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글로 기록합니다.
팬티 입은 늑대를 탓하며 나를 몰아세우던 밤
아주 유명한 그림책 시리즈, 팬티 입은 늑대.
무시무시한 외모 덕에 동물 친구들의 공포 대상이지만,
그가 품은 진짜 모습은 완전히 다른 방향이다.
두 번째 시리즈에서도 늑대의 등장은 심상치 않다.
“거시기가 꽁꽁 얼겠네.”
아이들에게는 웃음 요소일지 몰라도, 성인인 나에게는 모호하고 오해의 소지가 큰 문장으로 다가왔다.
늑대가 무엇을 표현하려는 것인지, 어디가 불편한 것인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말 한마디였다.
여기에 과격해 보이는 행동까지 더해지니,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임에도 나는 묘한 불편함을 느꼈다.
왜 이 주인공 늑대는 이렇게밖에 말하지 못할까.
조금 더 공손할 수는 없을까.
상대방을 배려하는 말투를 쓸 수는 없는 걸까.
하브루타 내내 마음속의 거북함이 계속 남았다.
나는 왜 늑대를 못마땅하게 생각할까?
하루 종일 그 이유를 찾지 못한 채 잠자리에 들기 전, 문득 깨달았다.
나는 늑대를 나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었구나.
누군가는 화를 낼 수도 있고,
누군가는 말투가 거칠 수도 있다.
그런 사람도, 그런 늑대도 있을 법인데,
나는 그를 ‘모범적인 주인공’의 틀에 억지로 끼워 넣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림책의 마지막에서는 늑대의 말투와 행동이 충분히 이해되는 이유가 드러난다.
그럼에도 나는 그 모습을 쉽게 수긍하지 못했다.
생각해 보니 그것은 내 삶의 태도와도 닮아 있었다.
나는 언제나 ‘좋은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고 믿어왔다.
아이들에게는 좋은 엄마,
주변에게는 착한 사람,
친구들에게는 흠잡을 데 없는 인간.
그러다 보니 내 말 한마디에 누군가의 표정이 살짝만 굳어도
바로 나를 탓했다.
“괜히 말했다.”
“자랑처럼 들렸나?”
“내가 분위기를 무겁게 만든 건 아닐까?”
사실 나를 괴롭힌 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완벽해야 한다는 틀,
온화해야 한다는 틀,
늘 모범적이어야 한다는 틀.
늑대를 향한 불편함은 결국 나를 향한 불편함이었다.
그 생각을 인정하자, 마음 어디선가 묵직한 것이 스르르 내려앉았다.
그래, 그냥 나는 나로 있으면 된다.
조금 부족해도 괜찮고,
생각이 많아도 괜찮고,
어쩌다 말실수를 해도 괜찮다.
오늘도 나는 힘겨운 작은 싸움을 했다.
하지만 그 싸움 끝에서
또 다른 나를 받아들이는 한 걸음을 내디뎠다.
잘했다.
그렇게 스스로를 토닥이며 잠든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