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이데이-방드르디
[로빈슨 크루소-대니얼 디포]를 읽어보았다면
로빈슨 크루소와는 다른 전개로 패러디한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미셸 투르니에]을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로빈슨 크루소]는 무인도에서 문명과 단절된 상태에서 서구 식민지 경영 이념과 개인주의 경제개념을 바탕으로 인간의 생존과 개척정신과 모험정신을 다룬 모험소설로 배워왔다.
하지만 소설 속 로빈슨 크루소는 야만인을 금요일에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프라이데이라고 부른다. 야만인, 프라이데이는 그전까지 어떤 정체성도 없으며 로빈슨 크루소가 비로소 그를 프라이데이로 정의하는 순간 그는 프라이데이라는 정체성을 가진다는 논리는 보기 좋지 않았다. 그 당시 유럽인의 비유럽인에 대한 생각이 어떠했는지, 얼마나 무지, 무시했는지 알 수 있다. 식민지 경영이념이 들어 있는 발상이었을 것이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미셸 투르니에]는 로빈슨 크루소의 소설의 불편한 점을 뒤집는 패러디 문학이다. 영국인인 대니얼 디포는 야만인을 프라이데이라고 하지만 프랑스인인 미셸 투르니에는 야만인을 “방드르디”라고 부른다. 프라이데이의 프랑스 발음이 “방드르디”이 기 때문이다.
[로빈슨 크루소]가 산업사회의 탄생을 상징한다면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그 사회의 추진력이 되는 사상의 폭발과 붕괴, 그에 따라 인간의 사회적 이미지가 원초적 기초로 회귀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로빈슨 크루소가 죽음 직전의 프라이데이에게 정체성을 부여한 주종 관계였다면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서는 로빈슨 크루소와 방드르디의 관계는 평등관계로 변한다. 방드르디의 실수로 화약이 폭발해 로빈슨 크루소가 쌓아놓은 모든 것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둘은 폭발로 인해 싸움과 화해를 반복하며 로빈슨 크루소가 만든 문명세계를 무너뜨리고 로빈슨 크루소는 방드르디로부터 자유와 유희를 배운다. 사실 이 유희 부분에 마침내 두 사람의 관계는 표면적으로 동등해진다. 대니얼 디포가 살았던 시절의 유럽인에 대한 편견을 깨려고 방드르디를 미셸 투르니에가 패러디로 썼지만 둘 사이가 주종 관계에서 평등관계로 변하였다고 하기엔 완전히 동등하지 않다. 책에서는 아직 유럽의 우월주의가 남아있는 점이 아쉽다. 책의 마지막에 방드르디(금요일)를 대체할 다른 인물 죄디(목요일) 이 나온다. 다음 이야기를 기대해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