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다고 말하면 너만큼 안힘든 사람이 세상에 어딨냐고 할 것 같고
그렇다고 해서 나 힘들지 않아, 괜찮아. 라고 말하는 건 거짓말이니까
그냥 별 거 아닌 일에도 조금 짜증을 내고 싶은 날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내 말에 동조해주며 좀 받아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철없는 생각이 드는 날이 있다.
아직 철이 들지 못한 나는 배고픈데 집에 먹을 게 없다며 툴툴거리고
엄마는 그랬냐며 감즙과 단감, 대봉을 동시에 내어주시며 감 정식이라는 센스를 발휘하시니,
나는 거기에 대고 아니 이게 무슨 조화냐며 좀 짜증을 내려다가, 그냥 웃음이 터져버렸다.
요즘은 내 직무 경험에 맞게 입사지원을 할만한 회사도 잘 없는 것 같고(사실은 거의 다 서류탈락을 했고),
그리고 며칠 전에 서류 탈락을 했던 회사에서는 재공고를 띄워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뽑고 있는 상황에다가, 며칠 전에 본 면접은 정말인지 역대급 난이도여서 준비한만큼 잘하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점심을 먹고나서 오후 내내 스스로에게 한참 실망하고 자책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을 하나하나 말하면서까지 내 상황을 합리화하는 건 좀 비겁한 변명을 하는 것 같았고 그래서 갑자기 쓸데없는 데에다가 짜증을 내버렸는데 엄마가 그걸 쏙 들어가게 해버렸다.
대봉감이랑 감즙은 아빠 친구 누구네에서 받은 거고, 단감은 고모네에서 받은 거라며 내 눈 앞에는 먹고 마실 수 있는 감 정식이 한상 차려졌다. 감즙에선 조청과 단감을 섞은 것 같은 단맛이 났고, 단감에서는 달달한 단감 맛이 났고, 대봉에서는 잘 익은 대봉맛이 났다. 글을 쓰고 싶다면서 맛 표현을 그렇게 밖에 못하냐고 엄마가 웃으며 얘기했다. 웃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덜 풀린 짜증을 섞어서 대답해버렸다.
- 응, 난 아직 어리고 솔직한가봐. 유치하고.
- 쉬어가면서 해, 늦다고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 없다.
어릴 적부터 부렸던 땡깡 신호를 감지한 것인지 엄마가 미리 선수를 쳐서 조금 놀라기도 했다. 엄마가 저렇게 받아주지 않았으면 너는 도대체가 왜 말을 그렇게 퉁명스럽게 하냐부터 시작해서 분명 말싸움으로 끝났을 것이다. 늘 제 성격에 못이겨서 주변에 짜증을 내고야마는 나에게 엄마는 한번 져주면서 이겨버렸다.
덤덤하게 말하는 엄마 앞에서 내가 부릴려던 어리광은 쏙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언젠가는 곁을 떠날 거라고 생각했던 자식이 이렇게 철없고 더디게 자라리라곤 엄마가 예상할 수 있었을까. 엄마는 진짜 늘 하는 말처럼 나를 끼고 살고싶은 걸까 아니면 내가 독립하거나 누군가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하기를 바라는 걸까. 엄마의 마음은 가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가끔은 나를 향해 있는 것 같다. 그 마음과 눈이 마주칠 때면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그래서 나는 늘 나에게 져주기만 하는 엄마한테 또 지고야 만다.
오늘도 패자는 말이 없다. 말없이 방으로 들어가서 다시 하던 일을 했다. 포기하고 던지려던 입사지원서를 꼼꼼하게 훑어보고 제출하고, 일기장에 기록해뒀다. 절대로, 어리광 피우거나 포기하지 말 것.
감즙 하나만 더 마시고 철없는 나를 키우느라 고생하시는 엄마를 위해 저녁상을 차려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