인데 그 조차도 생각할 수 없었다. 사실 그들의 권리를 알려주는 이가 없었다. 작업 환경도 처참했다. 한 층높이를 두 개의 층으로 나눈 작은 방에서 15명의 노동자들이 일해야 했다. 하루 종일 허리를 펼 수 없었다. 전태일 기념관에 가면 작업 현장을 그대로 구현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는데 1.8m인 필자가 앉았다 일어서려 하면 예외 없이 머리를 찧을게 뻔했다. 또 옷가지를 다루다 보면 자연스레 생기는 먼지들은 모두 노동자의 몫이었다. 각종 폐질환에 걸려 있으면서도 증상을 자각하지도 못한 채 각혈을 쏟아낸 노동자가 대다수였고 병에 걸린 걸 알았더라도 치료조차 받지 못했다. 질병에 걸린 걸 알리면 이를 문제 삼아 해고했기 때문이었다. 국가에서 실시하는 정기검진은 2만 명의 노동자 중 두 세명만을 골라 필름도 없는 x레이로 촬영하는 식으로, 검진이라는 단어가 부끄러울 정도였다. 태일이 직접 실태 조사에 나서서 정리한 바다.
재단사 전원이 신경성 소화불량, 만성 위장병, 신경통, 기타 병의 환자.
미싱사 90%가 신경통 환자임. 위장병, 신경성 소화불량, 폐병 2기.
평화시장 종업원 중 경력 5년 이상 된 사람은 전부 환자이며 특히 신경성 위장병, 신경통 류머티즘이 대부분이다.
실태를 자각한 전태일은 억울했다. "한 가지 내가 억울하다고 생각한 것은, 너무 작업이 힘들게 작업시간이 길고 힘에 겨운 야간작업을 시키는 것이다. 공장 안에서는 절대적인 책임자인 재단사의 말이 거역할 수가 없어, 하기 싫은 야간작업을 하고 나면 그다음 날은 평일보다 작업량이 형편없이 떨어지지만, 공장 주인보다 경제적으로 약자인 우리 직공들은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태일은 다른 노동자들의 월급과 노동 조건에 큰 영향을 미치는 재단사가 되어 약한 직공들 편에 서서 정당한 타협을 하리라고 결심한다. 재단사가 되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었다. 재단사가 되기 위해서는 재단 보조 일을 거쳐야 했는데 이는 본래 미싱사로서 받는 월급의 절반정도를 받으며 일해야 했고 그 기간을 버텨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가족들에게 돈 몇 푼을 다달이 보태려 고분고분 죽어지내는 것보다는 이 억압과 불의에 저항하여 무언가 싸움에 나서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깨달았다."라고 말했다. 그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다. 소시민적인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동료들이 지친 기색을 보이면 유행가를 부르며 분위기를 고무시키는 소위 분위기 메이커였다고 한다. 또 어느 시다의 말에 따르면 "그는 시다들에게 매우 친절하게 대하고 정성껏 작은 일이라도 도와주려고 하여 시다들이 모두 그를 상당히 좋아했다고 한다. 그는 시다들의 사정이야기를 찬찬히 다 들어주고 성가신 부탁에도 화 한번 내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의 어머니가 싸주신 풀빵을 시다들이 없는 데서 숨어서 먹거나 시다들에게 그냥 주곤 했다. 시다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그들의 사정을 깊이 알게 되고 그럴수록 그의 따듯한 의지는 강해져 갔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
세상을 보는 눈은 제도권 교육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 직접 보고 듣고 느끼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시선이 깊어지고 진화한다. 그 누구도 돈과 권력으로 돌아가는 그때 그 사회의 생리를 그에게 친절히 알려줄 리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 앞에 주어진 것들에 직접 부딪히고 주변 이들과 교감하며 깨달았다. 평화시장에서 겪던 괴로움이 그에게 남겨준 것은 문제의식이었다. 낭랑 18세에 이성을 향한 호감조차도 스스로 거두어야 했던 그가 마주했던 하루는 이러했다.
끝날이 인생의 종점이겠지. 정말 하루하루가 못 견디게 괴로움의 연속이다. 아침 8시부터 저녁 11시까지 하루 15시간을 칼질과 다리미질을 하며 지내야 하는 괴로움.
허리가 결리고 손바닥이 부르터 피가 나고, 손목과 다리가 조금도 쉬지 않고 아프니 정말 죽고 싶다.
육체적 고통이 나에게 죽음을 생각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고통이 더욱 심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만 없어도 좋겠다. 미싱 6대에 '시다'가 여섯 명. 그 사람들이 할 걸 나 혼자서 다 해주어야 하니. 다른 집 같으면 재단사, 보조, 시아게 잘하는 사람 3명이 해야 할 일을 나 혼자 하니 정말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언제나 이 괴로움이 다 없어지나... 1967년 3월 17일 일기
이러한 생활이 계속되면서 점차로 그는 평화시장에 처음 들어왔던 때의 벅찬 희망과 꿈이, 그리고 재단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던 때의 기대가 모두 이루어지기 어려운 환상으로 변해가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되풀이하지만, 노동자로서의 그의 꿈은 기술을 배워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 학업을 계속하는 것, 그리고 그리하여 '밑지는 생명들'을 위하여 무언가 보람 있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139p
하루하루의 생활에서 '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노동도 '내'가 하는 것이 아니며, 밥 먹고 자고 일어나 출근하는 것도 '내'가 아니다. 참된 '나'는 어디론가 종적 없이 사라져 버리고, 헛껍데기만 남은 나의 육신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이리저리 온종일을 허덕이며 끌려다닌다. 145p
그는 생각한다. 그리고 환멸과... 자기 자신의 나약한 소리를 증오하면서.
인간의 둘레를 얽어매고 있는,
인간이 만든...
인간 본질의 희망을 말살시키고 있는,
모든 타의적인 구속을, (그의 수기)
조영래 변호사는 질문을 던진다. "왜 밑바닥 인생들은 항상 밑바닥 생활을 하게 되는가? 왜 고통받는 사람들은 항상 고통만 받고 있는가?"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진다. 평소 가난은 개인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해 온 당신이라면 조영래 변호사가 내린 답을 읽어보고 부디 오해를 풀어주길 바란다.
고통받는 한 인간의 의식을 살펴보자. 그가 태어났을 때 이미 억눌리는 고통에 찬 현실은 존재하고 있었다. 이 현실 속에서 자라나면서 그는 그 현실이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힘에 의하여 끌려가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고, 사실은 바로 인간이 그것을 만들었다는 것을 똑똑히 보지 못하게 된다. 이 거대한 힘에 비하여 볼 때 자기 자신은 너무나도 약하고 초라하고 무력한 존재로 느껴진다. 조만간에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현실의 사회구조와 질서 앞에 무조건 머리를 수그리고 거기에 '순응'해야만 생존이 보장된다고 느끼게 되며, 따라서 현실 앞에서 위축되고 기가 죽어서 비굴해진다. 현실에 대한 모든 비판은 그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위험천만한 무모한 짓으로 되며, 따라서 자신에 대해서는 불성실하게 되고 나중에는 부도덕으로까지 되어버린다. 그리하여 그는 비판정신의 싹이 자신의 의식 속에 싹트기도 전에 잘라버리고, 사회가 강요하는 모든 명령, 모든 가치관, 모든 선전을 무조건 받아들여 '순한 양'이 된다. 자기 머리로 생각할 줄 모르는, 주체성을 빼앗긴 노예로 길들여진다.
등 어루만지고 간 빼어먹는다는 말이 있다. 강한 자들은 이 길들여진 양들에게 착실, 겸손, 온건, 성실, 적응성 있다 하는 등의 온갖 아름다운 찬사를 퍼부으며 환영하고 칭찬하면서 최대한으로 그들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털을 뽑는다. 고통받는 인간은 한동안은 얼떨떨하여 그가 고통을 당하는지 털을 뽑히는지 모른다. 설사 어렴풋이 그것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그는 다만 생존하기 위하여 현실의 부당한 행태와 그로부터 오는 자신의 고통을 참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만다. 때때로 무언가 '부당하다' 또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으나, 역시 자신은 '무력'하며 그것은 시정될 길이 없으므로 머리를 흔들며 그런 건방진 생각을 털어버린다. 인내는 그의 영원한 금과옥조가 된다.
그러나 억압과 혹사, 그리고 그로 인한 고통이 그가 참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서 그의 인간으로서의 존립을 위협하게 될 때 잠자던 그의 비판의식은 돌연 고개를 쳐들어 절실하게, 부지런히 활동을 개시한다. 그는 비로소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를, 무엇이 아름다운 것이고, 무엇이 추잡한 것인가를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기 시작하는 주체적인 인간으로 재생하는 것이다. 인간다운 자존심이 되살아나고 억눌렸던 분노가 폭발한다. 저항이 시작된다. 현실의 질곡이 결코 인간이 뚫을 수 없는 금성철벽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잠시 여담이지만 헤겔이라는 철학자의 <정신현상학>이라는 책이 있다. 조영래 변호사가 보여준 고통받는 한 인간의 성장은 헤겔이 자유와 자유의식으로 구분한 것과 만나는 지점이 있다. 더 깊은 이해에 도움이 될까 하여 인용한다. 헤겔의 정리는 다음과 같다.
헤겔이 주목했던 건 자유 의식이다. 자유 의식이란 것이 뭘까. 자유와는 분명히 다른 개념이다. 만약 자유와 자유 의식 중 하나를 잃어야 한다면 무엇을 잃겠는가. 자유를 잃으면 억압받은 삶을 살게 된다. 다만 자유에 대한 의식이 있으니 끝없이 자유를 갈망한다. 자유 의식을 잃으면 동물처럼 살거나 노예처럼 산다. 헤겔은 자유 의식이 있다면 불편하지만 끝내 자유를 쟁취한다고 말한다. 헤겔과 마르크스의 공산주의가 연결되는 지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이 자유 의식 개념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 그렇다면 헤겔이 말한 주인과 노예를 생각해 보자.
노예는 기본적으로 주인을 섬긴다. 왜? 자유 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어느 날, 주인의 비인간적 행동에 주인을 죽이고 싶다는 충동이 든 노예는 그 순간, 자유 의식을 자각한다. 자유 의식을 자각한 노예는 이렇게 생각한다. '저 주인에게 나라는 노예가 없다면, 저 주인은 주인 노릇을 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렇다면 저 주인을 주인 되게 하는 것은 노예인 나 아닌가? 곧, 주인의 진정한 주인은 나 아닌가?'라는 생각에 도달한다. 헤겔은 이 책을 통해 자유와 자유 의식 그 사이를 구분했다. (김윤찬의 블로그 중 <헤겔과 1층 고양이>)
인간다운 자존심을 재생시킨 전태일은 바보회라는 친목 조직을 결성한다. 다만 자신의 주체성을 자각하지 못했던 대다수의 노동자들과 함께 뜻을 모으고 행동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확인한다. 근로기준법 42조 "근로시간은 휴게시간을 제하고 1일에 8시간, 1주일에 48시간을 기준으로 한다. 단, 당사자 간의 합의에 의하여 1주일에 60시간을 한도로 한다." 5년 넘게 하루 15시간을 시달려온 전태일이 이 문장을 읽으며 느낀 감정은 어땠을까. 당연한 것으로만 알았던 세계관이 무너지며 그동안 속아왔던 것에 대한 분노와 억울함 그리고 한 개인에 지나지 않는 자신의 무력감 때문에 느끼던 좌절감으로부터의 해방과 희망. 이 모든 감정이 분출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는 "이제껏 '이렇게 좋은' 규정들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저 직장에서는 주인이 맘대로 하는 것인 줄만 알고 찍소리 한번 못하고 속아 살아온 자신이 정말 바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우리 재단사들의 모임은 바보들의 모임이다. 이것을 우리가 철저하게 깨달아야 하며, 그래야만 언젠가는 우리도 바보 신세를 면할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좋다! 우리는 바보다!"라고 외치는 태일과 동료 재단사들의 가슴속에는 얼마나 깊은 감동과 희열이 흘렀을지 상상만으로 미소가 지어진다.
조영래 변호사는 또다시 질문을 던진다.
누가 바보이며 누가 바보가 아닌가? 우리 사회에서 '똑똑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뜻하는가? 남의 등을 밟고 올라서는 사람, 남의 피땀의 성과를 가로채는 사람, 남을 속이며 남으로부터 절대로 속지 않는 사람, 자신의 이득을 위하여 남에게 손해를 끼치며 남으로부터는 절대로 손해를 보지 않는 사람. 그리하여 돈을 벌든지 권력을 잡든지 하여간에 '출세'를 해서 세상 사람들의 찬탄과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명예롭게'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 이른바 잘난 사람, 똑똑한 사람들이다. 또 한 부류의 '약은 사람', '현명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현실과 타협할 줄 알고 현실에 적응할 줄 아는, 이른바 처세에 능한 사람들이다. 강자에게 절대로 저항하지 아니하고, 어떤 부당한 취급을 당하더라도 고분고분 고개 숙이고 받아들이며, 반대로 약자 앞에서는 허리를 뻣뻣이 펴고 헛기침을 한다는 것이 그들의 처세 철학 제1조이다. 그들의 사전에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나 강한 자에 대한 저항이라는 말이 없다. 일제 36년의 억압과 지배의 현실, 해방 이후의 정치적 격동, 그리고 6.25의 혼란을 몸으로 겪으면서 살아남았던 기성세대는 이러한 비굴한 처세 철학을 뼛속까지 익힌 '현명한 사람들'로 가득 메워져 있다. 세상의 부모들은 자기 자식에게 '잘난 사람'이 될 것까지는 기대할 수 없어도 최소한 이러한 '약은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고 그렇게 가르친다. 그뿐인가? 강자들이 판을 치는 모든 사회기구가 한결같이 새로 자라나는 세대에게 가르치는 것은 적응, 타협, 겸손, 순종, 온건 등등의 미덕이다.
적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하나의 절대적인 진리, 당연한 삶의 요결, 전혀 의심할 여지없는 공리처럼 되어 있다. 어릴 때부터 우리가 부모, 선배, 교사, 라디오, TV, 영화, 고명한 학자, 승려, 정치인 등등의 모든 권위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되풀이해 들어온, 이 그럴듯한 추상적 명제를 한 꺼풀만 벗겨놓고 보면 그것은 곧 어떠한 현실에 건 저항하여서는 안된다고 하는, 쓸개를 빼놓고 살아야 한다는, 거세된 노예가 되기를 강요하는 실로 무서운 주문인 것이다.
흔히들 아무개는 군대에 갔다 오더니 '사람이 다 되어서 왔다'라고 하는 말들을 한다. 군대가 사람 만드는 곳이다, 군대에 갔다 오면 사회에 적응할 줄 아는 인간이 된다고 하는 우리가 수없이 듣는 이 말이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철저한 상명하복식의 어떠한 불합리하고 비인간적인 명령이라도 아무 이의 없이 지켜져야만 하는 숨 막히는 계급사회, 인간적인 존엄이니 자유니 평등이니 하는 것은 한 방울도 찾아볼 수 없는 이 호령과 기합과 '빳다 방망이'의 세계가 '사람을 만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바로 자신이 얼마나 무력하고 얼마나 왜소한 존재인가를 뼛속 깊이 깨달아 겸손해진 인간, 강자의 지배에 도전하거나 저항하거나 이의를 내세운다는 것이 '달걀로 바윗덩어리를 치는' 것처럼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철저히 터득하여 온순해진 지각 있는 인간, 그러한 인간이 군대로부터 만들어져 나온다는 것을 뜻한다. 바로 이것이 '적응할 줄 아는 인간'의 정체이다. 176p
이 단락을 읽은 '적응할 줄 아는 인간',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간'은 이렇게 되받아칠지 모른다. "남들은 다 밸이 없어서 가만히 죽어지내고 있는 줄 아니. 즈이들이 무슨 통뼈라고 중뿔나게 나서서 노동운동이니 뭐니 하고 설쳐? 그런다고 뭐가 될 줄 아나. 결국 신세 조지고 피 보는 건 즈이들뿐이라고, 어리석은 놈들." 조영래 변호사는 다시 되받는다. "인간을 비인간으로 만들고 있는 사회는 스스로 인간다운 삶을 되찾으려고 일어서는 사람들을 향하여 조소를 던지고 그들을 바보라고 낙인찍는다. 노예사회에서 벗어나 진정한 인간으로 되려고 발버둥 치는 사람들을 비정상적으로 취급한다."
일상에서 주어진 길대로 가지 않는 이들을 볼 때, 그들을 향해 한심한 표정을 지으며 일갈을 날리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봤다.
오늘의 현실이 절대로 변화될 수 없는 영구불변한 현실이라는 미신에 사로잡혀 있는 '약은'자들이 참된 현실주의자는 아니다. 삭막한 겨울벌판의 나무둥치 속에서 내일 화사하게 피어날 꽃잎을 바라보고 오늘의 꿈이 내일의 현실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고난의 길을 딛고 일어서는 사람이야말로 참된 현실주의자인 것이다. 181p
열악하고 부정의한 환경에 저항하고자 했던 태일은 숱한 암초들에 부딪힌다. 우리는 바보라며 시작한 바보회도 비슷한 성격의 삼동회도 현실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눈앞의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같이 일하는 수많은 동료를 생각하고 행동하고자 했던 태일을 알아주는 이는 많이 없었다. 그의 고독했던 나날을 짚어보자.
나는 삼거리에 이정표처럼
누가 같이 가자고 하는 이가 없구나
바람이 부나 눈비가 오나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나. 1969년 9월 낙서
그렇지만 누가 그것을 알아준단 말이냐?
너는 괴롭겠지만 보지 않을 수 없을 걸세.
과거가 불우했다고 지금 과거를 원망한다면 불우했던 과거는 영원히 너의 영역의 사생아가 되는 것이 아니냐? 어떠한 인간적 문제이든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인간적인 과제이다. 1969년 12월 31일 낙서
왜 노예가 되어야 하나.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박하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세대에서 나는 절대로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어떠한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주목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는 소설도 쓰곤 했다.
그는 생각한다. 이 세상 어느 곳에서 누구를 지적하여 인간상의 표준을 삼을 것인가.
인간의 참 목적인 평화와 희락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는 생각한다.
인간은 어딘가 잘못 가고 있는 것 같다고.
생존하는 목적의 본질이 희미함을 다행으로 생각하는 세대.
흐린 탁류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세대.
자기 자신의 무능한 행위의 결과를 타인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세대.
나의 또 다른 나들이여.
생각해야 할 것을 생각하므로 그대들의 존재가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아는가? 한 영혼의 절규를 외면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의 심적 더러움을 점고해 본 일이 있는가?
그가 항거하기 1년 전 그는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서 생각을 거듭하며 결심한다. "그것은 다만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하는 것을 거부하고, 노예의 삶의 모든 굴욕과 허위와 유혹을 떨쳐버리고, 아무리 수난과 고통과 외로움으로 가득 찬 가시밭길일지라도 인간성을 위하여 싸우는 존엄한 인간의 길로 기어이 돌아가겠다는 결단이었다." 지금은 배부른 노예가 아닐까? 본질은 허기짐일까, 노예의식일까? 그의 결단을 보며 질문을 던진다.
한 인간이 그의 인간성을 풍성하게 하는 과정은 곧 좁은 자아의 환상을 버리고, 그 껍데기를 깨고, 자신과 이웃과 세계에 대한 참되고 순수한 관심의 햇살이 비치는 곳을 향하여 나오는 과정을 뜻한다. 참된 소망, 참된 사랑, 참으로 순수한 그리움만이 인간을 구원하고 풍성하게 한다.
참된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본 태일은 1970년 11월 13일, 불꽃이 되어 세상을 떠났다. 태일이 인간으로 살기 위해 맞서야 했던 것은 평화시장의 악덕 자본가들만은 아니었다. 태일이 마주했던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
제2차 세계대전 후의 한반도는 강대국 냉전의 제물로 떨어진 세계 사상 유례가 드문 치열한 이데올로기의 격전장이었다. 좌우익이 대립한 동족전쟁에서 수십만, 수백만의 사람들이 희생되고 학살되었다. 그리고 한반도의 남쪽에는 친미파인 우익정부가 자리 잡고 좌익세력을 철저하게 말살해 버렸다. 이 과정은 물론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좌익 탄압을 핑계 삼아 일체의 비판세력 제거, 일체의 대중운동 말살로 연결되었다. 야당은 물론이요, 권력에 대해서 다소 비판적인 지식인들도 노동문제만은 언급하기를 꺼리게 되었고, 노동자들 자신도 아예 참된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득책으로 되어버렸다.
화상으로 인해 도저히 알아볼 수 없게 된 태일의 가슴에 손을 얹고 어머니는 기도했다.
"근로자를 위하여 애쓰는 태일이의 뜻이 이 모양으로 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면, 하나님 뜻대로 하옵소서. 참새 한 마리도 당신의 뜻이 아니고는 떨어질 수 없다고 하였으니, 이 가엾은 목숨도 당신 뜻대로 하소서"
"어머니 담대하세요. 마음을 굳게 가지세요. 그래야 내가 말을 하겠습니다. 어머니, 우리 어머니만은 나를 이해할 수 있지요? 나는 만인을 위해 죽습니다. 이 세상의 어두운 곳에서 버림받은 목숨들, 불쌍한 근로자들을 위해 죽어가는 나에게 반드시 하나님의 은총이 있을 것입니다. 어머니 걱정 마세요. 조금도 슬퍼 마세요. 두고두고 더 깊이 생각해 보시면 어머니도 이 불효자식을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머니, 저를 원망하십니까?"
"나는 너를 이해한다. 어찌 원망하겠니? 원망하지 않는다."
"역시... 우리 어머니는 나를 이해해...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주십시오."
친구들이 병실로 들어왔다.
"자네들,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네. 뭐니 뭐니 해도 사람이란 부모에게 잘못하면 안 돼. 너희 부모들께 효도하고, 그러고 조금 시간이 남으면 우리 어머님께도 날 대신해서 효도를 해주게. 우리가 하려던 일, 내가 죽고 나서라도 꼭 이루어주게. 아무리 어렵더라도,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되네. 쉽다면 누군들 안 하겠나? 어려울 때 어려운 일 하는 것이 진짜 사람일세. 내 말 분명히 듣고 잊지 말게.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화기를 가라앉히는 주사를 놓아주라는 어머니의 요청에 의사는 금전문제를 들먹이며 노동청의 보증을 서오라 했고 노동청 관계자는 "내가 무엇 때문에 보증을 서요?"라는 말을 남기고 도망갔다. 몇 시간 동안 방치된 태일은 "배가 고프다"라는 마지막 말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서 전문이다.
사랑하는 친우여, 받아 읽어주게.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 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 주게.
뇌성 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꺾어버린다고 해도,
하늘이 나에게만 꺼져 내려온다 해도,
그대 소중한 추억에 간직된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을 걸세.
그리고 만약 또 두려움이 남는다면 나는 나를 영원히 버릴 걸세.
그대들이 아는, 그대 영역의 일부인 나.
그대들의 앉은 좌석에 보이지 않게 참석했네.
미안하네. 용서하게. 테이블 중간에 나의 좌석을 마련하여 주게.
원섭이와 재철이 중간이면 더욱 좋겠네.
좌석을 마련했으면 내 말을 들어주게.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어쩌면 반지의 무게와 총칼의 질타에
구애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않기를 바라는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내 생애 다 못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데, 굴리는 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2023년 1월, 여심위에 등록된 여론조사 업체 <여론조사 꽃>의 자체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의 46.9%가 '노동조합은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라고 대답했다. 연령으로 봐도 20대를 제외한 모든 연령에서 부정 대답이 압도적으로 높다. 이는 국민의 재벌기업에 대한 인식과 완전히 정반대인 수치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노동조합의 노동운동이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기는 굉장히 쉽지 않은 일로 느껴진다. 서구 사회와 달리 우리 노동운동은 왜 부정 여론이 압도적으로 높아진 것일까. 그들만의 잘못일까?
최근 한겨레 신문에서 내놓은 [2023, 공장을 떠나다] 특집 기사를 통해 정년퇴직을 앞둔 노동자와 21살 취업 전선에 뛰어든 노동자를 소개한다. 그들을 통해 전태일이 떠난 이후 한국 노동은 어떻게 여기까지 굴러왔는지 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굴러 갈지 짐작해 보자. 한겨레의 방준호 기자는 왜 한국은 소수의 인재만이 아닌, 다수 노동자가 주인공인 성공을 꿈꾸지 못하는지 질문을 던졌다. 기사에 따르면 한국은 1987년 국내총생산 1480억 달러에서 2021년 국내총생산 1조 8100억 달러까지 성장했다. 기적에 가까운 수치지만 그만큼 우리 사회 곳곳엔 그림자가 짙어져 있다. 그림자는 정년퇴직을 앞둔 SNT중공업 윤정민 씨를 비롯한 숱한 보통 노동자들의 불안이 세대를 달리하며 뿌리를 심고 자라서 짙어진다.
한국 노동 사회는 소수 엘리트가 주인공이다. 다수의 노동자는 효율적인 성장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자동화, 외주화, 세계화당하며 그들만의 숙련을 빼앗겼고 언제든 대체될 수 있다는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 "대체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라!"라는 주제의 강연들이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는 것이 반증 아닐까. 대체될 수 있다는 것은 노동자에겐 상실감이다. 평범한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하다가도 그 현실을 자각할 때면 허탈감이 몰려온다. 인간성에 상처를 입는 것이다. 서구사회는 노동조합과 자본가 그리고 정부가 서로를 견제하고 타협하며 비교적 오랜 시간 자라왔다. 그러나 우리는 군부독재를 극복한 87 6월 항쟁 이후에도 1990년대 신경영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숙련 노동자들이 늘지 못하며 노동자가 자본과 정치적으로 동등한 입장을 갖지 못했다. 신경영이라는 번지르르한 개념이 것이 남긴 것은 자동화, 외주화, 차등적 승진 제도다. 우리가 전태일의 삶에서 느낄 수 있었듯 정부와 기업은 노동자를 억압해 왔다. 그것이 서구 사회와의 가장 큰 차이였다. 특히 외환위기와 함께 찾아온 구조조정은 비정규직과 하청화를 2배가량 대량생산했다.
"한국노동연구원이 경인 지역 1400개, 전국 1443개 업체를 조사한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 상황을 보면, 1998년 정리해고, 명예퇴직, 조기퇴직을 실시한 기업은 54.6%였다. 이후 경기 회복 국면에서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대체한 기업이 1999년 7.3%에서 2000년 14.6%로 두 배가량 증가했고 외주, 하청을 확대한 기업은 199년 3.1%에서 2000년 9.3%로 급증했다."
최근 인기 드라마였던 <재벌집 막내아들>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아진 자동차 인수 과정에서 순양그룹의 막내 손주인 진도준(송중기 씨)이 순양그룹 회장 진양철(이성민 씨)에게 묻는다.
"고용승계에는 왜 그렇게 반대하시는 거예요? 노사화합으로 생산성이 높아지면 회사에도 이익 아닌가요?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정도경영'. 전 그런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머슴을 키워가 등 따습고 배부르게 만들믄 와 안 되는 줄 아나? 지가 주인인 줄 안다. 정리 해고 별 거 아이다. 누가 주인인지 똑똑히 알려 주는 기다. 정도경영이라 캤나? 내한테는 돈이 '정도'다."
그렇다. 노동자는 머슴인 게다. 2001년 금속노조 등이 등장해 비정규직, 하청화에 대한 문제제기를 했지만 기업과 노조사이의 갈등이 심했고 노조들 간의 당연한 이기적 욕망들이 충돌하면서 문제 해결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21세기에 들어서며 닥쳐온 본격적인 세계화 국면에서, 한국 제조업은 속도전에서 우위를 보였으나 손기술이 필요한 제품은 독일과 일본 등에서 수입하고 단순노동만을 통해 중계무역 비중을 높였다. 독보적인 우리만의 스타일이 사라졌다. 그로부터 20년의 세월 동안 많은 것은 자동화되었고 숙련 노동자들은 자취를 감췄다. 정준호 강원대 교수는 "생산에서는 소수에 의한 극단적 효율을 추구하고 이를 복지로 추후에 만회하는 방식은 복지마저 '시혜'로 인식하게 만들어 사회적 갈등을 키운다"라고 말했다.
1988년, 공장에 들어선 평범한 생산직 노동자 윤정민은 자신이 직접 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꼈다. "운전도 그렇잖아요. 하루 할 때보다 다음날 할 때 조금씩 늘잖습니꺼. 똑같습니다. 손기술이라는 것도." 숙련 노동자를 꿈꾼 윤 씨는 2년도 채 되지 않아 한국 생산직 노동자의 현실에 부딪혔다. 그의 동료 이영일 씨가 분신을 한 채 공장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그의 노트에는 "얼마나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느냐가 문제인 것 같다"라고 적혀 있었다. "우리가 완전 강성노조가 됐거든예. 그럼 어떻게 타협해 위기를 극복할까 이래 갔어야 하는데 회사는 빚을 내서 다른 지역에 하청 공장을 짓고 거기서 똑같은 걸 만들고 있는 겁니더. 노조는 노조대로 파업했고. 같이 망하는 쪽으로 간 거지요."
자본가들은 숙련된 노동자를 키워 월급을 더 주는 대신 최저임금의 외주, 하청을 주는 방법을 택했다. 이후 설상가상으로 찾아온 외환위기는 1년 임금 체불과 회사 부도로 이어졌고 이때 회사는 비정규직화와 국제 분업을 택했다."중국에 있는 자회사에 이 기계를 반출하려고 했어요. 이게 사라진다는 건 우리도 사라진다는 거잖아요." 그에게 있어 자신의 손기술이 벤 기계를 없앤다는 것은 그의 존재를 없앤다는 것이었다. 윤 씨는 자신이 속했던 노조에 대한 반성도 잊지 않았다. "노동조합이 기본적으로 조합원 이익을 위해서 있지만 회사나 산업의 미래에 노동자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불평등이 왜 줄어야 하는지 그런 얘기를 더 해야 됐어요. 노조 말고 누가 자본에 그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꺼."
2001년생 수혁 씨는 현대기아차의 4차 협력사에 취직했다. 그는 특성화고를 졸업하고 자격증을 취득한 제조업 노동자였다. 눈에 띄는 것은 그가 자신의 적성을 따라 주체적인 선택을 했다는 점이다. 철 깎고 구부리는 게 좋았던 그는 이른 나이에 취업을 할 수 있고 대학 입학에도 수월하다는 말에 특성화고에 진학한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맡겨진 일은 단순 기계 보조였다. 기계가 사람을 보조하는 시대가 가고 사람이 기계를 보조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황동 칩은 길게 이어져서 안 나오고 끊어져서 뾰족뾰족하게 나와요. 이게 아주 미세해서 박히면 따갑기는 한데 눈으로도 잘 안 보여요." 회사는 장갑조차 제공하지 않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일을 찾아보라 권할 뿐이었다. 저숙련 반복 노동은 22살 수혁에게 동기부여가 될 리 없었다.
2002년생 예린 씨는 위험물 기능사와 환경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유해화학물질 안전관리자로 취직했다. 그는 사무직이었지만 담당 부장의 "현장부터 익히라"는 말에 현장에 출근했다. 온갖 화학 물질이 들어가 있는 도금 용액에 손을 담가야 했던 예린 씨는 물었다. "장갑 있어요?" 담당 부장은 무시했다. 필름 없는 엑스레이 검진을 하던 평화시장이 떠오른다. "손톱이 말 그대로 파이게 녹거나 뚫려서 피가 난 적도 많아요. 산이 튀면 그 방울 그대로 동그랗게 구멍이 나 피가 나요." 예린 씨는 견딜 수 없는 환경에 공장을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상사는 "출근하지 마라. 퇴직금을 주지 않겠다. 공고출신이라 머리가 안 돌아가나?"라고 말하면서도 "너 같은 인재를 또 어디서 구하냐. 함께 해온 작업은 마무리해야 하지 않겠냐"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이제 한국을 떠날 생각을 한다. 인구 감소 시대의 첫 노동자들이 도저히 못 견디고 하루빨리 떠날 생각을 하게 만드는 노동 환경, 한국 제조업의 현주소다. "대기업의 일자리는 갈수록 경력직을 선호하며 숙련을 알아서 키워오라는 식이고, 정부의 훈련 프로그램만으로 노동자가 저숙련을 벗어나기 어려워 보인다. 숙련 형성이 시장과 사적 영역에만 맡겨져 자원이 없는 청년을 누락시킨다는 것은 국가적으로 인적 자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는 의미이고, 무엇보다 청년 내부의 불평등 문제를 심화한다"라고 이승윤 중앙대 교수는 말한다.
중소기업의 뒷모습을 다룬 드라마 <좋좋소>를 기억할 것이다. '좋소의 장점은 사회 초년생들 경력 채워주는 거임'이라는 댓글이 기억난다. 일제히 경력 채용을 일반화하는 대기업에 입사하기 위해 초년생들은 '좋소'를 하나의 과정으로 생각한다. "튕겨져 나와 부유하는 청년이 많아질수록 오직 개인의 노력으로 한 칸이라도 더 위로 올라가는 것이 꿈이 되고, 그럴수록 각자도생과 불평들을 받아들이는 모습이 구조화된다"라고 손정순 시화노동정책연구소 위원은 말했다. 연대 없는 노동자는 일개 개인으로 자본과 맞서야 한다. 싸움이 일어난다면 질 수밖에. 윤홍식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성공했지만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 성장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최첨단 자동화와 공정, 소수 엘리트, 재벌 대기업, 수출에 의존하는 성장에서 벗어나야 한다. 대신 자동화와 숙련노동, 수출과 내수,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균형을 이루며, 모든 국민이 혁신의 주체가 되는 새로운 성장 방식을 만들어야 한다. 불가능하다고? 우리는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했던 역사가 있다"라고 말한다. 예린 씨는 현실을 말했다. "미래는 두려운데요, 일단 지금 먹고살 것들을 위주로 생각해요." 정부와 기업이 노동자들에게 내밀어야 하는 건 거시적인 손익계산표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구체적인 비전이 적힌 보증서다. 긴 호흡, 긴 호흡이 필요하다.
사족
원래대로라면 1화는 조영래 변호사에 대한 글이어야 했으나 자료조사와 취재과정에서 전태일 열사에 대해 먼저 다루고 <전태일 평전>의 저자인 조 변호사를 다루는 것이 기획의 짜임이나 그들을 이해하는 데 더 나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전태일 기념관>에 가면 조영래 변호사에 대한 설명이 있다. 평전의 저자를 그 정도로 다룬 바는 접해본 적이 없어서 의아했다. 1976년 완성된 초고는 군부 독재에 가로막혀 일본에서 먼저 출판되어야 했다. 이후 한국에서 출판된 1983년에도 '전태일'이라는 이름과 평전의 저자를 밝힐 수 없어 <어느 청년 노동자의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나왔다. 1990년 타계한 조 변호사는 그의 생이 다할 때까지 저자로서 이름을 밝힐 수 없었다. 민주화 운동으로 오랜 기간 군부로부터 수배 생활 하며 밤낮 열심히 평전을 완성한 조변호사의 기념관 속 존재 이유를 이해했다.
우연하게도 나는 올해 1970년의 태일과 동갑내기가 되었다. 여느 대학생들처럼 방학을 맞아 아르바이트를 하는 날 말고는 여유로운 하루를 보내고 있으니 하루에 책 한권을 읽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전태일 평전>을 단번에 읽지 못했다. 책 초반, 가난에 못 이겨 동생을 길바닥에 버릴 수밖에 없었던 태일의 마음과 그런 아이들을 놔둔 채 식모살이를 떠나야했던 어머니의 마음을 생각하니 더이상 책을 읽어 내려갈 수 없었다. 책을 덮으니 내 생활을 돌아볼 수 있었다. 너무 많은 것을 누리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심지어는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내가 보여 부끄러웠다. 동시에 내가 최근 마주하는 고민들은 별 게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 내 문제는 모두 내가 키운 것에 불과했다. 배고픔을 느껴본 일이 언제였던가 생각했다. 그래서 지지난주 일요일, 하루를 굶어보기로 했다. 버틸만하다가도 배를 채우고 싶다는 본능과의 갈등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저녁에 시리얼을 말아먹고야 말았다. 고작 비어버린 하루 식사에 나란 인간은 그렇게 반응했다. 나는 얼마나 작으냐..
평전에 따르면 태일은 "대학생 친구가 단 한 명만이라도 있었더라면.."하고 말버릇처럼 되뇌었다고 한다. 대학생인 나는 대학생의 몫을 다하고 있을까. 이 사회에서 대학생의 몫은 무엇일까. 오로지 내 앞만 신경쓰고 있지는 않았나 돌아보았다. 내 주변엔 우리 사회의 리더가 될 친구들이 많다. 지금 읽고 있는 당신이 그런 사람이라면, 꼭 우리 사회의 리더가 되어 "전태일"들을 외면하지 말아야한다고 말씀드린다. 태일의 죽음이 뒤늦게 나마 공론화될 수 있었던 것도 당시 대학생들의 덕이 컸다. 우리의 도움이 꼭 필요한 사회 구성원들이 있을 때, 사사로운 이익에 눈 멀어 숲을 태우지 말자. 비겁하지 말자.
노동에 관심이 생긴 독자는 최근 국회에서 논쟁 중인 [노란 봉투법]을 공부해 보는 것도 좋겠다. 또 <전태일 평전>을 한 번 읽어 보는 것도 권해드린다. 특히 청년 시절을 시작하는 우리 또래에게 도움이 되는 삶의 태도들이 곳곳에 녹아들어 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