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무십일 - 윤영감 가족의 비극

이문구 <관촌수필> (문학과지성사)

by 밝은 숲

이문구의 <관촌수필> 중 두 번째 이야기 ‘화무십일’은 1972년 10월 <신동아>에 발표된 소설이다. ‘화무십일’은 전쟁을 겪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 그중에서도 윤영감 일가의 비극적인 이야기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오월의 입하 즈음은 연둣빛 신록이 절정을 이루는 나들이하기 좋은 계절로 인식되지만 70여 년 전, 전쟁의 생지옥 속에서 살아남은 이들에게 봄은 주린 배를 움켜쥐며 우물물로 허기를 달래고 보리 이삭이 패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인고의 시간이었다. 더구나 전쟁의 여파로 곡기 끊긴 집이 많아 부황 들고 채독 든 사람들이 흔했는데 다행히도 관촌마을은 갯벌이 코앞이라 굶어 죽은 사람은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갯벌에 나가 게를 잡고 조개를 캐고 고둥과 파래를 뜯어 연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6.25 전쟁은 소설 속 어린 화자의 집을 무너뜨렸다. 전쟁을 겪으며 아버지와 두 형, 그리고 할아버지까지 3대의 피붙이를 모두 잃었다. 피난 갔다 돌아온 집 안은 치안대가 농작물을 모조리 압수해 가 먹을 것이 남아 있지 않았고 장독대는 비어져있고 숟가락 하나 남아있지 않은 폐허였다.


어머니와 어린 화자가 살기 위해 찾아낸 방도는 서원에 부탁해 보는 거였다. 서원에서는 고인이 된 할아버지에 대한 추념으로 장리쌀을 내주었는데 그 덕분에 굶주림은 면할 수 있었다.


마을에서 허우대 좋기로 으뜸인 집이라 더구나 가족들 대부분이 고인이 되어 텅 비어 있는 집인지라 어린 화자의 집에는 하룻밤 신세 좀 지겠다는 피난민들로 늘 붐볐다.


그중에 윤영감네 가족이 있었다. 귀밑머리가 허연 윤영감, 턱 밑이 안 보이게 등이 굽은 노파인 아내, 스무 살 남짓한 며느리, 어린 손자 솔이, 그리고 징집을 피해 숨어 있다 나중에서야 나타난 스물여섯의 아들 학로까지 다섯 가족이었다.


식량이 떨어져 길을 떠날 수 없게 된 윤영감은 머물기를 청했고 어머니는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머슴이 필요했으므로 윤영감네 가족은 문간방에서 지내게 되었다. 윤영감은 부지런해서 알아서 일거리를 찾았고 노파는 품팔이를 했고 며느리는 읍내 여관에서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며느리의 외박이 잦아졌다. 밤마다 싸우는 소리가 들리고 징집을 피해 있다 돌아온 아들 학로는 의처증이 생겼다. 솔이 엄마는 시부모의 꾸중과 만류도 듣지 않고 남편에게 장작개비 찜질을 당하면서도 여관을 나갔다.


마을 사람들은 솔이 엄마를 놓고 쑥덕거렸고 학로는 솔이 엄마의 머리를 깎아 집 안에 들어앉혔다. 손재주가 있는 학로는 객공살이를 하며 원반, 개다리소반, 책상반, 교자상 등을 만들어 생활비를 벌었다. 윤영감네 가족에게도 평화가 온 듯했다.


하지만 솔이 엄마의 바람기는 잦아들지 않았고 학로의 의처증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학로는 이틀이 멀다 하고 아내를 족치며 몽둥이를 들었고 솔이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더구나 아내의 정부인 장돌뱅이 서울 사내가 솔이 엄마가 일하는 여관에 하숙을 정한 채 버티고 있어 학로의 폭력은 더욱 광적으로 변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솔이 엄마가 집을 나갔다. 장돌뱅이 서울 사내도 없어졌다. 더구나 솔이 엄마는 젖먹이인 솔이를 데리고 나갔다. 그 일이 있고 보름이 지나 학로는 밤나무 가지에 목을 매달았다.


아들을 허망하게 보내고 손자와는 생이별하게 된 윤영감 내외는 무서리 치는 계절에 길을 떠났다. 아들을 가슴에 묻고 아들이 만든 소반들을 등에 짊어지고 길을 나섰다. 솔이를 못 찾으면 살아도 죽은 목숨이기에 잃어버린 손자를 찾기 위해 소반장수로 나선다고 했다.


서울에 가서 집집마다 대문을 두들기고 주인 여자마다 직접 만나보려면 소반장수 만한 것이 있겠냐며 눈물지었다. 두 노인은 등에도 마음에도 무거운 짐을 진 채 가 닿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곳을 향해 길을 떠났다.


1941년 생인 작가는 10살 때 6.25 전쟁을 경험하면서 전쟁이 할퀴고 간 자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굶주림을 이야기하고 전쟁 중에도 살아남은 젊은이가 자살을 한 사건에 대해 썼다. '화무십일'은 작가가 실제 경험한 것을 토대로 쓰인 이야긴데 현실은 허구보다 더 비극이어서 안타깝기 이를 데 없다.


더구나 윤영감은 아들의 징집을 피하려 온갖 위험과 수고를 감수하고 살려냈는데 그런 아들이 자살을 했으니... 그 참담함이 독자의 마음에 생생히 전해진다.


서울로 올라간 윤영감은 며느리인 솔이 엄마를 만났을까, 아니 손자 솔이와 재회했을까. 등에 봇짐을 잔뜩 진 늙고 추레한 소반장수를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자세히 바라보게 된다는 소설 속 화자의 심정이 독자인 내게도 안타깝게 와닿는다.


전쟁 중에도 지켰던 외아들을 잃고 손자마저 어디 있는지 알 길이 없어 등에 무거운 짐을 잔뜩 진 채 생이별한 손자를 찾아 이 거리 저 거리를 밤낮없이 헤매고 다녔을 초라한 행색의 윤영감 모습이 눈에 보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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