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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람 Feb 05. 2024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 걷기 14일 차 -

발목이 매운 듯 묘한 통증이 왔다. 어젯밤 근육이완제로 마사지를 한 효과인지, 수지침의 효과인지 모르겠다. 부디 좋은 징조이기만을 바란다.

오늘도 날씨는 별로다. 비 내리고 바람 불고 흐려서 기분 관리를 잘해야 한다.

운전기사의 기기묘묘한 운전 솜씨에 감탄하며 다음 마을로 이동하는 길, 완연한 가을이 펼쳐진다. 나도 가을 속으로 걸어가야 하는데......     

 

가을은 나를 감상에 빠지게 한다. 세월이 흐르며 감정이 많이 가벼워졌지만 젊은 시절엔 가을을 심하게 앓았다. 생각에 빠져 버스 정거장 한두 곳 건너뛰는 건 예삿일이었다. 거센 비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을 보니 새삼스레 내 모습이 부각된다. 얼른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여수 형님은 발이 다 나았는지 엄청 씩씩하게 걷는다. 이 형님은 아침에 빵 먹고 약 먹지 말라며 자신이 먹으려고 갖고 온 누룽지를 내게 나눠준 사람이다. 그 마음이 고마워 커피 한 잔 대접하려 하지만 번번이 기회를 놓친다. 놀 줄도 모르고 오로지 일만 열심히 한 전형적인 한국의 아버지인 이 형님은 만나고, 헤어지고, 같은 숙소에 묵고 하다 보니 친 동기간 같이 느껴져 이젠 말도 막 놓게 된다.     

 

재능기부로 수지침을 놓아주던 ‘들꽃 바람 부부’도 기억에 남는 분들이다. 오늘도 약속이나 한 듯이 같은 알베르게에서 다시 만났다. 그들은 저녁에 자신들의 방으로 오면 다시 침을 놓아주겠다며 방 번호를 가르쳐주었다. 전기장판이 깔린 담요 위에서 수지침을 맞는 동안 너무 따뜻하고 포근했다. 나도 모르게 까무룩 잠이 들었나 보았다. 깨어나니 몸은 개운한데 좀 민망했다. 내가 그들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너무 곤하게 잠들어 있어 깨우지 않았단다. 이 고마운 부부는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다음날 아침, 알베르게 현관에서 만난 부부는 내 발 걱정을 해주며 빗속에 먼저 출발했다. 남편이 나와 나이가 같아 그동안 대하기가 편했는데, 오늘은 침을 맞고도 좋아지지 않은 발 때문에 괜히 마주 보기가 미안했다.      

라푼젤 언니는 여전히 나의 좋은 길동무이다. 서울깍쟁이 같이 깔끔하고 예쁜, 그러나 얼굴보다 마음이 훨씬 넓고 예쁜 이 언니는 그림자처럼 내 옆에서 함께 걷고 함께 쉰다. 무지외반증으로 발가락마다 테이핑을 하고 걸어야 하는 언니지만 젊은이 못지않은 정신력의 소유자다.       


전 부장과 김 대리, 이 두 사람은 내 보호자를 자처한다. 전 부장은 아침마다 발목에 테이핑을 해 주고, 알베르게에서 냄비 밥에 제육볶음 등 우리 음식을 해 주기도 한다. 김 대리는 근육 연고로 아픈 발목을 마사지해 준다. 말이 좋아 마사지지 나는 아파서 쩔쩔매면서 이를 악물고 통증을 참기 일쑤이다. 챙겨주려는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전혀 모르던 사람들이 기꺼이 도와주고 걱정해 주며 떠나길 반복하는 사이 내 속에는 고마웠던 사람에 대한 기억이 차곡차곡 쌓인다. 이들의 배려로 아직도 길 위에서 건재하다.       

 

작은 마을을 지날 때였다. 알베르게로 보이는 소박한 집의 창문턱이 눈에 들어왔다. 낡은 등산화 한 켤레가 가을을 안고 앉아 있었다. 쥔장의 센스에 미소가 지어졌다. 가을을 만끽하던 길이 어느새 가을의 끝자락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신발 속에 피었던 가을꽃은 이미 시들었고 잎사귀에는 단풍이 들었다. 자연의 섭리가 흐르는 물과 같이 자연스러워 들창코처럼 들린 신발의 앞 축도, 시든 꽃잎도 겨울을 향해 가고 있다.

지금의 나도 그렇다. 순례 길을 걷기 시작할 때와 옷차림이 달라졌다. 얇은 셔츠 한 장으로 하루를 나던 일상에서 어떤 날은 얇은 패딩을 꺼내거나 비니를 쓰기도 한다.      


겨울 순례 길은 마을마다 있는 알베르게가 대부분 문을 닫은 채 겨울잠 자기에 들어간단다. 그 바람에 순례자들은 잠자리를 구하기 위해 문 연 알베르게를 수소문해야 한단다. 참 다행이다. 겨울이 오기 전에 순례길 걷기가 끝날 수 있을 테니.


불현듯 나이가 의식된다. 내 삶도 이미 가을이다. 인생의 겨울 채비를 잘해서 건강한 노년과 만나고 싶다. 내 인생의 겨울을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과 어우렁더우렁 살아가고 싶다. 그러기 위해 지금 나는 낯선 길 위에서 생각을 정리한다. 살아온 날들과 살아갈 날들에 대해.  


알베르게를 나서며 방명록에 기록을 남겼다. 더도 덜도 없이 지금처럼 마음의 평온이 지속되길 바란다.      

   

‘한 걸음 한 걸음 소중한 걸음들이 까미노를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참 감사합니다. 이렇게 편안한 쉼터를 제공해 주어서. 잊지 않겠습니다. 오늘의 이 마음과 생각을, 그리고 곧 다가올 내 삶의 겨울을...... 부엔 까미노!’     


* 걷기 14일 차 (오르니요스 델 까미노~ 가스트로헤리스(Castrojeriz) 21km / 누적거리 334.5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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