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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람 Feb 03. 2024

야매로 침을 맞다

- 걷기 13일 차 -

부르고스 이후 시작된 황량한 메세타고원은 평균 600~700m의 고도를 따라가는 길이다. 팔레시아주를 걷는 182km가 고원지대이기 때문이다. 

레온까지 지평선으로 이어지는 이 길의 건조함과 지루함은 마치 내 기분처럼 메마르고 삭막하다. 오늘 제니퍼가 순례길을 벗어나기 때문에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길은 광활한 풍경 때문에라도 즐기기를 놓치면 안 될 길이다. 동시에 다시 초원지대가 나타날 때까지 견뎌야 할 인내와 끈기의 길이기도 하다.   

       

부르고스를 떠나며 제니퍼와 작별을 했다. 병원에서, 길 위에서, 알베르게에서 끊임없이 도움을 주던 까미노 천사가 스페인에서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은 나의 진심이다. 쓸쓸하고 공허하다. 그동안 제니퍼에게 너무 많이 의지했었나 보다. 함께 걸으며 들었던 마을 이야기들은 무척 중요한 정보였다. 그곳 성당만의 특징이나 마을의 유래를 들려주면 귀를 쫑긋거릴 만큼 흥미로웠다. 당연히 순례길 위에서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런 제니퍼가 남편이 있는 집으로 돌아간다니 힘이 빠진다.  

      

제니퍼는 스페인 사람인 남편과 순례길 위의 한 도시에 살고 있는 화교이다. 한때는 우리나라에서 살았지만 한국을 떠난 지 꽤 오래됐다고 했다. 작은 체격으로 당차고 거침없이 걷는 모습을 보면 엄지손가락이 쭉 올라갈 만큼 거침이 없다. 인정은 또 어찌나 많은지 발이 불편한 내게 도움이 될 것 같으면 무엇이든 챙겨주려 했다. 난 그저 한국으로 나오면 맛난 밥 한 끼는 꼭 대접하고 싶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오르니요스 델 까미노를 향해 가다 커피 한 잔을 마시려고 Bar에 들어갔다. 아침에 알베르게를 먼저 출발했던 한국인 부부가 이미 들어와 쉬고 있었다. 처음 만난 날 그들은 자칭 ‘들꽃 바람 부부’라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남편은 방송국 PD를 하다가 퇴직했고 아내는 사립 작은 도서관을 운영한다고 했다. 

절뚝거리며 의자에 앉으니 부부 눈에 내가 딱해 보였나 보다. 남편이 야매(?) 임을 강조하며 수지침을 놓아주겠단다. 다리가 좋아진다면 어떤 치료인들 마다하랴. 바의 의자 위에 발을 올리고 압박붕대를 풀어 보니 발등과 발목이 소복하게 부어 있다. 순간 더 나빠질까 봐 걱정이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소염진통제 먹는 것과 마인드 컨트롤 밖에 없다. 

     

부어오른 발에 생각지도 않았던 침을 맞는다. 아픈 왼발에는 여러 개를, 안 아픈 오른발에는 발등과 발목에만. 따끔거리며 바늘이 들어갈 때마다 곧 좋아질 거라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들꽃 바람 부부의 남편은 수지침으로 아내의 컨디션을 유지시킨다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다리 문제로 의기소침해 있던 나는 정말 부러웠다. ‘저 아내는 좋겠다. 남편이 저렇게까지 챙겨주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곧 머리를 흔들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나는 남편과 함께 이 길을 걷고 싶지는 않다. 만약 남편도 나처럼 걷기를 희망했다면 다른 일정으로 각자 걷자고 말했을 것이다. 이 길은 스스로 어려움을 극복하며 자기 의지대로 걸어야 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마운 마음에 커피 값을 내겠다고 했지만 부부는 이미 계산했다며 손을 흔들고 떠나갔다. 나는 조금 더 머물다 일어설 것이다. 사람 좋아 보이는 Bar의 사장이 나를 향해 웃는다. 무언의 응원으로 느껴졌다.     


오늘은 오르니요스 델 까미노(Hornillos del Camino)라는 아주 조그만 마을에서 묵는다. 어디서나 그래왔지만 이번에도 침상은 배정되는 대로 오케이다. 단 1층이어야 한다. 나는 아직까지 2층은 오르내릴 수가 없다. 그러나 눈에 보이진 않으나 느낌으로 알 수 있다. 계속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국내에서 여러 이웃이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중 한 메시지를 읽다가 ‘쿡’하고 웃는다. 사진을 보니 발이 너무 못 생겼다며 ‘발이 안 예뻐서 공평하다’는 내용이었다. 웃음이 히죽히죽 나왔다. 모두 감사하다. 이런 이웃들의 좋은 기운으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갈 것이다. 기분 좋게 완주증을 들고 인증 사진도 남길 것이다.

기다려라 까미노! 내가 곧 만나러 갈 테니.     


* 걷기 13일 차 (부르고스~ 오르니요스 델 까미노(Hornillos del Camino)) 21.5km / 누적거리 313.5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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