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이들에게 여행을 많이 하라고 말한다. 나의 딴 주머니 얘기도 들려준다. 여행은 혼자 가면 호젓하게 생각할 수 있어 좋고, 말이 통하는 사람과 함께 가면 즐거움이 공유되어서 좋다. 듣고 보고 겪은 것으로 삶이 풍성해질 뿐만 아니라 넉넉한 마음의 주인으로 남을 배려할 줄도 알게 된다. 그러니 여행의 이로움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지방자치단체에서 도보 여행자를 위해 정비한 길을 걷다 보면 엄지손가락을 쭉 올리게 된다. 정말 최고의 길들이 도처에 널려있다.
‘금오도 비렁길’은 광주, 서울, 여수, 춘천에 사는 네 사람이 함께 걸은 길이다. 여수에 사는 형님의 초청이었다. 한 곳이라도 더 보여주고 싶어 했던 형님의 열정은 KTX를 탄 언니와 나를 순천역에서 내리게 했다. 순천만국가정원을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여수에서 합류한 광주의 김 대장은 입담이 여전했다. 우리의 입 꼬리를 연신 귀에 걸게 한 이 센스쟁이가 동행자여서 기뻤다. 숙소는 형님의 배려로 ‘소노캄’으로 결정됐다. 평소 게스트하우스를 주로 이용하는 내 여행 스타일과는 달랐지만 형님을 잘 둔 덕에 편안한 잠자리가 배정된 것이다.
여수 신기항에서 금오도 비렁길을 걷기 위해 첫 배를 탔다. ‘비렁’은 벼랑의 사투리이다. 해안 절벽으로 섬을 한 바퀴 돌 수 있도록 생겨난 길은 바다를 끼고 있어 아름다웠다. 바람은 살랑거렸고 햇살은 바닷물에 부서져 반짝였다. 걷기에 최적의 날씨였다. 비렁길 트레킹은 함구미 선착장에서 장지마을까지 총 5코스가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아뿔싸! 길의 난이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마라도 같을 거라 여기고 스틱을 안 챙겨 온 내 자만과 어리석음을 자책했다.
마지막 5코스를 걸을 때는 모두의 다리가 풀려 있었다. 장지마을로 내려와 이름 없는 민박집 앞을 지날 때였다. “난 저기서 음료수라도 마시고 갈래. 더 이상은 못 걸어.” 형님이었다. 민박집에 딸린 조그만 점방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 한 마음으로 캔 맥주를 컵에 따라 들이켰다. 민박집 아주머니가 우릴 보더니 한 마디 했다.
“찬밥이라도 괜찮으면 한 술 뜨고 갈래요?”
“아유~, 그렇게 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형님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우리가 얼마나 지쳐 보였으면 밥 먹고 가라고 했을까. 찬밥 한 양재기에 김치, 고추장과 마른 멸치를 내 오셨다. 이토록 맛난 밥을 언제 먹어봤나 싶었다. 아주머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3코스에서 끝낸다며 5코스까지 모두 걸었다는 우리 얘기에 깜짝 놀라셨다. 그 말에 걸은 시간을 계산해 보니 얼추 8시간 30분이나 되었다. 인심 좋은 섬 주민 덕분에 금오도는 기분 좋은 섬이 되었다.
우리가 예약한 민박집은 바다가 집 앞까지 들어와 있는 최고의 해돋이 전망대였다. 나와 언니가 사용할 방은 본채의 2층으로 바다가 바로 내다보여 해돋이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형님과 김 대장은 별채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주인 할아버지의 퉁명스러움이 계속 신경 쓰였다. 민박집주인치곤 별스럽단 생각까지 들었다. 이튿날 아침, 해돋이를 보겠다고 일찍 밖으로 나왔더니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형님, 저 할아버지 왜 저런대요? 우릴 대하는 게 어제와 딴판이네. 정말 적응이 안 돼.”
“응~, 어젯밤에 김 대장하고 안방에 들어가 술 한 잔 했어. 우릴 이상한 사이라고 오해했었나 봐. 내가 산티아고 얘기부터 쭉 했더니 이핼 하시더라구. 그러니 이제 너무 신경 쓰지 마. 순수해서 그러신 거야”
“엥~! 우리가......”
그러고 보니 남자 둘, 여자 둘 아닌가. 낄낄거림을 멈출 수 없었다.
가뿐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해돋이는 빠르고 역동적이었다. 좋은 기운을 듬뿍 받은 것 같아 산뜻하고 뿌듯했다. 가끔 삶이 아프다고 느껴지면 이 길 위의 웃음을 꺼내 잿빛 기분을 덮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떠남의 즐거움은 떠나본 사람이 안다. 길 위에서 보내는 시간의 쏜살같음도 걸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낯선 길 위의 모든 것들이 내 영혼에 스며들면 나는 생기가 돈다. 그리고 그 힘은 또 다른 나를 찾아 움직이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사람은 사람을 통해 살아가기 때문이다. 떠남은 돌아옴이고 살아있음이다.
‘요슈타인 가이더’는 말했다. ‘행복이란 하늘이 푸르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단순하지 않을까?’라고.
그렇다. 마음의 불편을 털어낼 수 있는 정신의 올곧음이 삶을 만족스럽게 한다. 삶은 단순하고 행복은 자기만족임을 기억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