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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람 Oct 18. 2023

삶의 속도를 늦췄더니 들꽃이 보였다

봄 드름산

아랫녘에서 만났던 봄이 따라왔나 보다. 코로나를 피해 걷던 호젓한 산길에서 산수유와 진달래가 마음을 흔든다. 봄빛이 온 산을 채웠다. 생동의 빛은 좋은 기운을 뿜어 올렸고, 물 오른 나뭇가지는 기지개를 켠다. 나무 등걸에 앉아 봄볕을 만끽했다. 기분 좋은 오후에 걷는 발걸음에 힘이 들어갔다.

느끼는 것과 만나는 것은 완연히 다르다. 마음속의 봄은 아직 멀기만 한데, 산속의 봄은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었다. 오랜만에 밟는 흙의 촉감이 부드러워 발걸음이 가볍다. 산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땅의 생동감이 오감을 자극한다. 겨울바람에 말라버린 나뭇잎 밑에선 봄바람 타고 온 연초록이 고개를 내밀고, 오랜만에 만난 흰 제비꽃은 어린아이 닮은 미소를 짓게 한다. 요즘은 꽃 대궐로 들어가는 객의 입장에서 산을 만난다.


자연은 나갈 때와 들어갈 때를 안다. 4월 초에 흐드러졌던 산수유와 보름 전에 만났던 진달래는 어디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지난 주말에 걷던 벚꽃 길도 간 곳을 모르겠다. 도심 속의 철쭉과는 차원이 다른 산철쭉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꽃잎의 곡선이며 분홍 같지 않은 연분홍이 눈길을 끈다. 우아하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봄의 향연에 마음이 충만해졌다. 다음 주에 다시 이 길 위에 선다면 초록은 마치 초록물이라도 뿌리려는 듯 더욱 짙고 풍성해져 있을 것이다. 인간의 심성이 자연을 닮았으면 좋겠다. 밟고 밟히는 세상이 아닌, ‘더불어’가 돋보이는 세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어제의 봄볕을 못 잊어 커피를 내려서 다시 드름산으로 들어갔다. 새소리에 취해 내가 산인 줄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흥취를 깨는 무언가가 눈에 확 들어왔다. 두름산의 끝자락, 의암호가 바라보이는 전망대를 중심으로 꽤 넓은 주변이 불에 타 버렸다. 매캐한 냄새가 남아 있고 소방용 호스가 널려 있는 걸 보니 밤사이 불이 났었나 보았다. 너무 놀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새소리 여전하고, 바람 역시 어제의 것과 같은데 알고 있던 그 산이 아니었다. 인간의 부주의와 이기심의 결과가 재앙이 되었다. 씁쓸한 기분으로 커피를 마신다. 눈치 없는 커피 향은  어쩌자고 이렇게 자기의 매력을 마음껏 발산한단 말인가.      


여름 드름산

더위가 기승이다. 폭염주의보까지 내렸으니 날씨가 이상하다. 주섬주섬 배낭을 챙겨 메고 작열하는 태양을 피해 산속으로 들어갔다. 아마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제정신이 아닌 줄 알 거다. 뜨거움이 절정을 이룬 한낮에 집을 나섰으니 말이다.

산길은 더위가 무색하다. 이 서늘함은 몸을 움직일 줄 아는 사람만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산을 채운 새들의 지저귐이 영롱하다. 신의 섭리에 순응하는 자연의 변화도 멋지다. 계절의 향연에 반응하는 나 자신과 내게 주어진 이 시간이 귀하다. 햇살 부서지는 오솔길에서 만나는 바람은 또 어떠한가. 상쾌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의암봉에서 암벽 등반 팀의 곡예 등반과 수상스키 팀의 물살 가름을 넋 놓고 바라보다 정신을 차린다. 초록이 빛난다. 하루가 찬란하다. 온 산을 뒤덮은 산새들의 지저귐과 들꽃의 수줍음에 나도 덩달아 자연인이 된다. 사람 없는 빈산은 온통 내 세상이다. 이런 날은 느긋하게 책 한 권 끼고 앉아 산속에서 시간을 낚는 신선이 되고 싶다. 암벽 등반 팀의 진귀한 바위 타기를 구경하다 손풍기로 바람을 일으키니 비구름이 몰려온다. 주섬주섬 자리를 털며 ‘내가 혹시 손오공의 후예인가?’ 엉뚱한 생각을 한다.      


가을 드름산

볕을 받은 대지는 발랄하고 가을 들꽃이 뿌리는 향기는 무거운 세상을 위로하는 향연이다. 빛으로 다가온 가을 아침에 두름산을 거쳐 의암봉까지 능선을 따라 걸었다. 내가 좋아하는 하슬라 님 부부가 동행했다. 우리의 준비물은 웃음 한 줌과 여유 한 사발이었다. 계절에 걸맞게 가뿐한 발걸음을 내딛는데 웃음소리와 새들의 수다가 경쟁하듯 온 산을 채웠다.

평일의 산행은 참 좋다. 사람이 거의 없어 어떻게 걸어도 자유롭다. 남의눈을 의식하지 않고 나무 등걸에 앉아 토종오이를 먹었다. 아삭 거림과 청량감을 어찌 표현해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신토불이, 역시 우리 것이 최고이다.

산길을 걷고 내려와 가볍게 점심을 먹는 일정이었다. 그랬건만 ‘수다는 길~게, 점심은 든든히’가 되었다. 산 주변에 독립운동가 김경달의 후손이 하는 삼계탕 집이 있단다. 정보를 들고 온 하슬라 님의 제안을 내가 넙죽 받아들였다. 그녀가 지갑을 풀었다. 부모님의 대를 이어 따님이 운영한다는 삼계탕 집은 큰길에서 벗어나 있는 오래된 기와집이었다. 녹두와 견과류를 넉넉히 넣어 갈아 국물에 고소함을 추가한 때문인지 꾸준히 손님이 들어왔다. 눈 밝은 이들이 많이 찾아와 나라를 위해 헌신한 분의 후손이 돈 걱정 안 하고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겨울 두름산

첫눈이 내린 기념으로 옷차림을 든든히 하고 남편과 둘이 산길로 들어섰다. 나이를 먹어도 마음속엔 어린아이가 살고 있나 보다. 함박눈을 맞으며 걸으니 기분이 좋아진다. 그런데 산은 텅 비어 있다. 빈산을 우리 내외의 온기로 채우며 자박자박 걸었다.

시인 나태주는 풀꽃은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고 했다. 나의 눈(雪)을 보는 눈(目)이 그러했다. 소복소복 쌓이는 모습과 고결함이 보면 볼수록 눈이 부시게 사랑스러웠다. 그 덕에 첫눈을 맞으며 걷는 즐거움을 온몸으로 누렸다. 자연이 내게 동화됐고, 나는 자연에 동화되었다. 물아일체(物我一體)였고 달콤한 기쁨이었다.     


드름산은 우리 집 가까이에 있는 나지막한 산(357.4m)이다. 과히 높지 않지만 의암봉까지 연결되어 변화 있는 산길을 걸을 수 있다. 울울창창한 나무와 이름 모를 들꽃과 새들이 어우러진 산길을 걷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마음이 무장 해제된다. 이러니 내가 어찌 산을 좋아하지 않겠는가. 마음이 어지러울 때면 아무 말 없이 불쑥 찾아가도 묵묵히 품어주는 산, 침묵하는 산이 그곳에 있어 내 삶의 질서가 유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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