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_야마오 산세이
# 락밴드 YB의 곡 <물고기와 자전거>를 들으며 읽어보시길 추천드려요.
왜_야마오 산세이
왜 너는 도쿄대학에 갈 생각을 않느냐고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물었다.
저는 와세다대학에 가고 싶습니다 하고 대답했지만
그때 나는
키에르케고르 전집을 읽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미 시험 공부할 사이가 없었다.
왜 너는 대학을 그만두냐고
대학 3학년 때 아버지는 물었다.
나는 방자하게도
입학할 때부터 졸업할 생각이 없었고
졸업장 갖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비겁한 사람이나 하는 일이고
중학교만 졸업한
아버지의 길에도 거스르는 일이라고 대답했다.
왜 너는
아나키스트가 되었냐고
올 삼월에 암으로 죽은 친구가 물었다.
그 친구는 깊은 연민과 힘을 가지고
평생을 사랑 하나로 일관한 보기 드문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
어디나 다 중심이고
또 거기에는 그 나름의 질서가 있으니
정부 따위는 필요 없는 게 아니냐고 대답하지 않고
너 또한 아나키스트인 게 분명하다고 대답했다.
왜 너는
도쿄를 버리고 이런 섬에 왔느냐고
섬사람들이 수도 없이 물었다.
여기에는 바다도 있고 산도 있고
무엇보다도 수령이 7천2백 년이 된다는 죠몬 삼나무가
이 섬의 산속에 절로 나서 자라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지만
그것은 정말 그랬다.
죠몬 삼나무의 영혼이
이 약하고 가난하고 자아와 욕망만이 비대해진 나를
이 섬에 와서 다시 시작해 보라고 불러 주었던 것이다.
왜 너는
지금도 외롭고 슬프냐고
산이 묻는다.
그 까닭을 나는 모른다.
당신이
나보다도 훨씬 외롭고 슬프고
훨씬 풍요롭게 거기에 계시기 때문이 아닐까 싶지만
그 까닭을 나는 모른다.
류시화 시인은 말한다. “우리가 하려는 일에 대해 세상은 언제나 ‘왜’냐고 묻는다. 마치 자신들은 인생이 가야 할 길을 알고 있는 것처럼. 인도를 가려고 하면 왜 위험한 그런 곳을 가려느냐고 묻는다. 채식을 실천하려고 하면 채소에는 생명이 없느냐고 묻고, 무정부주의자라고 하면 너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묻는다. 그런 질문들에는 일일이 답할 필요가 없다. 어떤 대답을 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이해시키느라 자신 안의 불을 다 태울 필요는 없다. 외롭고 쓸쓸할 때, 눈을 멀리 돌리고 산을 바라보라. 훨씬 더 외롭고 굳건한 산이 거기 말없이 있지 않은가.”
류시화 시인은 이 시의 시인인 산세이에 대해 말한다. “도쿄 출신의 산세이는 30대 초반부터 <부족>이라는 이름의 대안 문화 공동체를 시작해 현대 문명에 저항하고 자연과 하나 되기를 꿈꾸었다.(중략)그리고 마흔 살이 되었을 때 온 가족을 데리고 폐촌이라 불리는 일본 최남단의 작은 섬 야코시마의 마을로 터전을 옮겼다. 그곳에 사는 이유에 대해 그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소유하는 기쁨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영적인 기쁨’을 말했다. (중략) 그 사람에 대한 소개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삶의 방향이 정해지는 이가 있다. 야마오 산세이는 내가 살지 못한 삶을 실천한 사람이다. 그러나 늘 그의 삶을 바라보게 된다. 틱낫한은 <살아 있는 붓다, 살아있는 그리스도(Living Buddba, Living Christ)>에서 말한다.”
“북쪽으로 가려고 할 때 북극성을 길잡이로 이용할 수 있지만 북극성에 도달하려는 것은 아니다. 북극성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의 노력은 그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 자신의 장소에 도달하는 일이다.”
저마다의 가슴에는 저마다의 시가 있다. 온몸을 흐르는 시는 생각이 되고 말이 되고 몸짓이 되고 비로소 삶이 된다. 똑같은 시가 없기 때문에 똑같은 삶도 없다. 우리는 제각각 다른 시를 읊으며 자란다. 우리의 시는 이 지구에서 등장한 적도 반복된 적도 없다. 단 한 번도 없다. 우리의 시는 곧 미래다. 우람한 참나무를 품은 작은 도토리알이다.* 미래는 늘 낯설고 불편하고 불온해 보인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새로운 미래가 불편한 세상은 어느 순간 묻는다.”왜.” 세상에 속한 우리는 서로에게, 스스로에게 또 묻는다. “왜.” 뜨거운 가슴을 가진 우리는 낯설기 때문에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다. 몇 사람들은 끝까지 곁눈질로 우리를 볼 것이다. 길어야 찰나일 그 눈초리가 두렵다. 찰나에 잡아먹혀 이미 영원을 잃은 이들이 다가와 우리의 영혼을 앗으려 한다. 친절한 미소로 그래서 잔인한 눈빛으로.
우리, 스스로에게 왜냐고 묻자. 왜 이 길을 가느냐고. 진정 내가 좋아하는 길이냐고.
우리, 스스로에게 왜냐고 묻지 말자. 왜 이 길을 가느냐고. 남들과 다른 길 가는 게 두렵지 않냐고. 잘못된 거 아니냐고.
우리, 세상이 왜냐고 물으면 그저 웃어 보이자.
이런 말 하는 나는 당연하게도 당신의 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세상에 속한 나 또한 당신에게 왜라고 물을 수 있다. 나의 속된 질문에 당신이 그저 웃어 보인다면, 나는 속으로 ‘아차’하며 당신의 길을 진심으로 응원하게 될 것이다.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서로의 고독을 기꺼이 견지하며 함께 걸어가는 것***. 우리가 할 일이다.
*박노해 시인의 시 <너의 때가 온다>에서 따옴
**박노해 시인의 시 <미래에서 온 사람>에서 따옴
***박노해 시인의 시 <자기 해방의 태도>에서 인용
*책 <시로 납치하다_류시화 198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