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이 호반의 도시(水鄕) 임은 널리 알려져 있어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러나 춘천이 문향(文鄕) 임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예로부터 정약용, 김시습 등 이름 있는 시인, 묵객들이 춘천을 찾아와 글을 남겼으며, 전상국의 『남이섬』 등 여러 문학작품의 배경지가 되기도 한 곳 역시 춘천이다. 이런 까닭에 문학과 역사가 어우러진 길이 많다.
‘실레마을’을 찾은 것은 4월의 마지막 토요일이었다. 한쪽 팔이 아파 잘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였기에 우울한 얼굴로 남편을 따라나섰다. 마을 초입에 들어섰을 때였다. “여보, 금병산 좀 바라봐.” 남편의 말에 무심코 얼굴을 들었다가 “우와~!” 탄성을 질렀다. 새순이 돋은 나무들로 채워진 산에는 생명이 흘렀다. 연초록의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나의 故鄕은 저 江原道 산골이다. 春川邑에서 한 二十里假量 山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닷는 조고마한 마을이다. 앞뒤 左右에 굵찍굵찍한 山들이 빽 둘러섯고 그 속에 묻친 안윽한 마을이다. 그 山에 묻친 模樣이 마치 옴푹한 떡시루같다하야 洞名을 실레라 부른다. 집이라야 大槪 씨러질 듯한 헌 草家요, 그나마도 五十戶 밖에 못되는, 말하자면 아주貧弱한 村落이다.’ (『원본 김유정 전집』 개정판 속 ‘五月의 산골작이’ p.423 중에서)
실레마을은 소설가 김유정 선생의 고향이다. 사람 이름을 기차역에 붙인 우리나라 유일의 역, 김유정역이 있는 곳이다. 이 마을은 대부분 ‘김유정우체국’이나 ‘동춘천농협 김유정지점’, ‘점순네닭갈비’처럼 김유정 선생이나 선생의 작품 속 주인공과 단어가 관공서나 업소 이름에 들어가 있다. 이렇게 특색 있는 마을은 나하고도 인연이 있다. 석사 논문을 이 마을을 주제로 썼기 때문이다. 그러니 얼마나 많이 드나들었겠는가. 금병산을 오르내린 횟수는 또 얼마나 많았겠는가. 눈을 감아도 찾아갈 수 있을 만큼 길이 훤히 들어온다. 게다가 이 마을에는 남편의 놀이터가 있다. 은퇴와 동시에 농사꾼이 되어 지금도 남편은 그곳에서 놀고 있다.
걷기를 즐기는 내가 언제 찾아가도 반가워하는 금병산이 앉아 있고, 김유정 선생의 작품을 풀어놓은 열여섯 마당 ‘실레이야기길’도 있다. 작품 배경지가 모두 실레마을이니 어디를 걸어도 선생의 흔적이나 작품과 만날 수 있다. 마을 자체가 김유정 문학의 산실인 것이다.
봄마다 실레마을은 동백꽃 향기로 뒤덮인다. 이곳의 동백꽃은 생강나무에 핀 노란 동백이다. 4월 말이나 5월 초순에 금병산을 오르면, 동백꽃의 알싸한 향내에 취해 발걸음을 떼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뭣에 떠다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채 그대로 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둥이도 겹처서 쓰러지며 한창 피여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속으로 폭 파묻혀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깃한 그 내움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듯이 왼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원본 김유정 전집』 개정판 속 ‘동백꽃’ p.226 중에서)
오늘 다시 밟은 금병산은 신공을 부렸다. 프루스트의 ‘가지 않은 길’처럼 두 갈래 길이 나왔고 나는 낯선 길로 갔을 뿐이었다. 그런데 새로운 길로 들어선 순간, 정상까지의 소요시간이 90분 더 늘어난 150분이 되었다. 어이가 없었다. 순한 금병산에서 너덜길, 바윗길, 소나무 길을 모두 걸었다. 마른 솔가리 깔린 부드러운 흙길만 걸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금병산의 굴곡 많은 낯선 길은 내 삶과 닮아있었다. 머리카락이 하얘지고 머리카락이 뭉텅뭉텅 빠지던 때의 내가 소환되었다. 그 당시 함께 살던 시부모님은 상가 건물을 신축하며 3층을 살림집으로 만들고 먼저 입주하셨다. 부족한 건축비 중 상당 부분은 1,2층의 전세금을 세입자에게 미리 받아 해결하셨다. 그 후 공교롭게 IMF가 터졌고, 막내 시누이 내외가 하던 일이 잘 안 돼 시부모님의 새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1,2층의 세입자는 전세 기한이 만료되며 나가겠다고 했다. 아버님은 우리에게 아파트를 처분하고 들어오라 하셨다. 전세금을 마련할 목돈이 우리 아파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 지은 건물의 3층엔 방에 세 개밖에 없었다. 급히 옥상에 건물을 올리는데 시일이 촉박했다. 졸지에 아이 셋과 우리 부부는 방 한 칸에서 살게 되었다. 솔직히 표현하면 정말 시댁으로 들어가 살기 싫었다. 그러나 전세금을 빼줘야 한다니 어쩔 수 없었다. 멀쩡한 내 집을 놔두고 이사 들어간 날, 엉망인 기분을 속으로 삼키며 저녁 준비를 하는데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너 막내 눈치 주지 말아라.” 멀쩡한 제 집 두고 들어온 며느리 심정은 아랑곳없이 막내딸을 챙기셨다. 고구마가 내 숨통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중학생, 초등학생, 유치원생인 세 아이들과 한 방에서 지내며 막내 시누이의 아이들과 부딪히는 게 정말 힘들었다. 어느 날 단골 미용실을 갔는데 원장님이 말했다. “어머나~! 너는 어째 머리가 벌써 하얗게 된다니? 완전 백발이야.” 그때가 40대 중반이었다.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했으면 머리가 이럴까 싶어 속상했다. 내 삶에서 가장 많이 걸었던 때가 이 시기였다. 그러나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이 있다. 음지가 있으면 반드시 양지도 있는 법이다. 춘천의 맑은 공기와 물과 길이 나를 숨 쉬게 만들었다.
춘천은 사계절 내내 봄의 시내(春川)가 흐른다. 산과 계곡이 많아 깨끗하고 쾌적할 뿐 아니라 조용하고 순하다. 춘천의 낭만과 호반 때문일까, 시인 유안진은 춘천은 가을도 봄이라 했다. 봄은 산 너머 남촌 아닌 춘천에서 온다고도 했다.
비 온 뒤에 피어나는 공지천 물안개의 신비도 무어라 형언할 수 없다. 안갯속을 헤엄쳐 다닌다는 무어(황금비늘/ 이외수)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고, 격외선당이 아스라하게 보일 것만 같다.
의암호는 또 어떠한가. 다양한 모습으로 변모하는 호수는 보는 이의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호젓하게 마음의 눈으로 호수를 바라보면 내 안의 나를 만날 수 있다. 맑은 날 아침이면 명지바람에 부서지는 햇살로 웃음이 터진다. 비 내리는 오후에는 의암호로 떨어지는 빗줄기에 상념이 실리기도 한다. 춘천이 갖고 있는 호반의 아름다움은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다. 그래서 춘천을 언제나 봄이라고 하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