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하나쯤 없어도 세상은 잘 굴러가겠지만
조금 재미는 없을걸, 아마도...?
중2병을 크게 앓고 또 길게도 앓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땐 지금보다 훨씬 더 감정기복이 심했고 조그만 일에도 심사가 뒤틀려서 중요한 걸 놓치곤 했었다.
같은 반 애와 실컷 싸운 뒤 선생님의 명령에 의해 강제로 짝이 된 날, 너무 자존심 상하고 분해서 일주일 내내 수업을 듣는둥 마는둥 하다가 수행평가를 놓칠 뻔 했던 적도 있었고, 대학교 때 남자친구라고 잠시 만났던 어떤 집 아들놈이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7명을 동시에 만나고 있었던 걸 알았던 날은 밤새서 완성한 과제를 까먹고 제출하지 않아서 0점 처리된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별 것도 아닌 일인 것 같다,라고 말해야 하는데 아직 나에게 있어서 그런 일들은 별 거다. 나는 똑바로 살고 있고 남한테 피해주는 그런 사람도 아닌데, 왜, 왜 다들 나를 못잡아먹어서 안달인걸까. 그럴때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리고 나의 부재로 인해서 세상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예를 들어,
"아, 걔 없으니까 재미가 없네"
"그래도 걔만큼 하는 사람 없었어"
같은거.
관심이 고픈 시절이라 그런가,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해주길 바랬고, 관심을 좀 가져줬으면 싶은 마음이 있었나보다. 그런 생각이 오래 가지는 않았다. 주민등록증을 받기 전, 세상은 아무래도 나같은 게 없이도 잘 굴러가고 별 문제 없을거라는 걸 깨닫게 되었으니까.
어제는 7시 50분에 출근을 했고 오늘은 8시 10분에 출근을 했다. 어제는 6시 30분에 퇴근을 했고 오늘은 7시에 퇴근을 했다. 일찍 출근하는게 무색할 정도로 일이 많은 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계속 터지는 사고들을 수습하고 나서도 하루종일 종종거린 티가 나지 않았다. 결국 오늘 했던 건 어제의 내가 수습하지 못했던 일들 몇 개와 손님 접대용 커피 내오기였다. 내일은 오늘의 내가 수습하지 못했던 일을 하느라 바쁘겠지. 겨우 세 명인 팀에서 두 명이 해외출장을 가고 나니 실감이 났다. 내가 하는 일이 얼마나 작은 부분이고 나머지 두 분이 얼마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지 몸으로, 그리고 머리로 느꼈다. 아는 것도 없고 체력도 슬 떨어질때 쯤 시계는 저녁 7시를 향하고 있었다.
남들이 친 사고를 수습하고나서야 다소 마음이 가벼워졌다. 퇴근하면거 카톡으로 오늘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 쫑알거렸더니, 출장 중이신 팀장님께서 그러셨다.
"아이고 혼자 처리하느라 많이 바쁘셨구나,
이걸 어떻게 다 보상하죠?"
와, 그 말이 생각보다 찡했다.
절대로 내 자신이 대견해서가 아니라,
나 하나쯤 없어도 잘만 굴러갈 세상인 줄 알았는데, 가끔은 덜그럭거리기도 하는구나 싶은 생각이 아주 잠시 나서 그랬다. 6개월차 사무원은 아직 관심이 필요한가 보다. 많이, 많-이많이.