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방갑고 고마와서 울었다. 깊어서 울었단다.’
마음속의 바람을 잠재우러 건너온 제주도. 게스트하우스의 화장실 벽에 붙어 있는 서툰 글씨가 인상적이다. ‘나는 반갑고 고마워서 울었다. 기뻐서 울었단다.’ 일 것이다.
엄마 생각이 났다. 우리 엄마는 자식에게 헌신적인 전형적인 한국의 엄마였다. 언제나 입에 달고 사셨던 말씀이 '사람은 도둑질 빼곤 뭐든지 다 배워야 한단다.'였다. 그래서일 게다. 내가 무언가 새로운 걸 시도하는데 주저함이 없는 것이. 하지만 시부모님과 함께 살며 나를 위한 시간을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일상에 변화가 온 것은 걷기를 시작한 이후부터였다. 마을 길에서 가까운 산으로, 우리 고장에서 다른 지역으로, 국내에서 해외로 걷기의 영역이 계속 확장되었다. 자존감이 올라가고 생활이 활기차졌다. 어떤 형태의 길을 걸어도 두렵지 않았다.
‘강원북부산지에 기상특보(대설주의보)가 발효되어 오색 흘림골 탐방 예약이 자동 취소됨을 알려 드립니다.’
지난가을, 설악산 흘림골 예약을 마치고 떠났던 차 안에서 받은 문자였다. 오색주차장이 코앞에 있었으니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주차를 하고 설악산국립공원 오색분소에 들러 직접 문자 내용을 확인했다. 산 밑에는 비가 내리는데 산꼭대기에는 폭설이 내리고 있단다. 설악산의 모든 코스가 폐쇄되었고, 용소폭포 방향만 유일하게 개방됐다며 가는 방향을 알려주었다. 꿩 대신 닭이라고 툴툴거렸더니 함께 걷던 선배가 받아친다. “닭이 아니고 병아리야.”
비 내리는 가을 설악을 걸었다. 기암괴석과 암반 위로 흐르는 물의 조화가 절묘해 감탄하면서도 흘림골에 대한 미련은 끊을 수 없었다. 흘림골 앓이 하는 나와 가을 앓이 중인 설악산이 주전골에서 교감했다. 흘림골의 가을은 내 마음속에 아직 오지 않은 가을로 남게 되었다.
걷기를 하다 보면 때때로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맞닥뜨리기도, 계획에 없던 곳을 들르기도 한다. 안동의 오지인 가송리를 향해 가다 예술의 끼가 흐른다는 ‘예끼마을’을 들른 경우가 바로 그렇다. 안동댐이 생기며 수몰된 마을 자리는 호수가 되었고, 그 위를 부교가 길고 멋진 곡선으로 떠 있었다. ‘선성수상길’이라 했다. 눈부시게 푸른 하늘을 머리에 이고 부교를 건너니 ‘안동선비순례길’ 1코스가 나왔다. 월천서당을 향해 가는 길이란 이정표도 있었다. 나는 양반집 자제라도 된 양 무심한 걸음걸이로 발걸음을 느리게 옮겼다. 찾는 사람이 없어 자유를 만끽하며 걸었던 길은 우연히 만난 선비의 고장 안동의 다른 동네였다.
인제군 원대리의 자작나무숲에 갔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주차장은 물론이고 길가까지 차들이 꽉 차 좁은 길이 몸살을 앓고 있었다. 사람이 들끓는 숲길을 피해 탐방로 5코스로 올라섰다. 산길인 탓에 사람이 잘 찾지 않는 곳이었다. 많은 사람들을 발아래 두고 호젓하게 걸었다. 콧등을 간지럽히는 갈바람을 맞으며 자작나무숲 탐방로 1코스로 들어갔을 때는 대부분의 사람이 빠져나간 후였다. 신선놀음하듯이 걸었다. 바람은 나뭇잎과 사랑에 빠졌고 나는 가을과 사랑에 빠졌다.
발걸음을 처음 내딛는 지역은 언제나 관심의 대상이다. 동해시 ‘무릉건강숲’에서 하룻밤을 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무릉계곡을 못 가보고 떠나기 아쉬워 새벽 5시에 길을 나섰다. 이른 아침의 맑은 공기에 새소리의 청아함까지 더해져 온 산이 좋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오르다 보니 넓적한 반석들이 계곡을 따라 깔려있고, 반석에 새겨놓은 옛 선비들의 각자(刻字)도 꽤 많았다. 한학자들의 공부 터가 이곳이었지 싶었다. 그러나 이 계곡의 백미는 쾌적함의 끝판 왕인 산길이었다. 햇살에 나뭇잎이 부서지는 풍경을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그 빛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를. 계획된 일정이 따로 있어 오래 머물지 못했지만, 더 있고 싶다는 유혹이 젖은 낙엽처럼 달라붙었다. 무거운 발걸음을 떼어 옮기는데 벚꽃 떨어진 삼화사 불이문 길은 남의 속도 모르고 꽃길을 펼쳐주었다.
때때로 생각이 많아진다. 언제까지 낯선 길 위에 설 수 있을까. 왜 이렇게 걷는 것에 주저함이 없을까. 어떻게 걸으면 무릎에 무리가 덜 올까. 남편은 길 떠나는 나를 막지 않는다. 왜 걷기를 시작했는지 알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말려도 들을 내가 아님을 이미 간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다르다. 험한 길은 걷지 말라고 당부를 한다. 산길도 혼자 걷지는 말라고 한다. 하지만 어쩌랴. 가고 싶은 곳이 많기도 하거니와 아직은 건강한 다리와 발바닥에 달린 보이지 않는 바퀴 때문에 멈출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