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의 비극성

프란츠 카프카 <변신>

by 밝은 숲

어느 날 아침 불안한 잠에서 깬 그레고르는 벌레로 변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단단한 등껍질을 가지고 여러 개의 다리가 달린 흉측한 모습의 갑충류다.


벌레로 변한 그의 모습을 본 가족들은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는 그를 걷어차 방으로 몰아넣었고 어머니는 실신했다. 여동생이 하루에 두 번 그에게 식사를 가져다주었다. 여동생이 음식을 가져올 때마다 그레고르는 소파 밑에 숨어 자신의 흉측한 모습을 여동생이 보지 않도록 배려했다.


그동안 그레고르가 벌어오는 돈으로 생활했던 가족들은 이제 돈을 벌어야 했다.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아버지는 은행안내원으로 여동생은 점원으로 취직했다. 뼈 빠지게 일하고 피곤에 찌든 생활을 하게 된 가족들은 그레고르의 존재를 잊은 듯 했다. 그레고르의 방은 먼지 쌓인 창고가 되고 식사도 제대로 못 하는 그레고르는 하루하루 말라간다.


어느 날 하숙인들 앞에서 연주하는 여동생의 바이올린 소리가 아름다워 그레고르는 자신도 모르게 거실로 나왔다. 그레고르의 흉측한 모습을 하숙인들에게 들키자 아버지는 그를 향해 사과를 마구 집어던졌다. 그로 인해 등에 심각한 부상을 입고 그레고르는 비쩍 마른 채 숨을 거둔다.


그레고르의 방에서 파출부는 벌레 한 마리를 치우고 가족들은 모른 척한다. 텅 빈 그레고르의 방을 보고 그들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교외로 나가는 기차를 타고 미래의 아름다운 전망을 꿈꾸면서 봄 나들이를 한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서 나는 소외를 읽는다. 소외로 인해 죽어간 그레고르의 비극적인 결말과 흉측한 벌레보다 더 끔찍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암담한 가족의 풍경을 읽는다.


철학적인 의미에서 자기 소외는 인간이 자기 본질을 상실하여 비인간적인 상태에 놓이는 일을 말하는데 그레고르가 어느 날 갑자기 벌레로 변한 것을 나는 자기소외의 결과물로 본다.


그레고르는 왜 끔찍하고도 흉측한 모습의 벌레로 변했을까.


그는 침대에 누워 벌레로 변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여러 가지 상념에 사로잡힌다. 그는 새벽 5시 기차를 타고 출장지에 가서 물건을 팔아야 하는 출장 영업사원이다. 집안의 빚을 갚아야 하고 나이 든 부모님을 대신해 가장 노릇을 하며 5년 동안 쉼 없이 살아왔다. 덕분에 승진도 빨랐고 큰 집으로 이사도 하고 여동생을 음악원에 보낼 계획까지 세우고 있다.


하지만 그의 일상은 너무나 무미건조하고 피곤하며 고달프다. 열심히 쉬지 않고 일하는 그에게 회사는 칭찬이나 인정 대신 비난하거나 감시하거나 협박한다. 그래서 벌레로 변한 그날 아침 그는 “악마여, 제발 이 모든 것들을 다 가져가다오.”라고 외친다.


가족들은 그레고르의 가장 노릇을 고마워했다. 무기력한 아버지는 아침에 오래도록 신문을 읽고 어머니와 동생은 여유롭게 지내고 하녀는 집안인을 했다. 가족들을 불행에서 구하고 행복하게 해 주고 싶은 그레고르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벌레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가족들은 언젠가부터 고마움을 잊고 이런 일상에 익숙해져서 평생토록 그렇게 살고 싶어 했다. 그레고르는 항상 과로에 시달리고 무미건조한 인간관계에 진절머리가 났다.


그런 그레고르의 괴로운 마음과 피폐해진 정신과 메말라가는 감정의 작용이 자기 고유의 모습들인 생기있고 온정있는 마음들을 사라지게 해 흉측한 벌레의 모습으로 형상화된 게 아닐까. 고달프고 끔찍하고 외롭고 우울한 그레고르 내면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변신> 속에서 소외는 자기소외뿐 아니라 가족들이 그레고르를 소외시키는 모습에서도 보여진다. 아들이 벌레가 된 모습을 보고 아버지 잠자 씨는 그레고르를 방 안에 가둔다. 아들의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모습과 부정하고 싶은 현실과 피하고 싶은 마음이 결합돼 그를 방에서 나오지 못하게 한다. 어쩌다 그레고르가 방에서 나오면 아들을 가차 없이 공격한다. 살기 어린 폭력을 행사할 정도로 아버지는 아들을 소외시킨다.


어머니는 벌레로 변한 아들의 모습에 실신하고 끔찍해하고 역시 회피한다. 아들을 만나러 방에 들어오지 않으며 이해하고 소통하려 하지 않는다. 그레고르가 가장 아끼는 여동생, 그녀는 유일하게 그레고르의 방을 치우고 음식을 가져다주는데 그녀 역시 벌레로 변한 오빠를 끔찍하고 흉측한 괴물로 생각한다. 그래서 그녀의 배려는 변덕스럽고 그녀의 속마음은 오빠가 제 발로 떠나 주기를 바라는 데 있다.


가족들은 그런 식으로 무능력해진 그레고르를 철저히 소외시켰다. 누구도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와 소통하고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가족들에게 그레고르는 비참하고 구역질 나는 존재로 비쳤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인가 가족들은 그가 제 발로 집을 나가기를 바랐다. 그러한 가족들의 생각을 여동생의 입으로 듣고 그레고르는 먼지투성이인 자신의 방에서 벌레의 모습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그레고르가 죽자 가족들은 장례를 치르는 대신 나들이를 가는데 나는 이 대목에서 그레고르가 아니라 잠자 씨네 가족이 흉측한 벌레가 아닌가, 생각되었다. 그레고르의 가족 중 한 명이라도 벌레로 변한 그를 불쌍히 여기고 그와 눈을 맞추고 소통하려는 노력을 했다면 그레고르는 어느 날 다시 눈을 뜨고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지 않을까. 나는 상상해 본다.


카프카가 110여 년 전에 창조해 낸 그레고르는 허구적 인물로만 읽히지 않는다. 그때로부터 더 첨예화된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우리의 삶이 더 풍요로와졌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풍요와 안락을 누리는 만큼 그와 반비례적으로 인간성은 상실되고 정신은 피폐해지고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너무 많아져서이다.


그레고르는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 돈을 벌었지만 그 속에서 자신을 소외시켰다. 가족들 역시 벌레가 된 그레고르를 소외시켜 그를 죽게 했다. 그레고르의 가족들 중 누군가가 그레고르처럼 된다면 그 역시 그레고르처럼 소외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소외는 끊임없이 무섭도록 재생산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카프카의 <변신>에서 소외로 인한 생의 비극적 악순환을 본다. 어둡고 차갑고 무섭고 끔찍한 세계가 아닐 수 없다.






* 위 사진은 문학동네에서 발행한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에 실린 루이스 스카파티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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