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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한 Aug 19. 2022

짧지 않은 변명



여태껏 만났던 몇 안되는 사람들 중 조금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었다.


희한하게도 한눈에 우리가 좀 더 자주 만나게 될 거란 걸, 그만큼 특별한 사이가 될 거란 생각을 한다. 운동화 속의 고무줄 터진 발목 양말이라던가, 셔츠 안에 입은 목 늘어난 흰 반팔 티셔츠처럼 꼬질꼬질한 것들은 숨기고,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괜찮은 모습을 보여주고 집 앞까지 바래다주는 길에 할 수 있는 재밌는 말을 들려주려고 고민한다. 매사 심드렁하던 내가 내일 저녁 약속을 오늘 오전부터 기다리고 설레하는 게 정말인지 말이 안되는 일인 것 같다.

 내가 몰랐던 너의 습관이나 말투를 알게 되어서 하나씩 기록해두는 날이 생기고, 기념일도 아닌 날에 불쑥 꽃 선물을 내밀어서 니가 놀라고 행복한 표정을 보는 게 좋다. 여태까지 우리는 쭉 좋아지기만 했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헤어짐은 참 아무것도 아닌 이유 때문이었다.


더 이상은 내가 예전같지 않다는 같잖은 핑계를 댄다. 순식간에 상대의 표정에서 그 말 한마디에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가 읽힌다. 다른 사람과 같이 있는 상대의 모습이 더 행복해 보여서, 근데 그게 화가 나지도 슬프지도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세상 구차함을 다 끌어모아도 도저히 상대를 위한 헤어짐이라는 말은 내가 입에 올릴 수 없는 말이다.

이후에도 다른 사람을 몇 번 만나봤지만 정말인지 준비가 되지 않아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쓸 여유가 없다는 같잖은 핑계를 한번 더 댄다.


그런 죄책감도 설거지나 빨래 같은 집안일, 살다 보면 만나는 별에별 사람에 치여 사는 날엔 흐릿해졌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자려고 침대에 누웠는데 하필이면 구글이 몇 년 전에 찍은 사진을 자기 멋대로 저장해놨다가 한꺼번에 보여준다던가, 지인의 SNS에서 세상 잘살고 있는 너의 사진을 보게 된다던가, 함께 봤던 영화가 OTT 채널에 할인 중이라며 왕왕 뜰 때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할수록 생각이 난다. 사소하게 행복했던 일들이 떠오르고 난 후,  나는 도대체가 다른 사람들 앞에선 똑똑한 척 뒤끝 없는 척 하면서 실은 얼마나 세상 어리석고 멍청하고 못되먹은 인간인가 싶은 자책감과 함께, 나와는 다르게 꽤 잘나가고 꽤 잘살고 꽤 사랑받으며 잘 지내는 상대의 모습에 많은 안도감과 그만큼의 괴로움을 느낀다. 허탈함에 눈물이 아닌 헛웃음만 나오는 날엔 시간이 어디쯤에선가 멈춰버린다.


누군가를 만나면서 열렸던 새로운 세계는 어떤 식으로든 내 세계에 흔적을 남긴다. 나는 조금 더 넓어지긴 했지만 그만큼 텅 빈 곳도 많아진 세계에서 살면서 이불킥을 하든 머리를 쥐어뜯든 오늘처럼 지나간 일을 붙들고 궁상을 떨든 어쨌든 간에 내일 아침이 되면 며칠째 널어놓은 빨래를 걷어서 개어 넣고 컵에 눌어붙은 커피 자국을 뜨거운 물로 불려서 닦아내고 떡진 머리를 감고 멀끔하게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 매순간 행복했던 날들은 누군가에겐 뭐같은 시간들로 기억될 거고 누군가에겐 생각날 때마다 쓰리고 씁쓸한 뭔가가 된다. 그러니까 나의 치졸한 변명은 그땐 어리고 서툴러서 그랬다는 핑계도 댈 수 없다.



낮의 쨍한 여름 햇볕이 지나고나면 선풍기 바람이 살짝 거슬리기 시작하는 밤이 오는 계절이 되었다. 찬 공기가 슬쩍 느껴질 때마다 진짜 이제 두번 다시는 실수로라도 같은 짓을 반복하지는 말아야겠다고 한번씩은 각성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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