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의 대화
같은 장소를 가더라도 데이트로 시간을 보낼 때와 가족여행으로 시간을 보낼 때 그곳에서 드는 생각과 느낌은 한참 다르다. 비슷한 일정의 데이트여도 한적한 근교에서 보내는 야외 산책과 대학교 근처를 빙빙 돌며 골목을 구경하는 산책은 또 다른 느낌이다. 공간마다 다른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공간 자체의 느낌과 분위기도 한 몫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도시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회색 도시','빌딩 숲', '각진 건물' 등 도시의 부정적인 면을 표현하는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오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우리는 (비록 야근으로 만들어진 것일지라도) 서울의 야경과 부산 광안대교의 야경을 칭찬하고 마천루들이 늘어서 있는 뉴욕의 스카이라인을 보고 입이 떡 벌어지기도 한다. 점점 도시화가 진행될 수록 우리는 [빨랫줄],[마당],[골목길],[하늘] 같은 것들을 잃는 대신 높은 빌딩과 아파트, 곡선미를 갖춘 건물 같은 것들을 얻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 엄마보다 앞질러 달려갔던 시장 골목과 문 앞을 지나다닐 때마다 퀴퀴한 물감 냄새가 나던 미술학원도 없어진 동네에서 한참을 허전해하다가, 다른 이야기들로 채워질 골목을 생각하니 다시 안심이 되기도 했다. 비록 나에겐 지나버린 일이겠지만 누군가에겐 새로운 이야기를 매일 써 갈 공간이니 소중하게 여겨졌으면 좋겠다.
할머니 집 대청마루에서 내다본 텃밭, 50살도 넘은 배나무에서 못난이 배를 따먹었던 것과 '못난이'라는 강아지와 마당에서 놀았던 기억이 '할머니 집'이라는 공간 안에 따로 따로 저장되어 있어서 어릴 적 할머니 집은 내가 살던 집보다 훨씬 더 커보였던 것 같다. 지금은 못난이도 없고 돌배나무도 없다. 그 자리엔 기왓집 대신 새 단층주택이 지어져서 큰댁 어른들과 조카 애기들이 살고 있다. 할머니는 지금 요양병원에 계신다. 5년이 넘는 시간동안 할머니의 공간은 침대 위가 전부이다. 가끔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지만 할머니와 내가 동시에 떠올릴 수 있는 공간이 아직 있다는 것이 새삼 신기하고 감사해서 약간 눈물이 나올 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