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마셨다. 비를 맞으며 앉아 있는 ‘평화의 소녀상’을 보는 순간 울컥해서 마셨고, 함께 움직이는 경희와 혜숙이 좋아서 마셨고, 수다에 취해 마신 줄 모르고 또 마셨다. 전주 한옥마을, 오목대, 경기전, 전동성당, 풍납문, 남부시장, 막걸리 골목을 순회했다. 흐렸고, 비 뿌렸고, 왁자지껄했다. 피순대에 모주를 마셨고, 막걸리 골목에선 막걸리보다 한풀이가 먼저 목젖을 울렸다. 낭인처럼 헐렁하게 돌아다니며 웃음을 흩뿌렸고, 한껏 여유를 부렸다. 말이 통하는 친구들과 길을 떠날 수 있음이 흐뭇했다. 시간이 있어도 여유가 없다면 이를 누릴 수 없다. 여유가 있어도 함께 나눌 이웃이 없다면 답답했던 속을 드러내 보일 수조차 없다. 누리고 즐기고 공감할 수 있었음은 길을 떠났기에 가능했다.
“백담사 가는 길을 함께 걷지 않을래요?” 강원한문고전연구소 소장님의 제안이었다. 걷기에 진심인 사람이 ‘인제 천리길’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중 한 코스인 ‘백담사 가는 길’을 제주 올레 완주자 팀에게 공개하는데 권 소장은 재능기부로 길의 해설을 맡았단다. 주변의 큰 바위에 옛 선비들의 각자(刻字)가 널려 있으니 충분히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길이었다. 이웃을 잘 둔 덕에 팀의 일원으로 참가하게 되었으니 이게 웬 횡재인가.
쌓인 눈이 겨울 트레킹의 참맛을 느끼게 했다. 귀가 얼얼하고 뺨에 와 닿는 바람은 맵싸했다. 설악산의 백담사 가는 길은 겨울에만 자유로운 걷기가 가능하다. 그 외 계절엔 백담사까지 셔틀버스가 운행돼 위험하기도 불편하기도 하다. 낯선 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점심으로 백담사에서 절밥을 먹으며 말까지 트니 마음이 한결 편안했다. 주최 측에서 준비한 해설가 접대 자리에서는 동행이란 명분으로 덩달아 귀빈 대접을 받았다. 황태구이와 메밀전병 안주로 더덕 막걸리를 한 잔 하니 마음이 둥실 떠오른다.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 숨통이 트인다. 사람과 사람의 어울림은 세상살이의 참맛이다.
딸이 보낸 오페라 티켓이 우리 가족에게 서울 나들이의 빌미를 제공했다. 스페인 작가 ‘호안 미로 특별전’에도 들리고, 맛난 곳에서 별미를 먹기도 했다. 내가 한창 기호학에 빠져 있던 시기였기에 기호학을 표현한 미로의 작품전은 특별했다. 공부에 대한 자극도 되었다. 빅토르 위고 원작 ‘노트르담 드 파리’는 좋은 좌석에 앉았음에도 불구하고 소설로 만났던 ‘콰지모도’와 ‘에스메랄다’가 튀어나와 몰입을 방해했다. 책 속 주인공 이미지와 오페라의 그것이 상충되어 다툼이 일어난 것이었다. 애써 이들을 다시 책 속으로 돌려보내자 비로소 오페라가 눈에 들어왔다.
나처럼 작은 도시에 사는 사람은 좋은 공연을 관람할 기회가 그리 많지 않다. 공연 문화가 익숙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니 아이들은 농익은 서울 쥐였고, 나와 남편은 누가 봐도 어리숙한 시골 쥐였다. 젊은이의 감각과 기성세대의 감성은 달랐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 서로 인정하면 이해되는 부분이다. 앞으로 점점 더 아이들은 우리와 다른 삶을 살 것이고, 우린 아이들과 속도를 맞추기 위해서 발발거릴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달팽이처럼’을 지향한다. 느리게 살기가 쉽지 않은 주문 같지만 삶의 속도를 늦추기 위해 마음을 다잡는 중이다. 너무 오랫동안 빠르게 달려왔기 때문이다.
요즘은 삶을 즐긴다. 예전처럼 스트레스로 몸살을 앓으며 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출이다. 가고 싶은 곳이나 하고 싶은 것에 대해 주저함이 없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이런 대담한 실행력에도 불구하고 정말 하고 싶었던 낮술 마시기는 기회가 오지 않았다. 나보고 술꾼이냐고? NO! 단지 이웃과 어울려 술 마시는 분위기를 좋아할 뿐이다. 긴장 풀어놓고 나누는 이야기 속 진심을 좋아한다. 암튼, 백주대낮에 술을 마시면 어떤 기분일지 정말 궁금했다. 삼천포에 사는 종군기자를 만났다.
“난 낮술 마셔보는 게 로망이야.”
“에이~, 누이!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갑시다.”
사천시 수협활어시장 통로에 테이블을 펴 길동무 넷이 낮술을 마셨다. 전어밤(전어의 간)의 쌉쌀함도, 가리비의 고소함도 이때 처음 알았다. 숨통이 뻥 뚫렸다. 신나 죽을 뻔했다. 그러다 혼자 피식 웃었다. ‘낮술 까짓 거 별 것 아니네.’
낮술을 마시면서 느꼈던 만족감은 행복의 다른 표정이었다.
인간은 관계의 동물이다. 너와 내가 만나 우리가 되었듯이 낯선 도시에서는 새로운 관계가 형성된다. 이 관계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행복의 마중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처 발견하지 못함은 먼 곳에서 행복을 찾기 때문이다. 마테를링크의 『파랑새』를 보라. 주인공인 ‘치르치르’와 ‘미치르’는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먼 길을 떠나지만 끝내 찾지 못한 채 지쳐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집에 돌아와 보니 그토록 찾아 헤매던 파랑새가 집에 있는 것이 아닌가.
나도 그랬다. 뙤약볕 속을 걷다가 만난 그늘이, 세찬 빗줄기를 막아주던 우산이, 땀을 씻어주던 바람이 내게는 행복이었다. 그걸 미처 몰랐다. 그래서 내가 길 위에 서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