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한 Sep 01. 2022

잘해왔고, 잘하고 있고, 잘할 거야

 언제나 그랬듯이

오늘은 힘들다, 나 죽겠다는 글 말고 좀 씩씩해보이는 글을 쓰려고 한다. 이 복잡한 세상에서 내가 살아남으려면 얼마나 더 빠릿빠릿해져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타고난 멘탈이 물닿으면 찢어질 종잇장이고 화가 나면 눈물부터 고이고 당황하면 목에 뭔가가 걸린듯해서 말도 잘 못한다. 집에서나 똑똑한 척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싶은데 엄마 아빠도 이쯤 되면 아실 것 같다. 아이고 미운 우리 새끼 얼마나 깜찍하고 등신 같은지.



갯벌에서는 발버둥 칠수록 발이 쿡 박혀버려서 옴짝달싹 못하게 된다. 이상하게 작년 말부터 뭔갈 하려 할수록 꼬이고 엉키다가 결국은 엎어지는 일이 부지기수다. 주변에서 나를 몇 년간 지켜봐왔던 지인은 아주 조용하고 은밀하게, 혹시 여기라도 가보겠냐며 사주카페 위치와 번호를 전해 줬다.

어렵게 구한 알바 자리는 정규직 면접이 줄줄이 잡히면서 한달 쯤 일하고 접어야만 했고, 면접에서는 줄줄이 탈락을 했다. 어쩌다 합격을 한 곳에서는 정규직이 아니라 무기계약직 근무부터 제안을 했다. 그 많은 기회에도 불구하고 결국 정규직 자리는 없었다. 그래도 할 수 없다. 계속 나를 들이민다.

어느 날은 회사가 요구하는 자격 요건에 미달되는 걸 알면서도 영문 이력서와 레쥬메를 넣었고, 불과 3개월 전에 최종면접에서 탈락했던 회사에 똑같은 직무로 한번 더 지원했다.



이렇게 수도 없이 들이대다가, 어떤 날은 정말로 기세가 꺾여서 내가 했던 모든 게 다 의미없어 보여서 집어치우고 싶을 때도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도 있었다.

두 시간만에 불합격 5콤보를 맞은 날도 나에겐 조금의 빈틈도 허락되지 않았다. 위에는 블라우스와 정장 자켓을 입고 밑에는 다 늘어난 시퍼런 고무줄 반바지를 입고, 한껏 입꼬리를 끌어올려서 웃으며 줌으로 화상 면접을 봤던 날은 상체와 하체 둘 중 어느 쪽이 내 본체인가 싶었고,

십 몇 년 만에 동생이 프로가 되어서 집에 축하 소식이 쏟아지던 날, 나는 잘 봤다고 생각했던 최종면접의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말문이 막혀서 방에 처박혀 멍때리느라 동생에게 축하한단 말도 못해준 나는 도대체가 얼마나 속이 좁아 터졌고, 겉과 속이 똑같이 못난 혈육인가 싶었다.


그러다가 제정신이 돌아오면, 종이에 내가 직면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적어보고 그 일들이 차례대로 일어날 가능성을 계산해본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내가 최악을 피하기 위해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들을 적어본다. 사실 뻔하다. 몸이 힘들 때까지 운동해서 잡생각 떨쳐버리기, 자기소개서 입사지원서 하나 더 쓰기, 거울 보고 면접 연습하기, 풀죽은 모습 보이지 않기 등등.

뭐라도 쓰고 나서 격해진 감정이 가라앉고 마음이 차분해지면 다시 한번 더 최면을 건다.

나는 여태까지 잘해왔고, 잘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잘할거라고.

그렇게해서 한 군데라도 더 지원하고 나서 침대에 누워야 마음이 편해진다. 편해진 마음으로 잠을 청해야 자고 일어나서 조금은 까먹고 다시 힘내고 웃을 수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남들 5번 떨어질 때 내가 10번 떨어졌다는 건, 남들이 5번 지원했을 때 나는 최소한 10번은 지원을 했다는 증거다. 남들보다 많이 지원했으니까 많이 떨어지는 게 당연한 거고, 한 군데 떨어지면 두 군데에 지원을 하면 된다.

원래가 독한 구석이라곤 없고 눈물은 많은 편이라, 최종면접에서 떨어진 날엔 샤워기를 틀어놓고 물줄기보다 좀 더 세게 울어버리는 덜떨어진 짓을 할 때도 있지만, 두렵거나 어쨌거나 울면서라도 한번 더 지원하고 뭐라도 해보려고 하는 게 진짜 용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부터 용기있는 사람이다.



객기 비슷한 용기를 낸 지 몇 달이 지났고 요즘 일주일에 한 두 곳 정도 연락이 오고 있다. 여전히 최종 면접에서 연봉을 깎으려드는 일부 회사와 최선을 다해서 나에게 관심없음을 표현하는 일부 면접관 때문에 데미지는 좀 입고 있지만.

오늘은 기대도 하지 않았던 외국계 회사에서도 2주만에 면접 제안이 왔다. 경력은 살짝 부족한데 레쥬메를 보니 인터뷰를 좀 더 해보고 싶다고 했다.

두드려야 열릴 것이다. 뭐라도 해야 길이 생길 것이다. 나는 나답게 살 수 있는 인간으로 발전해나가서 생존법을 터득하는 중이다.


나는 잘해왔고, 잘하고 있고, 잘할 거야.







2022년 9월 첫날,

세상 요란하고 길게 취업 준비를 하는 애물단지를 믿어주시는 부모님께 무한한 존경을,

십 몇 년 전에 '누나'라는 호칭을 까먹은 것 같지만

제 생일날 용돈을 주시는 한 살 어린 동생님께 적당한 감사와, 꿈을 이룬 것에 대한 가장 큰 축하를 보내며.





작가의 이전글 아이유는 알고 있고, 나는 모르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