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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한 Sep 06. 2022

브런치는 나에게 부담을 줬어

글을 쓰면서 일상의 모든 것들이 글감으로 보이기 시작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24시간을 사는데 무료한 건 무료한 거고. 기억 나지 않을만큼 사소한 일들은 흘려보낸 채로 살고 있다. 하루를 압축했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것, 가장 강렬하게 떠올랐던 생각을 글로 쓰려고 하는데, 요번에는 며칠동안은 재밌다가 일주일만에 한계를 깨달았다.

나는 생각이 많은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자주 멍 때리는 사람이었다. 특히 어떤 사물을 보다가 멍 때리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식은 커피가 반쯤 찬 컵이라던가, 노트북에서 돌아가고 있는 화면보호기, 카톡 알림을 보내는 핸드폰의 노란 불빛, 얼마 전에 새로 산 안경...아 맞다, 이건 왜 안끼고 쳐다보고 있는 걸까.


이렇게 아무 의미 없이 물건들을 쳐다보고 있으면 물건과 관련된 기억이라던가, 새로운 이야기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별 것도 아닌 일에서 의미를 찾아내고 이야기를 쓰는 과정을 반복하다보니 쓰고 싶은 글이 생기는 날이 종종 생겼다.


잊고 지냈던 노래가 우연히 생각나서 찾아 들으며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도 했고, 선선해진 날씨와 일기장의 날짜를 보며 삼십 대의 속도로 전진하는 나의 시간에 대해 쓰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결론도 없고 의미도 없고, 기승전결도 갖춰지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필터 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을 나열하는 수준이다보니 별 내용을 갖추고 있는 것 같지도, 재밌지도 않아서 그냥 지워버린 글들이 더 많다. 바닷가 백사장에서 나뭇가지로 슥슥 적은 글들이 파도에 한꺼번에 사라지듯, 쓰다가 지워버린 글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애초에 내 생각이 아니었던 것처럼 비워버리고나면 다시 다른 생각이 들어올 틈이 생길 거라며, 그 땐 좀 괜찮은 글을 쓰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해본다.


사실 내 글이 다 괜찮아야한다는 법은 없는데.. 브런치는 나에게 '작가'라는 타이틀을 줘서 글 쓰는 것에 대해 약간의 부담을 안겨준 것 같다. 수 많은 작가들 사이에서 내 글이 한 번이라도 더 읽히게 쓰기 위해, 브런치에 글을 올릴 땐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되고, 그래서 브런치 화면을 켜놓고는 더 자주, 길게 멍 때린 채 앉아있다. 습관적 멍때림과 글쓰기를 반복하다보면 어느 새 발행해도 될만한 길이의 글이 얼추 완성되어 간다. 지금 보니 중간에 날리고 싶은 부분도 있고, 시작하는 부분이 너무 붕 뜨는 것 같은 기분도 들지만 이 글은 지우거나 고치지 않을 생각이다. 지금 느끼는 이 부담을 모른 척 할 생각이다. A+급 답안이 수두룩한 답안지 사이에서 겨우 이름만 적힌 채 백지 상태에 가까운 열등생의 답안지가 된 기분이지만, 가끔은 뭐 하나 얻어걸리는 게 있어서 부분점수를 받기도 하는 거니까. 어찌 됐건 브런치는 나에게 부담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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