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산다 3화
지난가을, 검진 차 서울에 올라오신 외할아버지는 병원과 가까운 우리 집에서 머무셨다. 연세가 꽤 있으신 할아버지는 그나마 조용한 내 방에서 이틀 동안 주무시기로 했다. 나 역시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당신이 내 자리를 뺏어서 어찌하냐며 머쓱한 웃음을 몇 번이고 지으셨다. 댁으로 내려가실 때까지 얼마나 이 말을 반복하셨는지 모르겠다. 두 번의 아침, 그동안 한 번도 개어진 적 없던 내 이불이 곱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것이 단순히 그의 습관인지, 내가 아닌 다른 이의 공간을 빌렸기에 잘 썼다는 인사였는지 여쭙진 않았지만 정리된 이부자리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나는 그런 적 있던가.
어제는 겸사겸사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께 인사드리러 내려갔다. 할머니께서 최근 꽤 오랜 시간 동안 편찮으셨다는 소식을 들었던 터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터미널에 도착한 나는 마중 나오신 할머니를 보고 놀랐다. '몸도 성치 않으시고 나 또한 클 만큼 컸건만...' 할머니는 손자가 오는데 어찌 안 나와보겠냐며 씽긋 웃으셨다. 대우받고 있다고 느꼈다. 식사를 하고 논길을 같이 걸었다. 당신의 생각도 말씀해 주시고 내 생각도 물어오셨다. 세월은 할머니의 마음에 흔적을 남기지 못했다. TV를 보며 담소를 나누다 열차 시간에 맞춰 작별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이제 서울로 출발한다고 엄마와 연락하다가 할머니께서 내가 온다고 급히 염색하셨다는 걸 전해 들었다. '아...' 그것이 할머니의 '차마 어찌할 수 없는 지점'이구나 생각했다.
염치. 혼날까 봐,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봐가 아니라 스스로 부끄러워할 수 있는 지점. 남들이 뭐라 하든 차마 허용할 수 없는 자신만의 경계선. 두 분에게서 ‘염치’를 느꼈다. 나는 염치 있는 사람일까. 내 주변 사람들은 염치 있는 사람들일까. 우리 사회는 염치 있는 사회일까. 오히려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고백한 용기를 "거봐, 잘못했네!" 하며 몰아세우지는 않는가. 그 무엇보다도, 염치 있는 사람으로 순간순간 살아가는 것이 멀리, 깊게 걸어갈 수 있게 하는 동력 아닐까.
우리는 염치가 없다는 말을 주로 쓴다. 정준희 한양대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염치가 없다는 말은 평균을 중요시하는 우리 사회에서 사람이라면 응당 갖고 있어야 할 자신의 부끄러움을 생각할 머리조차 없다는, 사실은 아주 모욕적인 표현이다. 이는 염치가 우리에게 상당히 중요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는 증거다. 염치의 반대 개념은 뻔뻔함이다. 뻔뻔한 행동을 한 사람이 하나 둘 더 큰 보상을 받고 성공을 하고 존경을 받기 시작하면 그 사회는 뻔뻔함을 기본값 또는 추구해야 할 가치로 삼는다. 그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에 손해를 감수하는 사람들을 보고 바보라고 일컫거나 무시하지는 않는가? 이는 얼마나 우리 사회가 뻔뻔한지 알아볼 수 있는 척도다.
부끄러움을 생각하다 보니 손석희 앵커의 앵커브리핑이 떠올랐다. 손앵커는 2018년에 세상을 떠난, 동료이자 친구이기도 했던 고 노회찬 의원에 대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그것은 오세훈 현 서울시장의 한 마디로부터 시작됐다. 그대로 옮긴다.
"돈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분의 정신을 이어받아서야..."(오세훈 서울시장)
(중략) "거리낌 없이 던져놓은 그 말은 파문에 파문을 낳았지만,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순간... 그 덕분에 한동안 잊고 지냈던 노회찬에 대한 규정 혹은 재인식을 생각해 냈던 것입니다. 즉, 노회찬은... '돈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아니라 적어도 '돈 받은 사실이 끝내 부끄러워 목숨마저 버린 사람'이라는 것. 그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큰 비리를 지닌 사람들의 행태를 떠올린다면, 우리는 세상을 등진 그의 행위를 미화할 수는 없지만... 그가 가졌던 부끄러움은 존중해 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그에 대한 평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빼버린 그 차디찬 일갈을 듣고 난 뒤, 마침내 도달하게 된 저의 결론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의 동갑내기 노회찬에게...
이제야 비로소 작별을 고하려 합니다."
요즘 서울시와 경찰 공무원들은 전기난로를 분향소에 갖다 놓으려는 이태원 참사 유가족을 막아 세웠다. 사람이 먼저인가 법이 먼저인가. 인간으로서 느끼는 부끄러움이 먼저인가 위에서 떨어지는 상명하복식의 명령이 먼저인가. 우리 사회 속 관용이란 가치는 밥줄에 묻히고 있는 것 아닐까.
다시 돌아와서, 두 분의 행동이 사실 대단한 것은 아니다.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내 방을 쓰셨어도, 그까짓 마중 나오시지 않으셔도, 염색하지 않으셨어도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잘못 또한 아니다. 그러나 두 분의 작은 행동들은 두 분을 넘어 나를, 또 다른 사람을 가르친다. 돈은 티끌 모아 티끌이라지만 염치는, 마음은 티끌 모아 태산이 된다. 열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며 염치에 대해 생각했다. 두 분은 나로 하여금 스스로를 되묻게 하셨다. 술 한잔 하지 않았건만, 안 그래도 붉은 얼굴이 더 붉어지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