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강아지 젖 먹자~. 우리 강아지 어딨 니? 우리 강아지, 우리 강아지...... ”
강아지는 우리 집 고양이 이름이다. 예전의 나는 고양이를 무척 무서워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들려주던 옛날이야기 속 고양이는 언제나 나빴다. 그 때문인지 고양이의 눈은 표독스러워 보였고, 울음소리는 소름 끼치게 싫었다. 아무리 예쁜 고양이라 해도 가까이 오면 질색을 했다. 그랬던 내가 변했다. 고양이의 엄마가 된 것이다.
어느 날 우리 집에 물에 빠진 생쥐 꼴의 아기 고양이가 들어왔다. 한국 고양이 코숏(Korea Short hair) 중에서도 ‘치즈 태비’였다. 시골집 마당 한 귀퉁이에서 길고양이가 낳은 새끼라며 아이들이 데려온 것이다. 조막만한 고양이는 결코 축복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어미 고양이가 솔개에게 죽임을 당해 새끼를 그대로 둘 수 없었다고 했다. 세 마리 중 두 마리는 이미 천사가 되어 하늘나라로 떠났고, 남은 한 마리도 그대로 두면 죽을 것 같아 데려왔단다. 나는 악을 써댔다. “도로 갖다 놔~. 우리 집에선 절대 못 기르니 도로 제 자리에 갖다 놔.” 아이들은 울며 사정을 했지만 고양이가 무서운 나는 기를 수 없었다. 하지만 행동은 어느새 마트에서 신생아용 젖병을 사고 있었다. 엄마 잃은 아기 고양이. 눈만 겨우 뜬 녀석을 아들 러닝셔츠에 돌돌 싸서 안고 신생아용 젖병에 고양이 분유를 타서 먹였다. 젖병 꼭지가 커서 제대로 빨지도 못했다. 아기 고양이용 젖병이 따로 있다고 생각지도 못할 만큼 무지했던 사람 엄마는 “아유~ 우리 강아지, 예쁜 강아지 어디 있니? 어서 와 젖 먹자~.”만 해댔다.
핏덩이 고양이는 자연스럽게 강아지가 되어 온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어미가 항문을 핥아주며 배변활동을 가르친다는데, 그런 보살핌을 받지 못한 강아지는 철저하게 아웃사이더였다. 배가 올챙이배처럼 부풀어도 응가를 할 줄 몰라 병원을 드나들었고, 쉬~를 편하게 하지 못해 아직도 신장 기능 활성 사료를 먹는다. 그러나 녀석은 사랑스러움의 상징이 되어 털을 휘날리며 온 집안을 휘젓는다. 누나처럼 앉아서 책상 위의 책을 읽고, 우리가 밥 먹을 땐 형아 옆에 앉아 코를 벌름거린다. 집은 천지사방 고양이털로 뒤덮였다. 올 블랙을 지향하는 아들아이는 언제나 강아지 털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티셔츠를 입고 다니지만 불평이 없다. 가장 큰 피해자는 우리 집의 진짜 강아지이다. 진짜 강아지는 고양이 강아지에 밀려 관심 밖으로 나간 지 오래지만 자리 탈환은 어려워 보인다. 자기가 사람인 줄 아는 고양이, 우리 강아지. 기고만장이 하늘을 찔러 만장이가 된 갑 중의 갑이다.
사람 사는 것도 이와 같지 않을까 싶다. 마음의 벽을 허물지 못해 스스로 보이지 않는 틀 안에 갇혀 살았던 나처럼 말이다.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는 게 재미없었다. 시집살이의 고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행복하지 않았다. 의무감과 책임감만 있는 쭉정이 같은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내 생활은 무조건적으로 시어머니의 일상에 맞춰져 있었다. 정신은 살아 있는데 나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더 힘들었다.
시어머님은 말씀하기를 좋아하셨다. 들어드릴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모두들 한 얘기를 또 하면서 끝없이 이어가는 어머님의 말씀에 질색을 했기 때문이다. 당신의 젊은 시절 얘기를 시작하면 언제나 말씀은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하도 많이 반복해서 들었기에 누구네 집에 수저가 몇 벌 있는지 까지 알 정도였다. 어느 날인가도 역시 당신의 삶을 회상하셨고, 나는 얘깃거리를 글로 써 보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곤 잊었다. 날씨 꿀꿀한 아침, 어머님은 하시던 말씀을 멈추시더니 가방을 뒤적이셨다. “니가 써보라고 해서......” 말끝을 흐리시더니 종이 한 장을 쓱 내미셨다.
산목연
윤익순
가뭄과 폭염 그리고 바람이 요란하게 지나가고
목연나무에 잎이 피고 어느새 예뿐꽃도 피였읍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인연의 시간이 다하여 낙엽잎이 떠러저
땅에 나뒹구는 나겹처럼 제 마음 한구석이 허전합니다
막 나무에서 떨어저 어쩔줄모르는 나겹처럼 쓸쓸하고 황페합니다
이별의 허전함을 견디고나면 마음이 무더질까요
심심해서 써 본 것이라 하셨다. 그렇게 나를 힘들게 하시던 분도 외로움을 타는구나 싶어 콧날이 시큰거렸다.
우리 어머니는 내가 도서관장으로 승진했을 때, “네가 내 소원을 풀어줬다.”며 기뻐하셨다. 체면을 중요하게 여기던 분이라서 당신 며느리가 기관장이 되었기에 어깨를 한껏 올렸던 것이다. 도서관장이 되고 며칠이 지나서였다.
“너, 동네 사람들이 점심을 낸다는데 나올 수 있겠니?”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난 죽었다 깨어나도 마을에 플래카드가 걸리고, 축하잔치를 열고, 그곳의 주인공이 되고, 그런 것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어머니, 제가 용돈을 드릴 테니 어머니께서 맛난 음식을 내세요.”
결국 어머님, 아버님께 각각 용돈을 드리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마음 여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아 세상살이가 어려울 때가 있다. 여전히 어머님에 대한 섭섭함이 남아 있고 그 섭섭함은 때때로 가슴을 후벼 판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물어야 내 삶이 편안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어머니와 나를 위해 나아가야 한다. 결코 쉽지 않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