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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한 Aug 26. 2022

아이유는 알고 있고, 나는 모르는 것

저는 아이유와 동갑인 여자 사람입니다.


몇 년 전, 이제는 진짜 나이 많이 먹었으니 세상을 좀 알 것 같다 싶은 허세로 가득한 반오십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회에 나가보니, 첫 인턴으로 근무하게 된 회사에서 저는 아무것도 모른 채 앉아있는 시간이 절반 정도였던 정상적인 애송이였습니다. 외부업체에 전화를 100통 정도 돌리고 나서 배가 터지게 욕을 먹다가 하루 일과가 얼추 끝났습니다. 그 이후에는 알아서 잘 딱 깔끔하게 센스있게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없냐며, 다른 분들께 싹싹하게 구는 법을 체득한 인턴은 아니었기 때문에 사회생활이 마냥 매끄럽지만은 못했습니다. 언제 봐도 사이가 좋지 않은 거친 상사 분들과 그 사이에서 불안한 실무자 분들의 눈빛, 그리고 그걸 지켜보느라 눈치밥만 먹고 있는 저는 사회생활 1도 모르겠다며 징징거리는 철딱서니였습니다.


 지금이었다면 그런 일쯤 일찌감치 손털고 나와서, 20대답게 무슨 영화 볼지 생각하면서, 어떤 죽이는 글을 써볼까 생각을 했을 것 같습니다. 그치만 20대 초반의 그땐 이력서의 한 줄이 절실했고 여기서 못하면 이 바닥에서 소문이 쫙 나서 앞으로 취업하기 힘들다는 개소리를 믿고 있었습니다. 전 멍청했구요 젠장, 모든게 잘 맞아떨어져서 완벽하게 속았습니다.


그리고 9시가 훌쩍 넘긴 시간에 퇴근하는 인턴은 지하철에서 코를 훌쩍거리며 아이유의 '팔레트'라는 예쁜 곡을 매일 무한반복해서 듣곤 했습니다. 무대에서 좀 도도한 표정으로 여유롭게 미소를 날리면서 노래를 부르는 아이유는 나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긴 머리보다 반듯이 자른 단발이 좋아

하긴 그래도 좋은 날 부를 땐 참 예뻤더라

오 왜 그럴까 조금 촌스러운 걸 좋아해

그림보다 빼곡히 채운 Palette, 일기, 잠들었던 시간들

I like it. I'm twenty five 날 좋아하는 거 알아

I got this. I'm truly fine 이제 조금 알 것 같아 날

    (···)

I like it. I'm twenty five 날 좋아하는 거 알아

I got this. I'm truly fine 이제 조금 알 것 같아 날

I like it. I'm twenty five 날 미워하는 거 알아

I got this. I've truly found 이제 조금 알 것 같아 날



나와 동갑인 아이유는 본인이 어떤 걸 좋아하는 지도 알고 본인이 너무나도 예쁘고 빛났던 순간이 있었다는 걸 알고 있으며, 좀 촌스러운 걸 좋아한다는 취향까지도 자신있게 말합니다. 그리고 대중들으로부터 사랑도 미움도 조금씩은 알아가고 있다고도 합니다.


 저는 아이유가 이 노래에서 자기 취향과 가치관을 드러내는 힙함, 대중들의 시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어른스러움과 자유로움을 20대의 감성으로 잘 풀어낸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아이유의 열성적인 팬도 아니고 그때 그때 유행하는 K-pop을 잘 찾아듣는 취향도 아니었지만, 그냥 왠지 노래가 끝나갈때 쯤 아쉬워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듣고 다시 듣는 걸 무한반복하게 되었습니다.

 언젠가는 나도 내 취향이나 적성, 뭐 그런걸 찾아서 부끄럽지 않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 이런 생각을 하며 털래털래 걸어서 집까지 가는 길엔 아이유와는 좀 더 거리감을 느꼈고 지구 종말은 왜 오지 않는가 궁금해졌습니다. 카톡으로 저의 징징거림과 궁금증을 무심하게 받아주는 사촌언니와 이모야들은 어차피 전쟁나도 출근은 해야하고 죽기 전에 인수인계는 해야하니까 잘 챙겨먹고 씩씩하게 다니라며 커피 쿠폰을 보내주셨습니다.


오늘 갑자기 그 때가 생각이 나서 '팔레트'를 한참 듣다가, 우연히 [대화의 희열] 아이유 편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모두가 대박이라고 생각했던 <꽃갈피> 앨범 즈음에 아이유는 슬럼프였다고 했습니다. 지금의 거품이 빠지고 나면 음악을 잘 하는 사람이란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다가, 지금처럼 불안하고 근사하게 사느니, 초라하더라도 내가 직접 프로듀싱을 해서 '나'라는 사람을 남겨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한 걸음 쉬어가면서 다시 자기의 길을 단단하게 만들어가려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습니다. 물론 (다소 주관적이긴 하지만) 과정에서 나왔던 '밤편지', 앨범 [Love poem]과 같이 결과물에서 본인의 성장을 매번 보여줬던 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아이유가 이렇게 많은 것들에 대해 고민하고 해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있었던 것처럼, 저도 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해봤지만, 결론은 사실 아직도 저는 저를 잘 모르겠습니다. 25살때 알았던 것들이라고 해서 지금까지도 계속 알고 있는 건 아닌 것 같고, 지금 알고 있는 걸 25살의 저에게 알려줬다 하더라도 잘 이해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조용한 발라드 취향이라고 생각했는데 신나는 스카 음악이나 베이스가 묵직한 밴드음악이 플레이리스트에 더 많아져버렸고, 드디어 맞는 곳을 찾은 것 같다며 목디스크가 터지도록 일을 해보니 그 회사직무는 제 적성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저와 10살 정도 차이나고, 직업도 사는 것도 참 다른 면이 많은, 진짜 접점이 잘 안생기겠다 싶었던 분이 계신데, 희한하게도 아직까지도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고 있고, 가끔은 저녁식사를 하거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사적인 얘기도 많이 나누고 조언도 구하는 귀한 인연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저는 저에 대해서 모르는 부분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취향도, 호불호도, 세상에 쓸모가 있는 사람인지도 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모든 건 상황에 따라 가변적이라는 말 하나로 퉁 치기에는 저는 어릴 때부터 쭉 눈치를 많이 보는 편이고 고민하느라 시도조차 해보지 않은 일이 많은 편입니다. 앞으로도 제 삶에 좀 변주를 줄 수 있다면 제가 안전지대라고 우기는 아집이나 편견, 제가 스스로 설정한 한계 같은 것들을 깨뜨릴 수 있는 일들을 만나면서 남은 서른 살에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을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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